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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3호] 202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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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통신]K팝, 브릿팝의 나라를 흔들다

런던= 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johankwon@gmail.com 2021-11-13 오후 2:50:43

▲ 1960년대 브릿팝의 시대를 열며 30년간 영국 음악이 세계를 휩쓰는 출발점이 됐던 ‘비틀스’의 공연 모습. photo 뉴시스
영국 언론들도 과거와는 달리 한국의 대중예술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관련 기사도 자주 등장한다. BTS, 블랙핑크, ‘기생충’, ‘오징어게임’ 등 이루 다 언급할 수 없을 만큼 한국의 대중예술은 전 세계로 진출한 상태다. 이제 본격적인 중흥기로 들어선 듯한 느낌마저 든다. 한식도 세계인들은 ‘기막힌 신대륙의 발견’으로 본다.
   
   드디어 한국이 영국에서도 경제력만이 아닌 문화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사실 영국은 유럽 국가들 중에서 한국의 문화예술에 대해 그동안 가장 인색하게 평가한 국가다. 한국의 예술을 변방의 예술로 취급해 점수를 주지 않았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대중예술에 강하다. 대중예술 중에서도 특히 음악에 강하다. 세계 음악은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초네, 미국의 재즈와 컨트리 앤 웨스턴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분점하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1960년대 후반부터 나타난 영국 대중음악, 즉 브릿팝(Britpop)이 석권해버렸다. 이후 영국의 대중음악과 음악가를 제대로 소개하려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다.
   
   영국 대중음악은 어느 날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2차대전의 상처가 치유되어 모든 여건이 충분히 갖춰진 1960년대에 싹이 트기 시작했다. 1970~1980년대 전성기 때는 세계 팝음악과 브릿팝은 동의어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지금은 많이 쇠약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영국 대중음악계는 세계인이 사랑하는 팝음악을 꾸준히 생산해내고 수출하고 있다.
   
   세계인들은 영국에서 생산되는 팝뮤직 전체를 통칭해 브릿팝이라고 부르는 반면 영국인들은 브릿팝을 더 좁게 정의한다. 영국인들은 1960년대 초반 비틀스와 아류 그룹들이 불을 붙이고 1970년대를 거쳐 1980~1990년대에 꽃을 피운 음악만을 브릿팝이라고 부르기를 주장한다. 특히 1960~1970년대에 10대와 20대를 지낸 베이비부머 세대(Babyboomer·1946~1964년생)는 자신들이 만들어내고 즐기던 음악만을 ‘브릿팝’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머지는 그냥 ‘브릿뮤직(Britmusic)’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영국 사회의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이들에게 브릿팝은 살아있는 음악이다. 그들에게 브릿팝은 여전히 중요하고 유효하다. 현재의 영국 팝음악도 브릿팝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베이비부머들이 젊을 때 즐겨 듣던 7080 음악이 이미 흘러간 가요가 돼버린 것과는 다르다. 어떻게 하면 K팝이 현재의 위치를 지켜낼 수 있을까. 두 세대를 이어가고 있는 브릿팝의 예를 보면서 살펴보자.
   
   
   변방 영국 음악의 미국 침공
   
   브릿팝의 기원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그래도 비틀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비틀스를 시작으로 영국 대중음악이 처음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그 후 거의 30년간 영국 음악이 세상을 휩쓸었다. 비틀스의 선풍적 인기로 시작된 영국 음악의 미국 시장 지배를 미국인들은 ‘영국의 침공(British Invasion)’이라고 호들갑을 떤다.
   
   당시까지 미국에서 영국 음악은 그냥 변방 음악일 뿐이었다. 비틀스를 통해 영국 팝음악에 눈을 뜬 미국인들은 영국 팝아티스트에게서 새로운 세계를 찾았다. 미국에서 불붙기 시작한 브릿팝 밴드들은 록밴드의 본고장인 미국을 넘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비틀스로부터 시작된 브릿팝은 영국 현대 역사의 한 자락이다. 1960년대는 영국이 1·2차 대전에 휩쓸려 엄청난 피해를 당하고 대영제국의 위치에서 밀려나 겨우 숨을 쉬기 시작한 때였다. 어떻게 보면 암울한 시대의 끝에서 문화예술의 꽃이 피기 시작했고 영국인은 전후 처음으로 인생을 즐기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대는 영국의 대중예술이 ‘풀스윙(full swing·풀가동)’을 시작했다고 해서 ‘스윙잉 식스티스(swinging sixties)’라는 말도 생겨났다. ‘스윙잉 식스티스’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전후 세대들이 주동이 되어 2차대전의 상처가 아물 때쯤인 1960년대 중반부터 런던에서 시작된 일종의 예술문화 현상을 지칭하기도 한다. 특히 이들은 예술, 음악, 패션에서 기존의 고착된 사조와 관념을 넘어서는 유행을 만들어갔다.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젊은 영혼들이 위대한 예술을 창조해 냈고 사회 각 부문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패션디자이너 메리 퀸트의 미니스커트가 거리를 휩쓸었고 비틀스의 음악과 함께 그들의 더벅머리가 유행했다. 펑크, 히피들이 런던의 킹스로드, 켄싱턴 하이스트리트, 카나비스트리트, 피카딜리 서커스, 캄덴타운을 점령했다. 마리화나와 히피가 유행했고 동시에 성해방이 시대사조가 되었다. 베트남전쟁이 불러일으킨 반전운동으로 영국 주둔 미군 부대 담에는 CND(핵비무장운동) 행동대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영국 젊은이들은 중남미 해방전쟁을 하다가 죽은 체 게바라를 인쇄한 티셔츠를 입고 뜻도 모르는 중공 홍위병들의 붉은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다녔다. 국영기업 적자, 산업 침체, 노동조합 파업 등으로 영국병이 깊어갈 때였다. 급기야 영국병을 고치려고 보수당 마거릿 대처 정권이 노동당으로부터 정권을 뺏어 대대적인 영국 개혁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런 격동기에 문화예술이 폭발한 것이다.
   
   당시 브릿팝의 전기기타와 현란한 사이키델릭 조명에 10대들은 환호했다. 밴드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반문화의 산물이었다. 당시 영국 사회와 언론은 이런 젊은 음악을 권장하지는 않았지만 무작정 비판하거나 막지도 않았다.
   
   특히 브릿팝 밴드는 전후 지어진 ‘소셜하우징(social housing·지방자치단체의 임대주택)’인 대단지 시멘트 아파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대처 정권의 노동조합 개혁, 적자 탄광 폐쇄, 사회복지 축소 등으로 궁지에 몰린 젊은이들에게 유일한 위안이기도 했다.
   
   
▲ 1990년대 브릿팝의 양대 산맥을 이뤘던 밴드 ‘블러’(위쪽)와 ‘오아시스’. photo 위키피디아

   오아시스 vs 블러
   
   마거릿 대처를 이은 존 메이저 정부가 무너지고 토니 블레어가 등장하면서 영국 부흥의 희망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브릿팝 밴드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단히 애국적인 모습을 보였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부당한 대접을 받던 젊은이들은 밴드들의 그런 모습에 열광했다.
   
   당시 브릿팝 밴드는 모두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남성적인 면을 자랑스럽게 드러냈다. 마치 로디드(Loaded)라는 남성 취향의 잡지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노동자 계급과 노동당의 이미지가 묘하게 조합된 ‘상남자 문화(lad culture)’에서 파생된 음악이었다. 전통적인 로커들이 지향하는 반사회적이고 반체제적이고 비애국적인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그들은 영국 국기 유니언잭을 자신의 앨범 표지에 싣고 유니언잭을 허리띠에 차고 나와서 자랑스럽게 흔들며 연주했다.
   
   그중 1991년 맨체스터에서 결성된 ‘오아시스(Oasis)’ 멤버들은 토니 블레어 총리 초청으로 다우닝가 10번지의 관저를 방문했다. 이때 리드보컬인 리암 갤러거가 블레어 총리와 악수하는 사진은 한 시대를 상징하는 사진이 됐다. 리암 갤러거는 노타이이긴 하나 드물게 양복을 입고 가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블레어 총리를 좋아하고 지지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블레어의 영국은 어찌 보면 문화 부흥의 시대였다. 런던이 세계 패션의 중심지 중 하나로 떠오르고 ‘젊은 영국 미술인’이라 불리던 YBA(Young British Artist)들이 세계 미술계의 총아로 등장했다. 데미안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사라 루카스 같은 작가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동부 런던에 위치한 예술대학교 골드스미스칼리지 출신들이다. 이들이 만든 미술을 ‘브릿아트(Britart)’라고 한다. 오아시스와 함께 브릿팝의 양대 산맥인 ‘블러(Blur)’의 리드보컬 데이먼 알반도 골드스미스칼리지 출신이다. 오아시스와 블러 밴드는 브릿팝의 최전성기를 열었다.
   
   두 밴드의 경쟁은 영국 대중지들이 부풀리고 과장한 면도 있다. 대중음악 전문잡지 NME(New Musical Express) 1995년 8월 12일 자 표지를 보자. 두 밴드를 ‘영국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이라는 선정적인 제목으로 소개했다. 그 밑에는 블러의 데이먼 알반과 오아시스의 리암 갤러거의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싣고 ‘8월 14일 거대한 순위 마지막 결투(The Big Chart Showdown)’라는 제목을 달았다. 오아시스가 ‘롤 위드 잇(Roll with It)’ 음반 발매 계획을 세우자, 언론이 블러 소속사를 부추겨 라이벌 간 발매일자를 피하던 업계의 묵계를 깨고 ‘컨트리 하우스(Country House)’ 앨범을 같은 날 발매하게 한 것이다. ‘시대의 결투’는 블러가 27만장을 팔고 오아시스가 22만장을 팔아 블러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둘은 서로 승부를 주고받았다. 나중에 블러의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The Great Escape)’는 오아시스의 ‘모닝 글로리(Morning Glory)’에 참패를 당했다. ‘모닝 글로리’는 영국 내에서는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의 3배인 450만장, 전 세계에서는 10배에 달하는 2200만장을 팔았다.
   
   사실 두 밴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비된다. 오아시스 멤버들은 잉글랜드 북부 맨체스터 출신으로 알코올중독과 가정폭력, 노동자 계급의 부모, 진보, 공립고등학교 졸업 등의 특징을 가졌다. 마약과 음주 등 사고 투성이에다 아무렇게나 입은 듯한 옷차림과 더벅머리, 괴성을 질러대는 음악을 선보였다.
   
   반면 블러는 잉글랜드 남부 켄트 출신, 예술가 중산층 부모, 보수, 영국에서 제일 유명한 예술대학교 골드스미스 출신, 착실하고 모범적인 영국 청년, 단정한 머리와 복장, 미성의 부드러운 음악으로 모든 면에서 오아시스와 대조된다.
   
   
▲ 1991년 ‘오아시스’의 리드보컬인 리암 갤러거(오른쪽)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에서 블레어 당시 총리와 대화하고 있다. photo BBC

   아이돌에 밀려난 브릿팝
   
   비틀스와 롤링스톤스의 대비도 흥미롭다. 비틀스는 잉글랜드 북부 리버풀 출신에 노동자 집안, 고등학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단정한 머리와 옷차림, 부드러운 음악으로 중산층 청년 분위기이다.
   
   반면 롤링스톤스는 런던 출신, 중산층 부모, 대졸(믹 재거는 영국 4대 명문 런던정경대학교)이면서 봉두난발 머리에 쇠징 달린 가죽점퍼, 쇠사슬 청바지에 가죽장화를 신고 현란한 기타와 드럼 연주에 맞춰 몸을 흔들며 격정적으로 노래한다.
   
   다른 개성으로 영국과 세계 무대를 점령했던 브릿팝 밴드들을 이어 전혀 다른 분위기의 십대 팝스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남자 밴드들이 주름잡고 있던 영국 음악계에 1996년 십대 소녀 아이돌 스파이스걸이 혜성같이 등장했다. 스파이스걸은 전 세계에 1억장의 음반을 판매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그 뒤를 이어 미소년 보이밴드 보이존(1993), 웨스트라이프(1998), 더 백스트리트 보이스(1993)가 줄줄이 인기를 끌었다. 브릿팝과 전 세대 로커들의 전투적인 음악은 가고 달달한 노래를 부르는 미소녀와 미소년의 아이돌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아이돌에 밀려나긴 했지만 브릿팝 밴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트래비스, 스노패트롤, 콜드플레이, 뮤즈, 엘보 같은 ‘브릿팝 2세대’를 통해 지금도 맥을 이어가고 있다.
   
   영국 음악에는 이런 밴드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클리프 리처드. 톰 존스, 잉글버트 험퍼딩크, 엘튼 존, 에릭 클랩튼 등이 세계인을 매혹시켰다. 영국 음악의 기세가 많이 꺾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건재한 비결은 영국만이 아닌 세계를 상대로 하는 다양한 음악을 계속 만들어냈고 시대에 맞추어 부단한 변화를 도모한 덕분이다.
   

   클리프 리처드의 60년 팬 송영선씨
   “1985년 처음 공연 본 이후 150회 이상 전 세계 공연 쫓아다녀”
   

   ‘사람은 십대 때 먹은 음식을 평생 먹고 살고 이십대 때 들은 음악을 평생 듣고 산다’는 말이 있다. 한국의 베이비부머들인 60~70대들이 아직도 7080 음악에 애정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네덜란드 교민 송영선씨<사진>는 클리프 리처드에 꽂혀 60년을 쫓아다녔다. 송씨는 한국에서 경북여고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유학했다.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1983년 초 영국에 온 이후 송씨의 인생은 클리프 리처드의 공연 일정에 맞춰져 있다. 최근에도 클리프 리처드의 영국 일주 투어 13회 중 6회를 함께했다. 공연을 보기 위해 거의 3주를 영국에서 보냈다.
   
   송씨는 “중학교 1학년 때 ‘와인드 미 업, 렛 미 고(wind me up, let me go)’를 들은 이후부터 클리프 리처드를 운명처럼 좋아하게 됐다. 그의 솜사탕 같은 목소리에도 반했지만 클리프 리처드의 노래는 어릴 때 읽었던 유럽 동화 같았다. 흑백이었던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동화 속 컬러 세계가 현실에 나타난 듯했다”고 말했다. 당시 대구 동성로 레코드 가게에서 샀던 LP 표지는 소녀 시절 환상에 젖게 했다. 지금도 클리프 리처드의 목소리는 그를 십대 소녀의 감성으로 이끈다고 한다. 송씨는 “클리프 리처드는 반듯하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았다. 그의 노래보다 인간 클리프 리처드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송씨의 인생에서 클리프 리처드는 어떤 의미일까. 송씨는 “내 삶의 걸림돌”이라고 표현했다. “내가 그때 클리프 리처드를 알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분명 달랐을 것이고 이 시점의 내 인생도 분명 달랐을 것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송씨는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행복했고 현재의 삶에도 만족하기 때문이다.
   
   송씨가 클리프 리처드 공연을 직접 처음 본 것은 1985년이다. 그 이후 세계 곳곳을 쫓아다니면서 최소한 150회는 봤다는 것이 송씨의 말이다. 얼마 전 있었던 런던 알버트콘서트홀 공연 때는 클리프 리처드의 대기실에 특별히 맞춘 화환을 보냈다. 송씨는 “그가 숨 쉬고 존재하는 곳에 내가 보낸 화환이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만들어진 화환을 그냥 사서 보낼 수도 있지만 그건 기성복이다. 그는 맞춤 화환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는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송씨를 보면서 누군가를 평생에 걸쳐 조건 없이 좋아하는 것도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씨는 현재 네덜란드에서 거의 유일한 국가 공인 통번역사이다. 그동안 네덜란드를 다녀간 한국 정부기관, 언론, 운동선수들은 그의 신세를 많이 졌다. 네덜란드의 한국 교민들에게도 송씨는 대모 같은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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