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당시 중공군과 격전을 치른 군우리전투의 생존자 이제트 귄씨(가운데). 양옆은 인터뷰를 주선해준 터키 퇴역군인연합회 회원들로, 그들은 꼬깃꼬깃 간직해오던 태극기를 챙겨 인터뷰에 동행했다.
한국전 당시 중공군과 격전을 치른 군우리전투의 생존자 이제트 귄씨(가운데). 양옆은 인터뷰를 주선해준 터키 퇴역군인연합회 회원들로, 그들은 꼬깃꼬깃 간직해오던 태극기를 챙겨 인터뷰에 동행했다.

10여년 전 터키의 고대 그리스 도시 테르메소스(Termessos)에서 ‘헤론(Heroon)’을 처음 접했다. 해발 1000m 철옹성 도시 한가운데 들어선 높이 10m 정도의 암반 사원. 그리스 고대 도시의 중심에 있는 건물이라 제우스나 아폴로 신전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빗나갔다. 작고 빛바랜 안내판에서 ‘헤론’이란 글자를 발견했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볼 수 있는 지역 영웅을 모신 사원이라는 설명이다. 영웅이란 도시나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몰자를 의미한다. 21세기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헤론은 우리의 ‘현충사’ 같은 공간이다. 전쟁이 터지거나 끝날 때면 모두 헤론에 모여 신성한 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거주민 모두가 참가한 주기적 행사에서 전사한 인물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유족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그리스·로마는 반원형극장에서 축제를 올리기 전 항상 특별한 손님들을 무대에 초대했는데 그들 역시 전몰자 유족과 자식들이었다. 영웅들의 남은 가족들을 통해 저세상으로 떠난 영웅들을 기억하고 찬미한 셈이다.

헤론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사갈라소스(Sagalassos) 고대 유적지였다. 터키 내륙에 들어선 그리스·로마 시대 도시로 해발 1300m 위에 자리 잡은 유적지다. 사갈라소스의 헤론은 높이 5m 정도의 작은 건물 하나가 전부다. 크기나 장식이란 측면에서 볼 때 도시 곳곳에 들어선 신전들에 비해 너무도 초라하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그 어떤 신전보다도 위대하고 신성하게 비쳤다. 이유는 해발 1300m 도시의 최고 꼭대기에 들어선 최고(最高)의 사원이기 때문이었다. 사갈라소스에 넘치는 황제와 올림푸스 신들의 사원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는, 도시 한복판의 간판이 이곳의 헤론이었다. 지방 한구석이 아니라 권력의 한복판인 청와대 머리 위에 들어선 현충사라 볼 수 있다. 그리스·로마를 통틀어 헤론은 신이 아닌 인간을 모신 유일한 사원이었다. 로마 황제용 사원도 있었지만 ‘황제=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불사의 신이 아닌 유한한 삶의 인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신전은 헤론이 유일했다.

터키 수도 앙카라의 한국전쟁 참전비.
터키 수도 앙카라의 한국전쟁 참전비.

앙카라 한국전 참전비는 21세기판 ‘헤론’

21세기판 헤론이라고나 할까? 최근 앙카라의 터키군 한국전쟁 참전기념비에 들렀다. 터키 전역을 거의 다 돌아다녔지만 수도 앙카라는 첫 방문이다. 앙카라는 크고 작은 언덕으로 뒤덮인 도시다. 로마 세계관에 입각한 풍수지리라 볼 수 있지만 앙카라와 로마,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모두 언덕을 끼고 있다. 호텔을 잡자마자 한국전쟁 참전비로 향했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터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다는 차원에서 방문했다. 멀고 낯선 곳에 들르면 일단 신세 진 친척이나 어른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이 예의다.

자동차로 달리던 도중 이슬람 땅에서는 다소 낯설게 비치는 파고다탑을 발견했다. 대략 20m 정도의 높이라 멀리서도 보인다. 참전비와 그 주변은 깨끗하고 정성을 들인 공간으로 느껴졌다. ‘한국공원’이란 이름의 휴식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한국전쟁 중 희생된 터키의 영웅들과 자유의 수호자를 ‘소중하게’ 모시는 성스러운 헤론인 셈이다. 탑 아래 중앙 제단에 헌화한 뒤, 터키 국기와 태극기를 사이에 둔 기념비 바깥 벽을 훑어봤다.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터키군의 이름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터키는 무려 2만1212명의 군인을 파견했다. 미국이 한국전쟁 참가지원국을 수소문할 때 가장 먼저 파견의사를 밝힌 나라가 바로 터키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적응하기 위한 결단이기도 했지만, 터키의 국부(國父)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유훈도 한국전쟁 참전의 배경 중 하나였다. ‘조국에서의 평화, 세계의 평화’라는 원칙이 1945년 이후 터키의 국시(國是) 중 하나였다. 터키군은 1950년 9월 25일 이스켄데룬(Iskenderun)항구에서 출발한 뒤 25일 만인 10월 18일 부산에 도착한다. 이후 곧바로 전선에 투입돼 724명이 목숨을 잃었다. 실종자 166명을 포함하면 전부 890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현재 터키군 전사자와 실종자 묘의 절반 이상은 부산 UN 기념묘지에 안치돼 있다. 이슬람교도는 이장을 하지 않는다. 목숨을 잃을 경우 현지에서 곧바로 땅에 묻는다.

한국전쟁 참전기념비 벽면에 새겨진 전몰 터키 군인들은 ‘부대명, 계급, 출신지, 전사일’이 구분돼 새겨져 있다. 나이는 없지만 사망 당시 18~21세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전사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던 중 특이한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다. 전사일, 즉 터키군이 목숨을 잃은 날의 상당수가 1950년 11월 29일이란 공통점이다. 나중에 확인했지만 11월 29일 하루 만에 숨진 터키군이 무려 218명에 달했다고 한다. 터키 114 보병사단 부대원으로 실종자 94명, 부상자 455명을 포함하면 전부 767명의 사상자가 24시간 안에 발생했다. 한국에 도착한 지 41일 만에 벌어진 초유의 비극이다.

총사상자 40%가 군우리전투서 나와

1950년 11월 29일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중국 인민지원군(이하 중공군)이 원인이었다.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은 1950년 10월 19일부터 시작됐다. 백만 단위까지 오르내리는 대병력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 북부 곳곳에 투입됐다. 중공군은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다 11월 27일부터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는데 동북부의 장진호(長津湖)와 남서부의 군우리(軍隅里)가 주 공격지였다. 767명에 달하는 터키의 대규모 사상자는 중공군의 군우리 공격 이틀 만에 터진 비극이다. 3년간의 한국전쟁 기간 중 터키군 전체 전사자와 실종자의 약 40% 정도가 11월 29일 하루 동안 군우리에서 발생했다.

지구 전체를 다 준다고 해도 자신의 목숨과 바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념이나 슬로건으로서는 지구를 택할 수 있지만 막상 눈앞에 지구와 내 목숨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 답은 뻔하다. 바로 천금만금 내 목숨이다. 터키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은 모국도 아닌 멀고 먼 극동의 추운 땅까지 찾아와 단 하나뿐인 목숨을 바쳤다. 지구 수백 개와도 바꿀 수 없는 수많은 생명이 한반도에서 사라진 것이다. 우리끼리와 민족, 이념을 외치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비난하겠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안다면 터키인의 희생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중국은 북한보다 10배, 100배나 풍요롭고 자유로운 나라지만 과연 몇 명의 한국인이 그런 중국에 살고 싶어 할지 의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절실히 느끼지만 직간접으로 옷깃을 스쳐갔던 그 모든 사람들이 너무도 고맙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던가? 그동안 무심하게 대했던 자유의 수호신 터키 참전용사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었다. 터키 퇴역군인연합회(www. muharipgaziler.org.tr)를 통해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근황에 대해 물어봤다. 생존자나 그 가족이 있다면 찾아가서 인사도 드리고 71년 전 전투 상황에 대해 감사의 뜻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도 전했다. 놀랍게도 메시지를 보낸 지 4일 만에 답장이 왔다. 필자가 머물고 있는 터키 이스파르타(Isparta)호텔 근처에 92살의 한국전쟁 참전용사가 생존해 있다는 소식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최대의 피해를 입은 군우리전투에서 생존한 인물이란 놀라운 사실도 알려왔다.

이스파르타 퇴역군인연합회 사무실에 걸려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들 사진.
이스파르타 퇴역군인연합회 사무실에 걸려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들 사진.

100세 앞둔 라벤다 마을의 참전용사

백수(白壽)를 앞에 둔 참전용사 집을 찾아가기 전에 일단 이스파르타 퇴역군인연합회 사무실부터 찾아갔다. 4명의 퇴역군인이 훈장을 단 군복과 함께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에 걸린 훈장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훈장은 한 나라의 수준이나 미래를 가늠하는 잣대라는 생각을 해왔다. 훈장을 자랑스럽게 대하는 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최첨단 무기에다 돈으로 도배를 한다 해도, 훈장을 이벤트용 장난감 정도로 여기는 나라의 미래는 너무도 뻔하다. 이스파르타 퇴역군인연합회 회장 무스타파(Mustafa)를 비롯해 전부 5명이 군우리 참전용사의 집을 찾는 길에 동행했다. 92세 참전용사의 집은 이스파르타에서 북서쪽으로 30㎞ 떨어진, 케치보를루(Keciborlu)라는 마을에 있다고 한다. 터키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자연산 라벤다로 유명한 곳이다. 마을에 접어든 순간 보라색 라벤다 물결이 펼쳐진다. 멀리 정장 군복을 입고 기다리는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전쟁에서 소위로 퇴역한 노인의 이름은 이제트 귄(Izzet Gun). 차에서 내리는 순간 서로 손을 내밀었다. 잡는 순간, 뜨거운 뭔가가 심장 위로 치밀어 올랐다.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말도 전혀 안 통하는 터키인이다. 그러나 포옹하는 순간 필자도 이제트의 눈 주변도 붉게 물들어갔다. 감사의 뜻과 더불어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인사를 올렸다. “우연한 기회에 개인 자격으로 들렀지만, 5000만 한국인 모두가 자유를 위해 싸운 당신의 희생을 잊지 않고 있다.” 필자의 인사에 대해 이제트는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세계에서 터키인만큼 차를 즐기는 나라도 없다. 중국인도 차를 즐기지만 터키가 한 수 위로 보인다. 터키의 차는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함께 마시는 ‘집단 평등 동류 교제 의식’으로서의 문화이기도 하다. 차를 통해 서로의 친밀감이 쌓이고 넓어지며 깊어진다. 이제트씨는 필자를 집안으로 초대했다.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자는 의미다. 모두 마스크를 낀 채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제트씨의 혈색도 좋고 목소리도 밝아서 건강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요구르트를 매일 먹는 것이 유일한 건강식이다.” 보통 요구르트라고 하면 불가리아부터 떠올릴 듯하지만 원조로 따지자면 메소포타미아와 아나톨리아, 즉 터키가 출발점이다.

이제트씨에게 군우리전투에 대한 기억을 물어봤다. “대략 아군 한 명당 10명의 비율로 엄청난 숫자의 중공군이 몰려왔다. 그들은 무기도 형편없고 군장도 엉망이었지만 한꺼번에 엄청난 숫자가 몰려왔기에 우리 군의 M1 소총도 소용이 없었다. 터키군도 많이 당했지만 중공군 시체가 겹겹이 산처럼 쌓아올라갔던 전투였다.”

이제트씨는 군우리전투 당시 허리에 파편을 맞고 일본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에서의 치료가 끝난 즉시 다시 서울로 돌아와 이틀 만에 다른 전투 지역으로 배치받았다고 한다.

“전쟁 당시 한국인의 모습은 비참했다. 수많은 시체와 넘치는 고아가 일상적 풍경이었다. 이슬람 율법에 따른 것이었지만, 음식은 모두 공평하게 나눠 먹어야만 한다. 당시 터키군의 무기와 음식은 전부 미제였다. 우리는 음식을 받는 즉시 한국인에게 나눠줬다.”

이제트씨가 알고 있는 유일한 한국어는 “이리 와!”라는 말이다. 한국전은 전선에 대한 개념 자체가 모호한 전쟁이었다고 한다. 총탄이 퍼붓는 최전선에도 고아와 피란민이 넘쳐났다고 한다. 터키 군인들이 모두 큰소리로 “이리 와!”라고 말하면 어딘가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떼로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 이제트씨의 기억이다. 지금은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남자 아이 한 명이 특히 자기를 따랐다고 한다.

2021년을 기준으로 할 때 터키는 한국보다 한층 더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나라다. 2017년 터키 영화계를 울린 흥행작 ‘아일라(Ayla)’란 영화 때문이다. 서울에서도 일부 극장에서 상영됐지만 한국전쟁 당시의 5세 여자 고아를 도운 터키군 슐레이만 딜빌리이 하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실화다. 대제국 오스만투르크의 전통이기도 하지만 터키군은 군대 내에 고아원을 운영한다. 이 영화를 본 적이 있는지 물어봤다. “물론 봤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영화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다. 전쟁은 잔인하다. 내 친구들도 많이 죽었다. 4년간 중공군 포로로 잡혀 있다가 풀려난 친구도 있다. 엄청난 공포와 끔찍한 체험으로 인해 귀국한 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고생한 친구들도 많다. 그들은 마약이나 술로 버티다 세상을 떠났다.”

한국전을 다룬 터키 영화 ‘아일라’ 포스터. 2017년 터키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한국전 참전 터키군 하사 슐레이만 딜빌리이와 한국 5세 여자 고아 간의 우정을 다뤘다.
한국전을 다룬 터키 영화 ‘아일라’ 포스터. 2017년 터키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한국전 참전 터키군 하사 슐레이만 딜빌리이와 한국 5세 여자 고아 간의 우정을 다뤘다.

“이슬람 율법 따라 한국인과 음식 나눴다”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에 맞춰 한국전을 다룬 프로파간다 영화 ‘장진호’가 등장했다. 14억 인구대국답게 영화가 나오자마자 ‘전 세계 최고 흥행’이라고 한다. 전체주의 체제는 권리와 개인이 아닌 의무와 국가를 우선시한다. 무조건 영화관에 가서 도장을 찍어야만 한다. 군우리전투와 똑같은 날에 시작된 장진호전투에 대해서도 이제트씨에게 물어봤다. “접근전에는 서툰 군대가 미군이다. 멀리서 엄청난 화력으로 공격해서 초토화시킨 뒤 점령하는 식의 전쟁에 익숙하다. 미군은 수만 단위의 인해전술로 나선 중공군과의 접근전을 피해 남하했다. 장진호전투는 그런 배경하에서 벌어졌다. 중공군의 전략전술과 힘에 밀려 미군이 졌다고 보기 힘들다. 군우리에서도 접근전, 육탄전의 대부분은 터키군에 맡겨졌다. 군우리전투에서의 희생도 터키군의 영웅적인 육탄전 때문이었다. 덕분에 미8군의 퇴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항상 전진만 하고 최후의 마지막까지 전선을 지키는 것이 터키군의 전통이다. 장진호 주변에 터키군이 있었다면 미군이 퇴각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미 20년 전 기억이지만 프로레슬링 챔피언에서 미네소타주 상원의원까지 오른 제시 벤추라(Jesse Ventura)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의 집무실 벽 한가운데에 ‘전쟁 중 포로(POW)와 행방불명자(MIA) 깃발’이 걸려 있었다. 제시 벤추라는 베트남전쟁 당시 수중폭파 전문 ‘네이비실(Navy Seal)’ 요원으로 활약했었다. 인터뷰 당시 대통령 후보에 오를 정도의 인기 절정 정치가였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벤추라가 던진 말 한마디는 아직도 뇌리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영웅을 갖지 못한 사회나 나라에는 문명·문화가 없다. 사회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이 많고 항상 기억하는 곳이 문명·문화 선진국이다. 미국의 힘은 경제나 군사가 아니라 바로 수많은 ‘무명의 영웅들’에게서 나온다.”

시간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타임슬립(Timeslip)이라고 할까? 21살 터키 청년이 경험했던 한국전쟁의 참상을 71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듣게 됐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얘기하는 내내 느꼈지만, 필자의 손을 잡은 92살 터키인의 뜨거운 피가 머리와 가슴속으로 퍼져 나갔다. 필자의 확신이지만 진짜 사선(死線)을 경험한 사람의 몸과 마음은 평화롭다. 이제트씨의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맑고 부드러웠다. 2022년 1월 1일은 이제트씨의 93회 생일이라고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엉망이 된 2021년을 잊고 이제트씨와 함께 새로운 신년을 기약할 수 있을 듯하다. “터키에 머무는 한 반드시 다시 인사 드리러 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보라색 라벤다 마을을 뒤로했다. 70여년이 흘렀지만 2만1212명의 한국전쟁 참전 터키군에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한다. 평화의 수호신이었던 터키군 전사자 724명의 영혼도 대한민국 역사 최고봉에 자리 잡은 ‘헤론’에서 영원히 추앙되고 기억될 것이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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