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의 한 시장에서 장을 보는 여인. 터키 통화인 리라의 대달러 환율이 1년 만에 80% 폭락하는 등 터키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 ⓒphoto 뉴시스
이스탄불의 한 시장에서 장을 보는 여인. 터키 통화인 리라의 대달러 환율이 1년 만에 80% 폭락하는 등 터키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 ⓒphoto 뉴시스

터키가 수렁 깊숙이 빨려들어가고 있다. 사려 깊고 친절한 터키인들이 깊은 한숨과 어두운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다. 일단 지난해 2월부터 시작된 전염병이 원인일 듯하다. 8400만 인구 가운데 대략 10% 정도인 900만명이 감염됐다. 8만여명이 숨지고, 지금도 하루 약 2만여명의 감염자가 발생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대략 6위의 전염병 피해국이 터키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터키는 600여년에 걸친 ‘대제국(Empire)’ 오스만튀르크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다. 다양한 인종·민족·종교에 기초한 대국이자 대제국을 경험한 나라다. 시리아·요르단·이집트·이스라엘·그리스·아르메니아와 북아프리카 전체를 통치 경영한 경험과 지혜를 갖고 있는 나라가 바로 터키다. 대제국은 다양한 지역과 사람들이 오가는 글로벌 시대의 압축판이다. 그 과정에서 전염병도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익숙하다는 말이다. 과거 역사에 비춰볼 때 코로나19가 현재 터키인이 겪고 있는 고통의 핵심이 될 수는 없다.

깊은 한숨과 어두운 표정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살인적인 인플레와 내일을 모르는 가파른 물가고(高)에 있다. 대제국 후손들의 특징이지만 항상 웃으면서 낙관적으로 살아간다.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들처럼 자학적인 인생관이 드물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단순(Simple)하고 순박(Innocent)한 국민성이다.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여유롭고도 너그러운 세계관이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 앞에서는 당해낼 수가 없다. 전염병에서 비롯된 불안과 공포도 크지만 고물가에서 시작된 낙담과 좌절이 터키 사회 전체에 표류 중이다.

1년 전에 비해 체감물가 100% 상승

터키 정부 발표로는 지난 11월 말 기준으로 1년 전보다 물가가 20% 정도 올랐다고 한다. 터키인 가운데 정부의 발표를 신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의 경우 지난 10월 말을 기준으로 1년 전에 비해 소비자물가가 3.2% 올랐다고 한다. 그 어떤 한국인이 믿을지 궁금하다. 터키는 더하다. 체감물가는 최소한 100% 상승했다. 터키에 2년간 머무르면서 생필품과 숙박비, 기름값 정도의 물가에 익숙한 필자의 감각으로만 대해도 1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오른 느낌이다. 단적인 본보기로 지난 10월까지 한 달 4500리라 하던 자동차 렌트비가 11월부터 9000리라로 올랐다.

문제는 고물가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한층 더 수직상승 중이라는 점에 있다. 2022년 신년에 접어드는 순간, 체감물가 상승률이 한층 더 험악해질 것이란 게 보통 터키인들의 생각이다. 시장에 엄청 풀린 유동성과 원자재 가격 상승이 이유이기는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폭락하는 터키 리라가 근본 원인이다. 12월 7일 기준 환율을 보자. 1달러당 13.71리라다. 정확히 1년 전인 2020년 12월 7일은 1달러당 7.82리라였다. 1년 만에 달러 대비 리라 가치가 대략 80% 정도 폭락한 셈이다. 문제는 속도다. 한 달 전인 11월 7일 환율을 보면 1달러당 9.68리라였다. 불과 한 달 만에 1달러당 4리라 정도가 추락한 셈이다. 필자가 빌린 자동차의 경우 터키 리라로는 렌트비가 무려 80% 정도 올랐지만 달러 환율로 계산하면 오히려 내렸다고 볼 수 있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기억하는 한국인이 적지 않을 테지만 현재의 터키 상황과 비교한다면 당시 혼란은 ‘새 발의 피’ 정도로 느껴진다.

기본적으로 터키는 농업국가다. 농산물·경공업·자연광물을 수출하고 공업제품은 대부분 수입한다. 석유·천연가스(LNG)와 같은 에너지도 대부분 수입한다. 외환 추락은 수입물가 상승으로 연결된다. 수출 단가가 싸지면서 달러를 많이 벌어들일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같은 경제 효과는 멀고 먼 미래의 문제다. 지금 당장은 수입물가 급상승에 따른 물가고가 터키 전역에 곧바로 밀려든다. 주유소 앞 전광판에 새겨진 기름과 LNG 가격은 고물가의 증표로 느껴진다. 대략 하루에 두 번 혹은 세 번 가격이 바뀐다. 11월 초에 디젤 1L당 6.5리라 정도 하던 것이 12월 초부터 10리라에 육박하고 있다.

하루에 세 번씩 바뀌는 주유소 가격

외국에 머물면서 맛보는 ‘작은 기쁨’ 중 하나라고나 할까? 현지인이 이용하는 터키 시장에 들러 사람들의 일상과 생활상을 관찰하고 나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문화의 유산이지만 터키의 중소도시는 보통 1주일에 두 번 야외 시장을 연다. 수백, 수천 개의 좌판과 행상이 몰려온다. 음식 재료도 사고, 사람 사는 냄새와 현지 분위기도 익힐 겸 항상 들른다. 제3자적 관점도 좋지만 가능하면 시장 사람들의 삶 자체에 들어가 살펴본다. 말도 안 통하고 감각도 다르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필자의 방식이지만 매그넘 미니 아이스크림 6종류 세트가 주된 무기다. 예를 들어 시장에 갈 때마다 만나는 올리브오일 좌판 주인에게 아이스크림을 나누며 인사를 하는 식이다. 아시아인이 드물기 때문에 주변의 행상들도 말을 걸며 몰려온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얘기도 나누고 삶의 공기도 읽는다. “쌀을 그렇게 많이 먹는데도 왜 아시아인은 살이 안 찌냐”는 질문은 터키인 대부분이 필자에게 던지는 고정 메뉴다. 터키인의 정서는 1970년대 필자의 유년기 한국과 비슷하다. 작은 뭔가를 선물로 받으면 곧바로 보답하려 한다. 시장에서 파는 달걀·땅콩·꿀·치즈·사탕에서부터 거의 1㎏에 달하는 귤·사과·석류를 선물로 안겨준다. 아이스크림 하나로 맺어진 인간관계지만 깊고도 넓으며 따뜻하다.

지난 30여년에 걸쳐 125개 나라를 여행하며 현지 사정을 자세히 살펴왔지만 2021년 초겨울 ‘한순간’ 밀어닥친 터키의 고물가는 그 어떤 나라에서도 접한 적이 없는 황당한 현실이다. 만성적인 남미형 인플레 경제, 물자 부족이나 식량 위기에서 출발한 고물가 나라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비극이다. 시장에 가면 과일이 넘쳐나고, 기아나 홈리스도 전혀 없다. 그러나 모두가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 한국인에겐 멀고 먼 나라의 ‘강 건너 불’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도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하루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7000명대에 이른 자화자찬 K방역처럼 자칫 잘못하면 터키의 고물가는 한국의 내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시장에서의 ‘아이스크림 대화’를 통해 터키인들의 현실과 고통이 어떤 것인지 관찰해봤다. 주목한 부분은 크게 3가지 차원의 문제다.

모바일 통해 실시간 고물가 반영

첫째 모바일폰의 위력이다. 모바일폰은 선진국보다 개발도상국에서 한층 더 위력을 발휘한다. 사회적 인프라는 빈약하지만 초고속 인터넷망을 깔고 20달러짜리 모바일폰 하나로 ‘IT 최강국’에 낄 수 있다. 터키인은 대부분 중국산 모바일폰을 사용하고 애플 제품은 거의 없다. 놀랍게도 터키의 깡시골에 가도 모바일폰으로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 중국판 내비게이션이나 구글 지도를 통한 배달이지만 주문하면 불과 15분 만에 도착한다. 터키 시장에서 케냐 출신 청년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청년 말이 케냐 나이로비에서도 모바일폰으로 음식을 주문하면 10분 만에 온다고 한다. 허름한 판잣집이 이어진 아프리카 시골이라도 인터넷 생활이 기본이라는 것이다. 모바일폰을 인플레이션과 연결할 경우 어떤 공통분모가 생기게 될까? 속도가 답이다. 제품별 가격 리스트가 인터넷에 등장하면서 사람들 모두가 가격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세상이 왔다.

커피가게에 들러 에티오피아산 원두 1㎏을 주문했다. 40대 주인은 곧바로 모바일폰을 꺼낸다. 하루 전에 본 가격과 얼마나 다른지 알아본다는 것이다. 원두커피 가격의 실시간 변화를 전하는 정보가 인터넷에서 무제한 제공되고 있다. 하루 만에 1㎏당 150리라에서 165리라로 올랐다고 한다. 1㎏에 80리라였다는 기억이 있기에 주변 다른 가게로 가서 다시 물어봤다. 역시 모바일폰을 꺼내면서 165리라라고 말한다. 원두커피만이 아니라 필자가 즐겨 찾는 호두·밤·향료에 이르는 모든 제품의 가격이 인터넷에 다 나와 있다. 매일 아니 매시간 변화하는 가격에 맞춰 판매하는 식이다. 좋게 보면 전국적으로 통일된 가격이지만 가격 인상을 부추긴다고도 볼 수 있다.

실시간 인터넷 가격 정보는 전부 달러와 리라 사이의 환율에 기초한 것이다. 환율이 변하면 자동으로 원두커피 가격도 달라진다. 국가 정책을 통한 완충장치 없이 환율의 변화 그 자체가 곧바로 시장 물가에 반영되는 초고속 경제다. 그렇다면 거꾸로 리라가 상승세를 탈 경우는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모바일폰을 통한 초고속 물가 하락이 생길 듯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물가라는 것이 한번 올라간 이상 잘 내려가지는 않는다. 달러가 추락한다 해도 물가에 100% 반영되지는 않는다. 필자가 직접 경험했지만 지난여름 잠시 리라가 추락을 멈추고 상승세를 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물가 하락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오르기는 하지만 내려가지는 않는 것이 초고속 모바일 경제의 실상이다.

농산물은 쥐꼬리 인상, 농민만 피해

앞서 타산지석, 교훈이라 말했지만 터키의 급작스러운 외환 추락을 보면서 한국의 내일이 걱정된다. 600억달러에 달하는 미국과의 통화스와프가 핵심이다. 2021년 12월 31일 한국과 미국의 통화스와프가 끝날 예정이다. 자화자찬 이벤트쇼만 보일 뿐 한·미 통화스와프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한 발표나 보도가 전혀 없다. 4600억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어 안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 듯하다. 내년부터 미국의 금리도 올라가고 금융시장 내 달러의 유동성도 확 줄어들 것이다. 스와프 대상은 600억달러에 불과하지만 심리적 차원의 경제 효과가 엄청나다. 미국과의 통화스와프가 사라질 경우 한국이라고 해서 환율 안전지대라고 보기는 어렵다.

터키 인플레이션에서 주목한 두 번째 사안은 농산물 가격의 정체성이다. 에덴동산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신화다. 풍부한 농산물을 배경으로 노동 없이도 사시사철 음식과 과일을 즐길 수 있는 아담과 이브의 땅이다. 터키 시장에서 만나는 수많은 농산물은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풍요함을 되새길 현장이자 증거다. 그러나 신의 축복은 인플레이션을 만나면서 저주로 변해가는 느낌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전부 오르지만 농산물 가격은 예외라는 점이다. 필자가 즐기는 허브인 바질·로즈마리·딜·민트는 좋은 본보기다. 한 다발에 1년 전 1리라였던 것이 지난주 1리라25센트로 팔리고 있다. 25%나 올랐지만 100리라에서 125리라로 뛰는 것과는 규모가 다르다. 과일·채소·곡류를 중심으로 한 농산물의 가격은 원래부터 저가다. 시장에 가장 많은 가게가 농산물 행상이기 때문이다.

농산물 대부분은 경작한 농부들이 직접 나와서 판다. 농협이나 위탁판매 기관이 극히 드물다. 저가 가격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겠지만 1리라 하던 로즈마리를 2리라로 올릴 경우 손님은 곧바로 다른 곳으로 간다. 로즈마리·토마토·감자·호박 가격은 그나마 인터넷에서 다루지도 않는다. 귤 1㎏에 대략 500원 정도 하는 판이다. 아무리 올라도 500원에서 600원, 700원 정도가 상한선이다. 결국 농산물 판매상, 즉 농민들만 인플레이션의 최대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다른 물가들은 천정부지로 뛰는데 농산물 가격만 그대로다. 기름·가스·전기세가 거의 100% 수준으로 오르고 있지만 농산물은 1~2리라 수준의 상승에 그친다.

세 번째 주목할 부분은 인간의 심성 파괴다. 물건을 팔아도, 구입해도 모두가 손해를 보는 느낌으로 살아간다. 닭과 달걀의 문제겠지만 생산자·판매자·소비자 모두 서로를 못 믿는다. 자고 일어나면 가격이 오르기 때문에 지금 물건을 팔아도 내일이 되면 후회가 되는 묘한 심리가 일상이다. 물가가 빨리 변하기 때문에 물건 가격도 장소에 따라 전부 다르다. 터키의 편의점에서 1L 우유를 8.99리라에 샀지만 같은 체인점인 다른 곳에서는 6.99리라에 팔고 있다. 터키는 남을 속이고 훔치는 문화와 무관한 곳이다. 대제국으로서의 전통과 경건한 이슬람 신자로서 서로를 인정하면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나라다. 딱 한 번이지만 5년 전 이스탄불 거리에서 주먹다짐 장면을 봤다. 거리에서의 폭력이나 그 흔한 자동차 관련 설전조차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최근 시장에서 주먹과 고성이 오가는 모습을 무려 세 번이나 목격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터키의 품격과 권위가 고물가에 굴복하는 느낌이다.

이스탄불의 한 환전소 앞에 사람들이 돈을 바꾸기 위해 줄을 서 있다. ⓒphoto 뉴시스
이스탄불의 한 환전소 앞에 사람들이 돈을 바꾸기 위해 줄을 서 있다. ⓒphoto 뉴시스

한국과의 통화스와프에 매달리는 터키

전혀 의외지만 터키 고물가의 주범인 외환 추락과 관련해 한국의 역할이 있다. 지난 8월 터키 중앙은행과 한국은행이 체결한 통화스와프이다. 전부 20억달러 규모로 기축통화가 아닌 리라·원으로 이뤄진 기묘한 스와프이다. 8월이면 환율이 1달러에 7리라, 1150원 정도 하던 시기다. 비슷한 조건에서 스와프 계약이 체결됐을 것이다. 문제는 12월 들어서면서 나타난 리라의 급추락에 있다. 현재 터키는 달러는 물론 상대적으로 안정세인 한국 원 스와프에 목을 매고 있다. 원을 받는 즉시 달러로 바꿔서 외환위기를 해결하려 할 것이다. 20억달러 스와프를 빨리 진행하고 싶어 한다. 문제는 한국은행의 자세다. 진행할 경우 4개월 전 스와프 계약 당시보다 무려 70% 가까이 손해를 봐야 할 입장이다. 앞으로 피해 액수는 더더욱 커질 것이다. 아무런 결정도 못 내린 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일단 약속을 한 이상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정도(正道)다.

거꾸로 한국 원이 추락했다고 해도 터키와 스와프에 들어가야만 하듯 계약서에 새겨진 약속 그대로 행하면 된다. 어떤 배경에서 터키와 스와프에 들어갔는지에 대한 논의나 책임은 한국 내 자체 문제에 불과하다. 국제사회에서 퍼질 불신의 눈도 두렵지만,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는 터키인의 마음이 한국과 관련해 한층 더 위축될까 걱정된다. 눈앞에 쓰러진 사람이 있을 때는 일단 병원으로 빨리 데려가야만 한다. 책임이나 원인 규명은 그 이후다. 전 세계를 통틀어 한국을 형제 국가라며 반길 나라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한국전쟁 때 피를 나눈 터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터키와 터키인은 지금 영하의 눈 덮인 아스팔트 위에 혼자 서 있다. 많이 아프고 지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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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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