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간조선 로고

상단주메뉴

  •  소련 붕괴 30년… ‘향수병’에 빠진 러시아인들
  • facebook네이버 밴드youtubekakao 플러스친구
  • 검색
  1. 세계
[2688호] 2021.12.20

소련 붕괴 30년… ‘향수병’에 빠진 러시아인들

우태영  자유기고가 wootaiyoung@hanmail.net 2021-12-19 오후 2:51:01

▲ 지난 3월 5일 스탈린 사망 69주기를 맞아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공산당 지지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올해는 20세기 후반 동안 미국과 대립하며 냉전을 펼쳤던 초강대국 소련이 붕괴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소련은 1991년 12월 세계지도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최근 들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부근에 17만 대군을 집결시켜 침공 준비를 마치는 등 소련 붕괴 이후 갈라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 최근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 소련에 대한 향수가 크게 일고 있다고 러시아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또 30년 전 초강대국 소련을 해체하는 대신 살려낼 수는 없었는지에 대한 논쟁도 뜨겁다.
   
   
▲ 1991년 12월 8일 소련 해체를 결정한 벨라베자조약.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보리스 옐친, 왼쪽에서 두 번째가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왼쪽에서 세 번째가 벨라루스의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 대통령이다. photo 뉴시스

   소련 해체 결정한 벨라베자조약의 3인
   
   소련은 1991년 12월 8일 소련을 구성하는 주요 공화국들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대통령들이 벨라루스에서 모여 소련 해체에 합의한 벨라베자조약에 서명하면서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당시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우크라이나의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벨라루스의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 대통령은 소련의 청산을 결정하고 대신 독립국가연합(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의 창설을 선언했다. 이들은 조약에서 “국제법 주체 및 지정학적인 실체로서의 소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같은 날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했다”고 강조했다.
   
   소련 붕괴 최후의 순간은 서방의 크리스마스인 1991년 12월 25일에 일어났다. 이날 러시아최고인민회의는 국명을 1918년에 레닌이 정한 ‘러시아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서 ‘러시아연방’으로 바꾸었다. 그날 저녁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독일의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에게 전화로 소련 대통령직에서 사임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19시38분 모스크바의 크렘린에서 소련 국기는 영원히 내려갔다.
   
   소련 붕괴 당시까지도 식량, 주택, 의약품 등의 품귀사태가 지속되었다. 소련이 막을 내린 후 러시아 등 소련을 구성했던 사회주의공화국들은 모두 독립하여 자본주의 국가로 재탄생했다. 옐친 러시아 대통령 등은 공산당 독재를 청산하고 풍요로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의 전환을 약속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요즘 러시아는 공산당 독재를 대신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독재가 자리를 잡았다. 경제도 크게 나아진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제3세계 수준이다. 나라의 부(富)는 푸틴과 가까운 일부 특권계층인 올리가르히가 독점하며 빈부격차는 심화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인들이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국토와 인구의 축소이다.
   
   벨라베자조약으로 공화국들이 독립하면서 러시아의 영토는 소련과 비교하면 3분의1이 줄어들었다. 인구의 감소는 더욱 심각하다. 2차대전 직후 소련 인구는 1억6700만명이었다. 1991년 12월 소련이 망할 때 인구는 2억9000만명이었다. 소련은 45년 동안 아무런 국가계획도 없었지만 인구가 1억2300만명이나 증가했다. 특히 1991년 러시아 영토에 거주하는 인구는 1억4800만이었다. 하지만 2021년 현재 이 인구는 1억4600만명으로 줄었다. 러시아가 강점한 크림반도에 사는 러시아계 인구 250만을 더해도 그렇다. 러시아 언론들은 러시아인의 소멸은 명백하다며 우려하고 있다.
   
   
   국토와 인구 축소 안타깝게 여겨
   
   벨라베자조약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획정된 국경선들이 러시아인들과 다른 민족들을 갈라놓은 것도 사실이다. 조약 서명 당시 러시아인 2500만명이 러시아 이외의 공화국들에 살았다. 소련이 멸망하자 이들 중 많은 사람이 공화국들에서 해고당하고 러시아로 귀환했다. 소련의 영토였던 많은 곳에서 인종분쟁이 일어나고 난민들이 발생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을 둘러싸고 전쟁 일보직전이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이미 수차례 전쟁을 치렀다. 또 각 공화국 내부에서 종교적인 극단주의자들의 발호도 불안정 요인이다.
   
   소련 붕괴 30주년을 맞아 러시아에서 최근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국민의 67%는 소련 붕괴를 역사상 최악의 날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탈리 트레차코프 모스크바대 교수는 지난 12월 8일 주간지 ‘논쟁과 사실’ 기고문에서 최근 러시아인들이 갖게 된 소련에 대한 향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소련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이유는 많다. 지난 30년 동안의 모든 사회·경제적인 고통과 엄청난 격차 때문에 소련이 사라진 데 대한 후회가 일고 있다. 소련 당시의 삶은 지금보다는 훨씬 정의롭고, 안정적이고, 예측할 수 있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노인세대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들도 소련의 붕괴를 안타까워한다. 부모, 책, 영화 등을 통해 소련이 얼마나 다양한 업적을 성취했는지를 알고 있다. 상상도 못 할 산업화, 2차대전 승리, 우주탐험 등으로 소련은 선구적인 나라가 되었다. 식량가격이나 연료, 전기, 수도 등 공공요금도 매우 저렴했다. (요즘 러시아인들은) 무상교육과 의료를 부러워하며 심지어는 소련의 아이스크림조차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소련에 대한 긍정적인 신화가 형성되었으며, 이는 억압과 강제수용소, 그리고 다른 소련 시절의 무시무시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로도 덮을 수 없다. 이러한 신화는 소련의 황금시대와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화는 해가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다.”
   
   
▲ 1991년 8월 22일 자신을 축출하려던 쿠데타 실패 후 모스크바에 복귀해 국영 TV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고르바초프 대통령.

   러시아인 67% ‘소련 붕괴가 최악의 날’
   
   소련에 대한 향수는 소련 해체를 공언한 30년 전의 벨라베자조약이 필연적이었는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지는 분위기다. 비야체슬라브 볼로딘 국회의장은 최근 자신의 텔레그램 채널에서 이렇게 썼다. “소련의 붕괴로 소련의 엘리트, 미국과 유럽이 이득을 보았으며 소련의 공화국들은 모두 패자라고 말했다.” 푸틴의 측근으로 평가되는 그는 “30년 전 어려운 시기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소련 최고회의, 지역 당서기들은 모두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자리를 비웠다.… 그들은 국가와 시민을 배신했다.… 소련의 엘리트들이 소련의 붕괴로 경제적·정치적 이득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과 유럽은 소련을 여러 나라로 분할하여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적을 제거하게 되었다.… 소련을 구성한 15개 공화국 중 소련의 붕괴로 이익을 본 국가는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현재까지 각국은 소련 붕괴라는 비극적인 결과에 직면하고 있다. 결국 경제적·산업적 유대는 단절되고 산업적 잠재력도 상실했다”고 평가했다. 볼로딘은 1991년 3월 소련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76%의 시민이 소련을 지지하고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투표한 것을 회고하며, “정치 엘리트들이 나약하여 인민들의 입장은 무시되었으며 소련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주장했다. 볼로딘은 자신의 텔레그램 채널에서 시민들에게 소련 붕괴의 원인에 대해 묻기도 했다. 1만2400명이 참여한 설문에서 공산당 엘리트들의 배신(57%), 외국의 간섭(21%), 허약한 리더십(11%), 공산당의 권력독점(9%), 상점에 물건이 없었기 때문(2%)이라는 순으로 결과가 나왔다.
   
   겐나디 주가노프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의장 역시 지난 12월 8일 ‘역사는 배신자들이 카인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것이다’라는 성명서를 통해 “소련의 붕괴는… 인재(人災)였다. 고르바초프, 야코블레프, 옐친 등의 배신의 결과이다.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과 주변 인물들과 당 관료들은 조국과 사회주의를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벨라베자조약은 완전히 불법이고 위헌적인 일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옐친 등) 서명 당사자들을 체포했어야 했다”고도 했다.
   
   실제 조약에 서명한 우크라이나의 크라프추크 전 대통령은 자신과 옐친 등 3인이 “벨라베자에서 평화롭게 쿠데타를 수행했다”고 시인한 바 있다. 그는 “소련을 보존하기는 불가능했으며, 통제되지 않는 해체가 발생할 경우 수백만 명이 사망할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고 주장했었다. 크라프추크는 지난 8월에도 우크라이나 24TV 인터뷰에서 고르바초프와도 이 문제를 사전에 토론했다고 러시아의 일간 코메르산트가 전했다. 그가 전한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당시 토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옐친 : “각 공화국들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더 많은 권리, 자유, 독립을 원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연방(federation)에서 국가연합(confederation)으로 개혁하는 방안을 생각해봅시다.”
   
   고르바초프 : “국가연합의 사례를 제시해줄 수 있습니까?”
   
   옐친 : “스위스입니다. 당신은 오늘 대통령입니다. 일년 후에는 크라프추크가, 그리고 일년 후에는 내가 대통령이 됩니다.”
   
   고르바초프 : “절대 안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대통령은 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 1991년 8월 22일 모스크바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옐친(오른쪽에서 두 번째). photo 뉴시스

   고르바초프가 3인을 체포했다면
   
   이처럼 옐친 등 3인은 고르바초프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소련의 해체를 선언했다. 알렉산드르 루키아노프 전 소련 최고인민회의 의장은 “벨라루스의 국가보안위원회(KGB)가 옐친 등 세 사람이 소련을 붕괴시키는 협정에 서명한다는 첩보를 획득하여 즉각 모스크바의 본부와 고르바초프에게 보냈다. 벨라루스의 KGB 특수부대가 협정이 서명되는 현장인 사냥터의 숲을 포위하고 서명을 시도하는 옐친 등 3인을 체포하라는 명령만 기다렸다. 모스크바에서는 현 위치를 고수하고 명령을 기다리라는 지시는 내려갔지만 더 이상의 명령은 내려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한 반박도 만만치 않다. 트레차코프 교수는 “고르바초프가 KGB를 보내 옐친 등 3인을 체포하였으면 소련은 살아날 수 있었다는 주장은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소련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시도는 1991년 8월 공산당 지도부와 군, KGB 수장들이 시도한 쿠데타였지만 정치엘리트들이나 다른 공화국들로부터 전혀 지지를 얻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쿠데타 세력에 억류당한 고르바초프를 옐친이 구해내면서 새로운 지도부가 탄생했고 소련은 막을 내렸다. 트레차코프 교수에 따르면,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구해준 것은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사태가 진정된 후 전국에 생중계된 회의에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개혁을 이야기하는 동안 옐친은 연단에 올라가서 소련 공산당 해체를 요구했다. 트레차코프 교수는 고르바초프가 당시 처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을 권력의 정상에 올려놓은 당을 보호하지 못했다. 공산당은 소련의 기반이었다. 옐친은 소련 공화국 지도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의 상관을 모욕했다. 옐친은 그 이전에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승인했다. 옐친은 소련의 영원한 소멸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날이 갈수록 실권은 고르바초프에게서 빠져나갔다. 옐친은 소련에서 가장 부유한 공화국인 러시아에서 걷은 세금이 소련 재무부로 이전되는 것을 금지해 소련에 재정적으로 치명상을 입혔다. 이는 1991년 12월보다 훨씬 전에 발생한 일이었다. 당시 야조프 국방장관과 크루츠코프 KGB 의장은 투옥되었다. KGB는 실질적으로 금지되었다. 소련 중앙으로부터의 군사적인 지원은 없었다. 그러므로 12월까지 소련은 당도, 재정도, 의회도, 군도, 정보기관도 없었으며, 모든 경제적인 수단은 각 공화국 지도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주요 권력기관의 인선을 옐친의 지시에 따라 하였다. 이들은 감히 옐친을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르바초프가 체포명령을 내렸어도 이를 수행할 사람도 없었다.”
   
   
   “소련은 이미 망할 준비가 돼 있었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보리스 야케멘코는 “옐친 등 3인이 국가를 망하게 할 수는 없었다. 소련은 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단언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에서 오래 끌어온 자멸의 과정은 마지막 순간에 가속화될 뿐이다. 소련 멸망의 가장 슬픈 진실은 국가가 멸망하는 순간에 대규모 시위가 없었다는 것이다. 공산당원은 당시만 해도 수천만 명이었다. 그러나 거리에 뛰쳐나와 ‘당신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하고 외친 사람은 없었다. 불쾌하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국가가 사라지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모든 사람들은 살던 대로 살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냉담, 무관심. 이러한 것들이 소련 권력의 마지막 결과였다.”
   
   야케멘코는 소련에 대한 향수가 일어나는 원인으로 “정의의 결핍과 위기, 사회계층화, 개인의 권리 부재 등”을 들면서도 “분명한 것은 우리는 소련으로 돌아갈 능력이 결코 없다”고 경고했다. 그의 설명은 이어진다. “소련은 점차 신화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현실생활에서 가장 좋은 것들은 모두 소련으로 이전시켜놓고 신화로 만들고 있다. 소련은 현실의 그늘이 되었다. 누군가 소련 시절이 얼마나 좋았던가를 말할 때는… 그것은 실제로 소련 시절이어서 좋았던 것이 아니라 그가 20살 청년이었기에 좋았던 것이다. 이제 그는 50살이다. 노인들이 1940년대와 1950년대를 기억하는 것과 똑같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정말 좋은 시절이었어! 물론 당시 그들이 젊었고 희망의 시대였기 때문이지, 추위와 굶주림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러시아인들이 소련을 그토록 즐거움을 가지고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러시아인들이 그 시절을 이상화하면서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소련 시절에도 살았지만 그 시절은 꿈 같은 시간은 아니었다. 문제가 아주 많은 시대였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신협 어부바 콘텐츠 공모전
마감을 하며
응답하라! 2030 정장열 편집장

대선이 50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대선은 처음 본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역대급 비호감 후보들에다...

주간조선 대학생 기사 공모
주간조선 칼럼마당
기업소식
네이버 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