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3년 규슈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한 중국 배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선원들이 일본인에게 조총 사격법을 시범해 보이고 있다. 이들이 가져온 조총을 개량하여 일본 열도 내에 대량으로 조총이 보급되면서 유라시아 동부의 역사가 바뀐다. 현재 다네가시마에는 일본 최대의 우주개발기지가 있다.
1543년 규슈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한 중국 배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선원들이 일본인에게 조총 사격법을 시범해 보이고 있다. 이들이 가져온 조총을 개량하여 일본 열도 내에 대량으로 조총이 보급되면서 유라시아 동부의 역사가 바뀐다. 현재 다네가시마에는 일본 최대의 우주개발기지가 있다.

지난 회까지는 16세기 일본 열도 세력의 분열과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통일, 그리고 그들의 세계 정복 야망에서 비롯된 임진왜란이 그 후 유라시아 동부 일대에 미친 도미노 효과를 살펴보았다. 유라시아 동해안의 일본 열도에서 시작된 이 100년간의 변동은, 유라시아 동부의 약한 지점인 한반도에서 시작되어 또 하나의 약한 지점인 대만에서 끝났다. 일본 열도가 유라시아 동부 일대의 정치적 변동을 일으킬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16세기에 유럽 세력과 교섭을 가지면서 획득한 새로운 무기와 탈중국 중심적 세계관이었다. 어떤 지역이 역사적 변화를 겪을 때, 그 원인은 그 지역 내부에서 발생한 것과 그 지역 외부 세력과의 교섭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는데, 16~17세기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연쇄 반응에서 가장 중요한 외부 요인은 유럽 세력이었다.

이 시기에 유럽 세력은 유라시아 대륙의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유라시아 동부로 접근해 들어왔다. 시베리아에서는 중세 내내 몽골 세력에 눌려 있던 러시아와 만주족의 청나라가, 최후의 유목 국가라 불리는 몽골인의 준가르 왕국을 18세기 중반에 멸망시키면서 유라시아 북부에서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이어서 러시아는 유라시아 동해안의 최북단인 사할린·쿠릴 열도 등 오호츠크해 연안에서 일본과 충돌한다. 17세기 말에 청·조선 연합군과 러시아와 충돌한 국경 분쟁, 이른바 ‘나선정벌(羅禪征伐)’ 역시 이러한 유라시아 북방의 정세 속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유라시아 동해안의 남쪽 끝인 동남아시아에서는, 지난 회의 대만 편에서 언급했듯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유럽 국가들이 유럽 대륙에 발생한 종교 전쟁의 연장전을 이 지역에서 전개하고 있었다. 기존에 인도 문명과 이슬람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동남아시아의 대륙부와 도서부에서는, 후발 세력인 유럽 세력이 이 지역에 기독교를 가져오면서 오늘날 필리핀·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 분쟁의 씨앗이 뿌려진다. 16세기 전기부터 가톨릭 선교사들과 교섭한 경험을 가진 일본 열도의 지배층은, 이들의 선교가 유럽의 제국주의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7~19세기 일본 열도를 지배한 도쿠가와 막부(德川 幕府)는 전국시대와 임진왜란, 여러 차례의 내전 이후 간신히 찾아온 안정을 지키기 위해, 사회 질서를 흔들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려 했다.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해 일정 수 이상으로 태어난 아기를 죽이는 마비키(間引き) 풍습이나, 일본의 남녀 모두를 사찰에 등록시킴으로써 기독교도를 색출해내려 한 정책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기독교를 포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네덜란드와만 경제적 관계를 맺는 한편, 유럽 국가들의 기독교 포교가 진행 중인 동남아시아에서 자국민을 철수시키고 자국 내의 기독교도들을 학살·추방했다.

그런데 16~17세기 일본 지배층이 자국 내의 가톨릭 교도를 학살하는 과정에서는 조선인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는 1592~1598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일본 열도에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일부가 가톨릭으로 개종했기 때문이었다. 일족을 잃고 낯선 곳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에게 가톨릭은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을 터이다. 이런 점에서는 가톨릭교도 조선인 포로들은,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 18~19세기 조선의 가톨릭교도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야마다 나가마사의 고향인 시즈오카현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김시덕
야마다 나가마사의 고향인 시즈오카현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김시덕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노예 상인들이 조선인을 대량으로 포로로 끌고 간 사실은 유명하다. 1597년의 정유재란 당시 규슈의 오타 가즈요시(太田一吉)를 따라 한반도로 건너온 종군승려 게이넨(慶念)은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라는 기록에서 노예 상인들이 조선인 포로들을 부산으로 데려와 노예 시장을 연 모습을 증언하고, 이를 지옥 같은 모습이라고 한탄한다. 당시 일본 열도와 한반도에 체류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가톨릭교도 노예 상인들에게 노예 판매를 멈추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협박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포르투갈과 같은 유럽의 가톨릭교 국가들이 이미 15세기부터 아프리카인 노예를 거래해 왔으며, 같은 시기 일본에서도 16세기의 전국시대 내란 중에 발생한 대량의 노예가 남아메리카 등지로 판매되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조선인 포로들을 노예로 거래하는 것에만 그들이 특별한 죄의식을 느낄 이유는 없었을 터이다.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Francesco Carletti)가 조선인 포로 안토니오 코레아(Antonio Correa)를 일본에서 구입하여 유럽으로 데려간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세계 노예 무역 시장에 편입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담이지만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갔다가 로마에서 살게 된 안토니오 코레아를, 1610년대 이탈리아의 바티칸 신부들이 만주를 통해 한반도에 입국시켜 선교를 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좌절되었다고 한다.(Elisabetta Colla ‘16th Century Japan and Macau Described by Francesco Carletti’·1573?~1636)

진주의 조완벽(趙完璧)이라는 사람도 정유재란 당시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가, 당시 베트남과 교역하던 스미노쿠라 료이(角倉了以)로 생각되는 일본의 거상(巨商)을 따라 베트남을 다녀온 경험의 소유자이다. 그의 이야기는 조선시대 중기의 유명한 학자인 이수광(李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 권17 ‘이문(異聞)’편과 정사신(鄭士信)의 ‘매창집(梅窓集)’ 권4 ‘조완벽전’ 등에 전한다. 조완벽은 베트남에 갔다가, 1611년에 이수광이 명나라에서 베트남 사신과 주고 받은 한시가 베트남에서 유행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일본으로 끌려간 지 10여년 뒤에 진주로 귀향하는 데 성공한 조완벽은 이수광을 만나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완벽과 같은 사례가 적지 않았던 듯,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의 의병군에 참가한 적도 있는 조위한(趙緯韓)은 1612년에 ‘최척전(崔陟傳)’이라는 흥미로운 소설을 집필하였다.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이산가족이 된 최척(崔陟)과 옥영(玉英) 부부가 각기 중국인과 일본인 상선을 타고 베트남으로 갔다가 기이한 해후를 한다는 내용이다.(박희병·정길수 편역,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돌베개)

임진왜란과 동남아시아의 관계에서 흥미를 끄는 인물로 덴지쿠 도쿠베(天竺德兵衛)라는 사람이 있다. 조완벽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상인 스미노쿠라 료이의 아들인 스미노쿠라 요이치(角倉與一)의 선단(船團)에 소속된 덴지쿠 도쿠베는 1626년에 태국을 다녀왔다. 또 17세기에 일본에 정착해 살고 있던 네덜란드인 항해사 얀 요스텐 반 로덴스타인(Jan Joosten van Loodensteyn)을 따라서 천축(天竺), 즉 인도에 다녀왔기 때문에 그의 이름에 ‘천축’이 들어갔다고 한다.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천축이란 동남아시아를 가리키는 것 같다. 아무튼 그는 말년에 자신의 경험담을 ‘천축 도해 이야기(天竺渡海物語)’라는 제목으로 남겼는데, 이 책으로부터 덴지쿠 도쿠베를 둘러싼 기이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즉 그가 인도에서 기독교 마법을 배워왔으며, 사실 그는 임진왜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일본에 잠입해 있던 진주 목사 김시민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에도시대의 인기 엔터테인먼트인 가부키(歌舞伎)의 명작 ‘덴지쿠 도쿠베 이국 이야기(天竺德 兵衛韓)’에서는 복수가 실패하고 정체가 탄로난 김시민이 처형되기 직전, 마침 처형장에 와 있던 덴지쿠 도쿠베에게 “내가 너의 아버지다. 너는 조선인이고 조선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할리우드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5-제국의 역습’에서 악의 축인 다스 베이더가 루크에게 “내가 너의 아버지다(I am your father)”라고 말하는 반전에 맞먹는 순간이다. 이로부터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덴지쿠 도쿠베는, 일본 문화에서 악의 상징인 두꺼비를 타고 기독교 요술을 부리며 일본을 전복하려 하지만 실패한다는 스토리다. 당시 가부키는 1박2일 동안 상연했는데, 희한한 외국 옷을 입은 덴지쿠 도쿠베가 연기를 내뿜는 거대한 두꺼비를 타고 무대에 나타나는 장면은 한여름 밤의 열기를 식힐 ‘납량특집’에 어울리는 설정이었다.

앞에서 ‘인도=동남아시아’라고 했는데, 이를 보여주는 증거 가운데 하나가 캄보디아의 고대 유적지인 앙코르와트에 남아 있다. 앙코르와트에는 1612년과 1632년 등 최소한 4회 이상 방문한 일본인들이 남긴 14개의 낙서가 확인되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모리모토 우콘다유(森本右近太夫)라는 사람이 부모님의 공양을 위해 1632년에 앙코르와트를 방문해서 남긴 낙서이다. 캄보디아 내전의 피해를 입어 글자가 희미해져 있지만, ‘일본 출생(生國日本)’ ‘1632년(寬永九年)’ 등의 글자를 여전히 읽을 수 있다. 한편, 일본 이바라키현의 저명한 문고인 쇼코칸(彰考館)에는 ‘기원정사(祇園精舍)’라는 지도가 전래되고 있다.(한국어 웹에서는 부산외국어대학교 부설 동남아지역원 사이트에 고정은이 올려놓은 ‘현존 最古의 앙코르와트 도면-오해에서 비롯된 뜻밖의 결과물’이란 제목의 글에서 컬러 지도를 열람할 수 있다.) 이 지도에는 정방형의 건물이 겹겹이 배치되어 있고 그 바깥에 정방형으로 해자(垓字)가 놓여 있다. 이 지도 속의 건물은 석가모니가 설법한 인도의 기원정사가 아닌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이다. 이 지도를 그린 일본인이나 낙서를 남긴 모리모토 우콘다유 모두 인도차이나반도를 인도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이 알고 있던 천축(인도)·진단(중국)·본조(일본)을 모두 지배하고자 했다. 세계 지리 지식이 깊지 않았을 터인 평민 출신의 히데요시가 생각하던 인도는 혹 동남아시아가 아니었을지?

모리모토 우콘다유가 부모님의 공양을 위해 1632년에 앙코르와트를 방문해서 남긴 낙서. 캄보디아 내전의 피해를 입어 글자가 희미해져 있지만, ‘일본 출생(生國日本)’ ‘1632년(永九年)’ 등의 글자를 여전히 읽을 수 있다. 소메야 도모유키
모리모토 우콘다유가 부모님의 공양을 위해 1632년에 앙코르와트를 방문해서 남긴 낙서. 캄보디아 내전의 피해를 입어 글자가 희미해져 있지만, ‘일본 출생(生國日本)’ ‘1632년(永九年)’ 등의 글자를 여전히 읽을 수 있다. 소메야 도모유키

조완벽이나 모리모토 우콘다유는 각자의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전기의 동남아시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이 다수 살고 있었다. 이 시기에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인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고, 해외에 살고 있던 일본인이 귀국하는 것 역시 금지했다. 배교(背敎)하지 않은 일본 국내의 가톨릭교도들은 순교하거나 동남아시아로 망명길을 떠나야 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교섭을 담당한 나이토 조안(內藤如安, 세례명 Joan)이나, 전국시대 말기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활동을 한 바 있는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세례명 Justo) 등도 추방되어 필리핀 마닐라에서 죽었다. 추방령에 의해 일본을 떠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살아야 했던 자가타라 오하루(じゃがたらお春, Jeronima)라는 여성이 고향을 그리워하여 보냈다고 하는 ‘자가타라부미(じゃがたら文)’라는 위조 편지가 근세 일본에서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러한 편지가 위조되어 나돌 정도로 당시 일본인들은 동남아시아로 떠난 사람들에 대해 관심과 연민을 갖고 있었다.

조완벽과 마찬가지로 베트남과 무역하던 가도야 시치로베(角屋七郞 兵衛)라는 일본인은,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호이안(會安)이라는 곳의 일본인 마을을 지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역시 추방령으로 인해 일본으로 귀국하지 못하였으나, 일본에 거주하는 친족들과 주고 받은 편지가 현존한다.(이에 대한 한국어 정보는 고정은의 ‘호이안의 시치로베에-가도야 시치로베에(角屋七郞兵衛) 탄생 400년 기념기획전-’을 참조) 호이안의 내원교(來遠橋)라는 다리는 일본교(日本橋)라고도 불리며,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에 일본인들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념을 내세워 동남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둘러싸고 유럽과 맞선 제국주의 일본은, 가도야 시치로베와 같은 인물을 동남아시아 ‘진출’의 선각자로 내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어린이들은 ‘남진의 영웅 가도야 시치로베(南進の英雄 角屋七郞兵衛)’와 같은 연극을 보며 자랐다. 참고로 1687년에 베트남에 표류한 제주 사람 김대황(金大璜)·이덕인(李德仁)도 호이안을 거쳐 귀국한 바 있다.

이렇듯 16세기에서 17세기 전기 사이에 일본인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활동하며 현지민 및 유럽인·중국인과 교섭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던 조선인들 역시 노예나 선원으로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쇄국령이 내려져 일본인이 더이상 해외로 나가지 않게 되자, 동남아시아의 일본인 거점은 서서히 현지에 동화되며 소멸하게 된다. 이러한 추세를 상징하는 것이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라는 사람이다. 당시 태국의 권력 중심이었던 아유타야에는 태국인뿐 아니라 베트남인·중국인·일본인·포르투갈인·네덜란드인 등이 구역별로 거주하고 있었다.(최병욱 ‘동남아시아사-전통시대’,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52쪽에는 이들 외국인의 집단 거주지가 묘사된 1687년 당시 아유타야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일본 시즈오카 출신의 야마다 나가마사는 1612년에 대만을 거쳐 태국에 도착, 아유타야의 일본인 용병대로 두각을 나타내어 일본인 마을의 수령이 되었다. 그는 아유타야 왕국의 왕위 계승전에 개입했다가, 중국인 세력과의 충돌 끝에 좌천되어 1630년에 독살당했다. 그가 사망한 뒤에 일본인의 반란 가능성을 우려한 태국인들은 아유타야의 일본인 마을을 파괴하였고, 이로써 태국에서 일본인에 대한 중국인의 우위가 확립되었다. 야마다 나가마사의 행적은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친 시기에 동남아시아에서 한때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일본 국내외의 정치적 요인으로 인해 사라져 간 일본인 사회의 운명을 상징한다. 여담이지만, 1592년의 임진왜란 발발 소식을 들은 아유타야 왕국의 나레수언(Naresuan) 왕은 일본의 배후를 공격하겠다고 명나라에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태국군이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자국을 공격할 것을 우려한 명나라 측은 이를 거절하였다.(조흥국 ‘실크로드와 한국 문화’, 소나무, 264~267쪽)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태국 측의 이 대담한 제안은 유라시아 동부의 국가들에 강한 인상을 남긴 듯, 명나라의 ‘만력야획편(萬曆野獲編)’이나 조선의 ‘선조실록(宣祖實錄)’ 등에서 관련 기록이 확인된다.

이처럼 16~17세기의 이른바 ‘대항해시대’에 동남아시아에서는 현지 세력과 유럽·중국·일본 등의 외부 세력이 활발하게 교류하고 각축을 벌였다. 한반도의 주민도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의 전쟁포로로서, 수동적이었기는 하지만 이 국제 무역에서 한몫을 차지했다. 그러나 일본의 전국시대, 임진왜란,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 명나라 멸망, 대만 정씨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100년간의 대격변 끝에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 다시 안정이 찾아오자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인과 한국인의 모습은 사라졌다. 다음 회에는 일본 열도가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의 내전을 거치며 정치적 안정을 확립하는 과정을 살핀다. 끝으로, 이번 회의 집필에 도움을 주신 이바라키 기독교 대학의 소메야 도모유키(染谷智幸) 선생님과 서강대 동아연구소 강희정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