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인류는 빙하기의 얕은 개펄을 건너 호주와 파푸아뉴기니에 도착하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섬과 섬 사이를 대규모로 이동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은 전통 의상을 입은 파푸아뉴기니 원주민. ⓒphoto 뉴시스
초기 인류는 빙하기의 얕은 개펄을 건너 호주와 파푸아뉴기니에 도착하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섬과 섬 사이를 대규모로 이동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은 전통 의상을 입은 파푸아뉴기니 원주민. ⓒphoto 뉴시스

‘아프리카 기원설’이라는 인류 이동설이 있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약 20만〜13만년 전 동아프리카 초원에서 발원해 5만~4만년 전 중동과 아시아로 진출했고, 4만~3만년 전에 유럽과 호주로 건너갔으며, 그 뒤 러시아와 알래스카 사이에 있는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대륙까지 이동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륙으로 이동하면서 다른 종과 경쟁을 벌인 끝에 결국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았다는 것이 ‘아프리카 기원설’의 핵심이다.

미국 버클리대학의 레베카 칸(Rebecca L. Cann) 교수팀의 연구에 의해 1987년 정설로 받아들여진 인류 이동설에 대해 과학자들 사이에선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하다. 유골 화석 등 고고학적 증거와 대륙이동설 등 지질학적인 정황, 그리고 미토콘드리아 유전자(DNA) 분석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고인류학에서는 약 30년 전부터 모계 미토콘드리아나 성염색체의 특정 유전자(이를 ‘마커 유전자’라고 함)가 지역별로 어떻게 변하는지를 추적한 후, 각 지역 사람들의 특징이 구분된 시점을 찾아 종의 이동이나 확산 경로를 밝히고 있다. 모계 미토콘드리아의 유사도를 분석하는 이유는 화석 증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인류는 아프리카 이주민인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지구상의 인류는 한 뿌리에서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생인류가 언제, 무슨 이유로, 어떻게 대이동을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 특히 초기 인류가 바다를 건너 오세아니아대륙에 도착한 방법은 고인류학자나 역사가들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다. 과연 초기 인류는 동아프리카의 해안에서 그 멀고 먼 호주까지 어떻게 바다를 건너갈 수 있었을까?

인구통계학 모델로 이동 경로 찾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자바섬에서 너른 인도양을 건너 호주에 도착했다. 이때는 배를 만들어 타고 섬과 섬 사이를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놀랍게도 그 ‘위대한 항해’에서 사용한 배는 갈대를 엮어 만든 작은 배였다는 것이 학자들의 추정이다. 1만7000년 전에 인류가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대륙으로 태평양을 건너갈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시기에 제작된 배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초기 인류는 이 작은 배를 타고 너른 바다를 수없이 건너가 지구 대륙 전체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현생인류가 배를 타고 무작정 호주로 건너간 게 아니라 치밀한 계획 아래 이동했다는 호주 연구그룹의 새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돼 주목을 끌고 있다. 호주 대륙의 역사를 조사하기 위해 결성된 CABAH(호주연구위원회 생물다양성과 유산센터)와 CSRIO(호주 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의 ‘다학제 간 연구팀’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의 연구 논문은 최근 ‘네이처 생태와 진화’와 ‘사이언티픽 레포츠’ 두 곳에 동시 게재됐다.

연구팀은 궁금했다. 수만 년 전 호주 원주민이 섬과 섬 사이를 어떻게 이어가며 이동했는지 그 경로가 알고 싶었다. 그 경로를 추적하기 위해 CABAH의 코리 브래드쇼(Corey Bradshaw) 교수는 정교한 인구통계학 모델까지 개발했다. 그리고 이 모델에 따라 고대 초대륙이었던 사훌(Sahul)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설정했다.

사훌은 호주 북쪽 해안에서 파푸아뉴기니섬까지 뻗어 있던 당시의 지역을 말한다. 지금은 물에 잠겨 ‘사훌 대륙붕’이 된 이곳은 한때 빙하기로 인해 해면 위로 솟아 있었다. 이 대륙붕의 표면에는 아직도 이곳을 가로지른 강들이 바다로 흘러가면서 침식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 사훌 대륙붕은 지각작용으로 서서히 밑으로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사훌을 포함한 초기 인류의 이동 경로와 방법은 어떤 것이었을까. 연구팀에 따르면, 빙하기의 얕은 개펄을 건너 호주와 파푸아뉴기니에 도착하기까지, 초기 인류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섬과 섬 사이를 대규모로 이동하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망골리, 부루, 세람섬에서 파푸아뉴기니로 연결되는 북부 통로가 항해와 생존에 가장 수월한 루트로 확인되었는데, 이 루트를 통해 호주까지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연구팀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기후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크게 다섯 차례에 걸쳐 대이동을 감행했다. 현생인류가 발원한 동아프리카 지역은 당시 거대한 녹지축(green corridor)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지구 자전축이 두 차례 뒤틀리는 바람에 극심한 가뭄과 추위가 지구를 덮쳤다. 당연히 현생인류를 비롯한 동물들은 더 살 만한 곳으로의 이주를 모색했을 것이다.

조직적인 계획 세워 호주로 이동

연구팀은 또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인구집단의 규모도 계산해냈다. ‘기후변화 모델’을 통해서다. 기후변화 모델은 지구의 기온과 해수면 수위, 강수량, 습도 등의 데이터를 입력해 당시 식량자원이 얼마만큼 있었는지를 파악해 2만 년 단위로 지구 곳곳에 어느 정도의 사람이 살았는지를 시뮬레이션하는 연구 방식이다.

결과는 이렇다. 초기 인류가 700년 동안 10번에 걸쳐 70년마다 평균 130명이 호주로 이주했거나 아니면 한 번의 이주에 최소한 1300명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우연히 그냥 호주로 흘러든 게 아니라 조직적인 해양 이주였음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을 수송할 계획을 세운 후 그에 적합한 정교한 배를 만들어 복잡한 해상여행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초기 인류가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인류는 짧은 기간에 오세아니아대륙 전체로 고루 퍼져 살아가게 되었다. 약 3만5000년 전의 유적이 오세아니아대륙 구석구석에 골고루 분포해 있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호주 대륙에서는 1t 이상의 거대한 파충류와 180㎏ 이상의 날개 없는 새의 유골이 발견되는데, 인류가 건너온 이후 갑자기 이러한 대형 동물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다양한 유대류(캥거루처럼 새끼 포유용 배주머니를 가진 동물)는 대형 동물과 달리 서서히 사라졌다. 모두가 인간의 직접적인 사냥이나 간섭에 의해 멸종한 것이다.

이번 연구팀의 연구는 현재 급격하게 변해 가는 지구촌의 사막화와 수온 상승, 빙하 이동 시점과 맞물려 더욱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세계적인 해양기후학 분야 권위자 액슬 티머먼(Axel Timmermann) 하와이대 교수는 “엘니뇨 등 앞으로 기후 온난화로 지구 평균기온이 4〜6도 정도 상승할 것이고, 이는 특히 지중해 지역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라며 새로운 인류 이주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의 인류가 되새겨 들어야 할 일이다.

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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