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일 제1회 중소기업 혁신 네트워크 포럼에서 연설하는 신상철 KAIST 총장. 과기부가 제기한 국가연구비 횡령 의혹에 2년간 시달리다 결국 무혐의로 마무리됐다. ⓒphoto 뉴시스
지난 7월 2일 제1회 중소기업 혁신 네트워크 포럼에서 연설하는 신상철 KAIST 총장. 과기부가 제기한 국가연구비 횡령 의혹에 2년간 시달리다 결국 무혐의로 마무리됐다. ⓒphoto 뉴시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신성철 KAIST 총장과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교수 3명의 국가연구비 횡령 의혹에 대한 감사를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항고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과기부가 2018년 8월 신 총장이 거액의 국가연구비를 횡령했다면서 떠들썩하게 감사에 착수하고 2년 만의 일이다. 결국 과기부의 어설픈 적폐청산 시도는 과학기술계에 아픈 상처만 남기고 실패로 끝나버린 셈이다. KAIST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을 모양이다. 그러나 전 세계 과학계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한 우리 과학자들의 입장은 난처하다. 과연 과거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지조차 불확실하다.

소가 들어도 웃을 의혹

신 총장이 201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에 있는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LBNL)에 200만달러의 연구비를 부당하게 지급했고, 그 돈의 일부를 제자를 위한 인건비로 썼다는 의혹은 황당한 것이었다. 오히려 과기부가 정부의 적폐청산 사업에 떠밀려 과학계 인사를 쫓아내기 위한 ‘정치적 숙청’을 하고 있다는 비난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로 과학계 주변에서 11명의 기관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옷을 벗었다. 그 자리는 여지없이 아무도 전문성과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코드 인사로 채워졌다. 자질이 너무 떨어져 중간에 다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인사도 있었다.

국가계약법을 지키지 않은 DGIST의 잘못이 문제였다는 과기부 감사관의 변명은 옹색한 것이었다. 결국 감사관이 일방적으로 제기했던 의혹은 LBNL이 아직 국제적으로 잘 알려지지도 않은 DGIST를 상대로 이면계약을 진행했고, 장비 사용료를 부당하게 챙긴 것도 모자라서 그중 일부를 리베이트로 돌려주기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과기부가 은밀하게 받았다는 엉터리 투서의 내용을 앵무새처럼 외운 것이었다.

LBNL이 어느 형편없는 나라의 이름 모를 연구소라면 그런 의혹이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LBNL은 과기부 감사관이 함부로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허접한 연구소가 아니다. 흔히 ‘버클리연구소’로 부르기도 하는 LBNL은 1931년에 창립된 이후 미국의 물리학계를 대표해 왔던 가장 권위 있는 국립연구소다.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팩트다.

LBNL은 193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로렌스가 사이클로트론 실험을 했던 곳이다. 현대 물리학의 주역인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로버트 윌슨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LBNL을 빼고 나면 현대 입자물리학의 역사가 무너져버린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정도의 성과를 이룩한 연구소다. 세계 최고의 물리학 연구소라는 뜻이다. 그런 연구소가 DGIST를 상대로 허접스럽고 찌질한 연구비 부정을 저질렀다는 주장은 사실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세계 최고의 과학 학술지인 ‘네이처’까지 나섰다. 신 총장에 대한 의혹 제기가 정치적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지적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전 정권이 임명한 신 총장을 밀어내기 위한 ‘찍어내기식 표적감사’라는 것이 핵심이다. 이념에만 집착하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등학교 동창이고, 영남대 이사까지 지낸 신 총장이 눈엣가시였다는 지적도 소개됐다. 과학기술계에 대해서 호의적이 아니었던 당시 청와대 특정 인사의 강한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검찰의 불기소 처분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누가 봐도 명백한 억지를 가려내기까지 1년8개월이나 걸린 것은 검찰에 부끄러운 일이다.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고 미적거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과기부가 정신을 차려야

이제 공은 다시 과기부로 넘겨졌다. 바닥으로 떨어져버린 과학기술계의 사기를 되살리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보여줘야 한다. 엉터리 부실 감사로 과학기술계를 초토화시킨 관련자들에게 무거운 책임을 물어야 한다. 영혼을 잃어버리고 법과 제도를 무시하는 관료들은 설 자리가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음지에서 은밀하게 돌아다니는 정체불명의 ‘투서’도 깨끗하게 척결해야 한다.

과기부가 연구와 교육에 애쓰고 있는 과학자들 위에 군림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과학기술은 관료들이 책상머리에서 만들어내는 정책에 의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을 순한 양떼로 착각해서 말안장 위에 높이 올라앉아 채찍을 휘두른다고 수준 높은 논문이 쏟아져 나오고, 세계 최고의 기술이 개발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의미한 경쟁만 부추기는 설익은 평가는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과학자들이 진짜 중요한 연구는 내던지고, 연구비 따기에 목을 매도록 만드는 절망적인 현실을 서둘러서 바로잡아야 한다. 부처 이기주의를 위해서 기초과학연구소(IBS)의 정체성까지 뒤흔들어서는 안 된다.

연구와 교육 현장의 과학자들이 신바람 나게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과기부의 역할이다. 남의 것을 어설프게 표절한 엉터리 정책이 아니라 우리 과학자들이 땀 흘리고 있는 연구 현장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자칫하면 과학자들이 과학기술부 폐지론을 들고나올 수도 있다. 과학자들이 외면하는 과기부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과학자들의 노력도 중요하다. 전공 이기주의의 높은 칸막이에 갇혀서 애써 이룩해놓은 과학기술의 성과가 짓밟혀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 60년 동안의 노력으로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선 원자력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창원의 원전부품 산업은 이미 붕괴되었고, 원자력공학과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지경이다. 여전히 미래의 기술인 신재생도 원전이 있어야만 발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외면당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RT-PCR 키트를 개발해서 K-방역을 성공시킨 바이오벤처의 놀라운 성과가 무시되는 현실도 안타까운 것이다. 과학기술의 성과는 간 곳이 없고, 오히려 ‘민주주의’와 ‘투명성’이 K-방역의 핵심이라는 해괴망측한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제는 목숨을 걸고 방역 현장을 지켜낸 의사들이 정체불명의 비선(秘線)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국민 안전을 위한 방역에 총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에 의사들을 배제한 의료 개혁을 밀어붙이는 행태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교묘한 선동적 여론몰이로 의사들을 말 잘 듣는 양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불순한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당장 내 집으로 옮겨 붙을 수 있는 불을 강 건너 불 보듯 해서는 안 된다. 과학자의 이기주의가 아니라 진정 국가와 인류를 위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도모하는 과학기술계의 적극적인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모래알처럼 흩어진 과학기술에서는 진정한 발전이 불가능하다. 형식적인 ‘융합’이 아니라 적극적인 ‘연대’가 필요하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