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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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학위를 마친 권오훈 울산과학기술원(UNIST) 화학과 교수는 2005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향한 곳은 노벨 화학상 수상자의 실험실. 지도교수인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아흐메드 즈웨일 박사는 권 박사 도착 6년 전(1999년) 노벨상을 받았다. 권 교수는 서울대 화학과 94학번이고, 장두전 교수의 지도를 받아 레이저분광학으로 박사학위를 했다.

캘리포니아공대가 있는 LA 인근 패서디나에 가보니, 연구실 동료들이 “교수님이 노벨상을 또 받고 싶어 하신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연구원과 학생들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노벨상을 받은 사람의 랩에 들어간 건 박사과정 때의 연구가 눈에 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권 교수에게 물었더니 그때까지 미국화학회지, 앙게반테 케미(독일화학회지) 등에 20편의 논문을 냈다고 한다.

‘펨토화학’을 노벨상 수상자에게 배우다

즈웨일 교수는 ‘펨토(femto)화학’을 개척했다는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펨토초’는 1000조분의1초를 가리킨다. 지난 5월 7일 UNIST에서 만난 권 교수는 펨토화학을 이렇게 설명했다. “화학반응이 일어난다는 건 분자 모양이 바뀌는 것, 즉 새 화합물이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분자 모양이 바뀌면서 어떤 화학 결합은 끊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화학 결합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는 화학반응의 시작 전과 끝난 후만 생각한다. 그런데 반응이 일어나 화합물에서 결합이 끊어지고 새로 붙는 걸 볼 수 있는 시간대가 펨토초이다. 그렇게 짧은 시간대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을 관찰하는 게 ‘펨토화학’이다. 화학반응은 100펨토초 단위에서 일어난다. 즈웨일 교수님은 이걸 관측할 수 있는 방법론을 만들어 실험적으로 보였다.”

권오훈 교수의 UNIST 내 실험실에는 그가 구축한 ‘3세대 초고속 전자현미경’과 펨토초 레이저 발생기가 있다. 발생기 크기는 큰 턴테이블 정도로, 1000조분의1초 간격으로 빛을 방출하는 레이저빔, 즉 펄스를 만들어낸다. 이 레이저빔을 전자현미경으로 보내 펨토초 간격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 이미지를 모으면 동영상이 되는데 그렇게 하면 펨토초 단위로 화학반응 및 물리현상을 볼 수 있다.

즈웨일 교수가 노벨상을 받았을 때는 사진을 직접 찍지는 못했다. 권 교수에 따르면 당시는 스펙트럼을 찍어 화학반응의 중간생성물을 유추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분자들은 모양이 다르면 다른 색깔의 스펙트럼을 내놓는다. 예컨대 A라는 화합물은 푸른빛을 내고, 최종생성물 B는 빨간색을 낸다고 하자. 그리고 중간에 잠깐 노란색을 봤다고 하면, 노란색은 ‘중간생성물’이 된다. 권 교수는 “화학반응을 스펙트럼을 통해 엿보는 연구였고, 그게 분광학”이라고 말했다.

‘4차원 전자 단층촬영법’ 사이언스 발표

제일 정확한 건 물체 사진을 찍어보는 거다. 전자의 회절(diffraction) 패턴을 찍어 패턴을 분석하면 피사체 모양이 어떤지를 알아낼 수 있다. 전자빔이 나오는 전자현미경과 펨토초 레이저 발생기를 연결하여 펨토초 단위로 연속적으로 사진을 찍어보자는 게 즈웨일 교수의 노벨상 두 번째 프로젝트였다. 권오훈 박사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즈웨일 교수 그룹은 ‘UEM-1’이라는 초고속 전자현미경(Ultrafast Electron Microscope) 시제품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는데 UEM-1은 시료를 찍을 수 있을 정도로 성능이 나오지 않았다. 연구실 동료들은 UEM-2(2세대 UEM)를 만들자는 즈웨일 교수의 말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UEM-2 개발에 권 박사가 투입되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2세대 UEM을 권 박사가 동료들과 만들어낸 건 2007년이었다.

그리고 3년 뒤 권오훈 박사는 2010년 6월 과학학술지 사이언스에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 제목은 ‘4차원 전자 단층촬영법’. 그가 8년간 즈웨일 교수 연구실에서 박사후연구원과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거둔 최대의 성과였다. ‘사이언스’에 한국 과학자의 논문이 실리자, 서울의 중앙일보 기자가 그걸 알고 연락해왔고, 기사는 2010년 6월 25일자에 나갔다. 당시 얘기를 권 교수로부터 들어보자.

“즈웨일 교수는 논문의 1저자가 누가 되느냐를 둘러싸고 연구원들 사이의 다툼을 피하고자 ‘순환 원칙(rotation rule)’이라는 걸 만들었다. 연구하다가 논문으로 낼 성과가 나오면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제1저자를 하라고 했다. 지금은 인하대에 있는 박현순 교수(신소재공학과)와 나, 그리고 스펜서(미국인)까지 세 명이 한 팀으로 일했고, 여기에 새로 미국인 연구원이 합류했다. 마침 큰 발견이 있었는데 새로운 연구원은 기여가 없었으나 ‘순환 원칙’에 의해 사이언스 논문의 제1저자가 되었다. 시간이 좀 지났을 때 그 미국인이 흥미로운 발견을 했는데 ‘순환 원칙’을 깼다. 자기 이름으로 ‘네이처’에 2009년 논문을 냈다. 즈웨일 교수도 당시 이에 개입하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났다. 그래서 ‘사이언스에 1저자로 논문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궁리했고 4차원 전자현미경을 실현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2차원 이미지를 재구성해서 3차원 이미지를 얻는 ‘단층촬영(tomography)’을, 동영상 촬영이 가능하도록 했다. 혼자 실험을 디자인했다.”

권 박사는 이 연구가 즈웨일 교수가 반색할, ‘사이언스’가 원하는 획기적인 연구가 될 거라고 판단했다. 즈웨일 교수는 대가답게 ‘이름 붙이기’에 능했다. 자신이 개발해놓은 2세대 UEM을 ‘4차원 전자현미경’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진정한 4차원이 아니었다. 2차원 공간, 즉 x, y축밖에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시간을 더하면 3차원에 불과하다. 즈웨일 교수는 거기에 ‘에너지’ 차원을 추가해 2세대 UEM이 4차원이라고 강변하고 다녔다.

그런데 권 박사가 ‘단층촬영’을 익혀, 200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진정한 4차원 전자현미경의 토대가 될 데이터를 얻는 데 성공했다. ‘사이언스’에 관련 논문을 투고했을 때 한 논문심사자는 “tour de force(뛰어난 역작)”라고 논문을 높이 평가했다.

권 교수는 이후 미국에 정착하려고 했다. 한국에 가봤자 초고속 전자현미경과 같은 고가의 장비를 구축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이언스’에 논문이 나간 직후인 2010년 여름, UNIST 조무제 총장이 캘리포니아공대에 와서 한국인 박사후연구원과 박사과정 학생 수십 명을 대상으로 학교 설명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조 총장이 권 박사를 따로 보자고 하더니 “장비를 지원해줄 테니 오라”고 말했다. 권 박사는 속으로 ‘장비가 얼마 하는지 모르시나 보다’라고 생각해 “20억~25억원은 들 것”이라고 얘기해줬다. 권오훈 교수는 이때로부터 3년이 지난 2013년 울산과학기술원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30억원의 연구 정착금을 받았다. 30억원의 정착금은 당시 한국 화학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권 교수가 제안을 받고도 3년 후에 귀국한 건 즈웨일 교수의 독특한 캐릭터 때문이다. 즈웨일 교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옆에 두고 싶어 했다. 박사후연구원 2~3년 하면 교수 자리를 찾아 떠나는 게 상례인데 즈웨일 교수는 그렇게 떠나는 사람들을 섭섭해했다. 이집트계 미국인인 그는 동양적 마인드를 갖고 있어서 그런지, 자신의 기질과 잘 맞는 한국인 학생을 좋아했다. 여름철 휴가라고 한 달간 연구실을 비우는 미국인과는 달리 아시아 학생들은 자리를 지키고 꿋꿋하게 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는 사이에 권 박사는 즈웨일 교수의 ‘오른팔’이 되었다. 그래서 울산과학기술원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한국으로 가기 전 3년이라는 시간을 즈웨일 교수에게 줬다. 권 박사는 귀국 1년 전에 서울대 장두전 교수 랩의 후배를 조수로 받고 업무를 인계했다. 그리고 2013년 5월 한국에 왔다.

아흐메드 즈웨일 박사 ⓒphoto 위키피디아
아흐메드 즈웨일 박사 ⓒphoto 위키피디아

30억 정착금 받고 한국으로

권 교수가 UNIST에 와서 한 연구 성과는 크게 세 가지. 세계 최초로 전자 직접 검출 카메라를 장착한 초고속 전자현미경을 2017년에 개발했다. 전자현미경이 작동하는 걸 이때 보았고, 사진 선명도를 높이는 최적화 작업은 2018년에 끝났다. 그리고 이걸 갖고 물리학 연구를 시작했다. 그중에는 금 나노막대의 실시간 진동현상 촬영(2019년), 흑린의 비등방성 형태 변화 과정 규명(2020년) 연구 결과가 있다.

“UNIST에서 완성한 초고속 전자현미경은 시공간 해상도에서 3세대다. 해상도가 올라갔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2세대 전자현미경은 공간분해능이 10㎚(나노미터)다. 그런데 3세대 전자현미경은 1㎚ 이하의 공간분해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0배 정도 해상도가 높은 거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금 나노막대를 골랐다. 1㎚ 이하의 해상도로 실시간 금 나노막대의 진동 현상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금 나노입자는 레이저 펄스를 맞으면 음향 진동을 한다. 나노막대가 부르르 떤다. 레이저를 맞아 순간적으로 에너지가 쌓이면 뜨거워지면서 팽창하고, 그리고 과(過)팽창하면 수축하고, 또 팽창하고 수축한다.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데 이게 진동이다. 권 교수는 일정한 양의 레이저빔을 쪼이면 2% 정도의 부피 증가가 금 나노막대에 있을 거라고 이론적으로 먼저 계산을 했다. 그리고 70㎚ 크기의 금 나노 막대를 실험에 사용했다. 70㎚ 크기의 막대가 2% 정도의 팽창을 한다면 그 크기는 1.4㎚다. 1.4㎚ 크기의 팽창을 한다면 권 교수 그룹이 개발한 3세대 초고속 전자현미경으로 그걸 확인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실제 그걸 보였다. 1㎚ 정도의 물질 크기 변화를 자신이 개발한 초고속 전자현미경이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논문은 ‘물질(Matter)’에 2019년 8월 게재됐다.

흑린 연구는 전자현미경 능력을 증명하는 차원의 연구가 아니다. “전자현미경 성능을 입증하기 위한 시연 연구는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첨단 2차원 물질에 밖에서 에너지가 공급되었을 경우 그 에너지가 어떻게 물질 안에서 흘러가는지 변환 과정을 현미경으로 보았다. 연구 결과가 잘 정리되어 논문이 나왔다.” 흑린은 주목받는 2차원 소재 물질. 흑린의 열팽창으로 인한 구조 변화, 즉 ‘나노 주름’을 찍은 연구 결과는 2020년 10월 학술지 ‘ACS 나노’에 나왔다.

권 교수는 “교수로 임용될 당시에는 30억원의 연구 정착금을 받은 사례가 없었다. 이 정도 지원을 받고 연구를 못하면 ‘먹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사이언스나 네이처에 게재될 만큼 획기적인 연구 결과를 내야’한다”라며 자신의 어깨가 무거움을 말했다.

권오훈 교수는 학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실험물리화학자이자 초고속 전자현미경학자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초고속 전자현미경을 제일 잘하는 사람은 나’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앞으로 계속해서 전자현미경의 시간, 공간, 에너지 분해능을 올리는 한편, 물질의 숨겨진 구조와 재밌는 현상을 규명하려고 한다. 그의 실험실에는 즈웨일 교수가 언젠가 준 선물들이 있다. 그중 하나에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말이 영어로 쓰여 있었다. “Never, never, never give up.”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다. 처칠이 2차대전 때 자국민에게 라디오 연설을 하면서 한 말이다.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 어딘가에 도착하는 법이다. 권 교수가 어디로 갈지 지켜보자.

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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