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아이유가 애니메이션 ‘새미의 어드벤쳐 2’의 더빙작업을 하고 있다. ⓒphoto CJE&M
가수 아이유가 애니메이션 ‘새미의 어드벤쳐 2’의 더빙작업을 하고 있다. ⓒphoto CJE&M

여름철 성수기를 맞아 붐비는 극장 한편에는 흥행작들 사이에서 조용히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영화가 있다. 개봉 20일차에 170만 관객을 모은 애니메이션 ‘터보’다. 올해 개봉한 애니메이션 중 최고 흥행작이다. 이 영화가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애니메이션 더빙을 유명 연기자나 개그맨이 아닌 전문 성우들로만 했다는 데 있다.

애니메이션 영화 더빙의 대세는 연예인 더빙이다. 유명 개그맨들은 물론 아이돌 가수까지 나선다. 그러나 흥행 성적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지난 5월 16일 개봉했던 애니메이션 ‘크루즈 패밀리’는 미국과 영국, 독일은 물론 다수의 국가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개봉 10주 만에 전 세계적으로 5억6300만달러(약 6300억원)를 벌어들인 흥행작이라 흥행에 대한 기대를 더했다.

지난 6월 5일 개봉했던 ‘쾌걸 조로리의 대대대대모험’은 유명 연기자의 애니메이션 더빙 문제로 논란까지 일으킨 작품이다. 원래 ‘쾌걸 조로리…’는 TV 시리즈로 먼저 만들어져 한 케이블 방송에서 수입해 방영하고 있던 것이었다. 당시 주인공 더빙을 맡은 사람은 성우 김정은(40). 10년 동안 쾌걸 조로리 역할을 해 왔기 때문에 많은 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배급사는 극장판 개봉에 맞춰 당시 한창 인기를 얻고 있던 개그맨 신보라와 정태호를 김정은 성우 대신 주연으로 기용했다. 성우 김정은의 목소리에 익숙해져 있는 팬들의 반발도 심했지만, 두 개그맨의 더빙 실력에 대한 비판도 쏟아졌다. 결국 이 영화의 최종 흥행 성적은 관객 수 2만7598명. 10년 동안 TV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치고는 초라한 성적이다.

특히 유명 연기자가 더빙에 참여할 때 받는 많은 개런티가 문제로 떠올랐다. 전문 성우가 주연을 맡았을 때 영화 한 편당 받는 돈은 많아도 500만원. 대개 300만~500만원이다. 그러나 2012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몬스터호텔’의 주연을 맡은 컬투가 받은 돈은 5000만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애니메이션 ‘새미의 어드벤쳐 2’에 참여한 가수 아이유는 1억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보통 성우의 10배에서 30배에 가까운 개런티를 받고 고용되지만, 더빙의 질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는 않는다.

애니메이션 ‘터보’의 흥행 이유로 아동 관객이 극장을 많이 찾는 여름방학이라는 점과 동시에 높은 더빙의 질도 꼽히고 있다. 포털 사이트의 영화 후기에는 성우진에 대한 호평이 줄을 잇고 있는데 ‘원래는 더빙판을 보지 않지만, 앞으로는 챙겨 봐야겠다’거나 ‘이번 기회에 국내 성우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등의 평가도 상당수 존재한다.

‘터보’에서 주인공의 형 ‘체트’의 목소리를 맡은 사람이 바로 애니메이션 ‘쾌걸 조로리’에서 개그맨에 밀려 주연 자리를 놓쳤던 성우 김정은이다. 영화와 애니메이션 팬들이 유명 연기자의 성우 기용을 문제 삼고 있는 데 대해 당사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성우 김정은은 “제작사·배급사의 잘못된 인식 탓이 크다”고 비판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더빙은 입 모양을 맞추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시각적인 연기 대신 목소리로 정보와 감정, 메시지를 모두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캐릭터에 대한 연구는 물론 더빙과 동시에 연기를 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성우 김정은은 “연기자 중에는 더러 타고난 분도 있지만, 더빙을 목소리를 덧씌우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분도 있다”면서 “어떨 때는 연기자와 전문 성우의 차이가 많이 나 PD가 성우에게 ‘너무 튀게 하지 말라’고 주문하는 상황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100만 관객이 들어도 상당한 관객을 끌었다고 평가받는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유명 스타 한 명은 눈에 띄는 마케팅을 가능하게 한다.

유명 연기자들이 전문 성우 대신 더빙하는 것에 대해 “문제 될 것 없다”는 목소리도 있다. 할리우드에서도 애니메이션 더빙은 유명 영화배우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영화 ‘매트릭스’ 우리말 더빙판에서 주인공 네오 역과 ‘텔레토비’의 내레이션을 맡았던 유명 성우 구자형은 할리우드와 우리나라의 더빙 제작 시스템 차이를 지적하며, 우리나라 더빙에서는 ‘원칙’이 없다고 비판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어느 배우를 주인공 목소리로 쓸 것인가를 정해 두고 시작합니다. ‘선녹음, 후그림, 후보정녹음’ 순서로 진행되는 건데요. 배우의 캐릭터부터 음색, 실력까지 고려해 그림을 만들고 보정녹음을 하는 겁니다. 배우가 목소리만 빌려주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만약 뒤늦게 캐스팅됐다 해도 성우들이 받는 것과 같은 트레이닝을 거쳐서 녹음에 참여합니다.” 종종 결과물이 아쉬운 더빙판을 본 관객들이 “원래 목소리가 더 낫다”고 하는 데도 이유가 있는 셈이다. 원래 작품의 목소리는 수없는 회의와 제작 단계를 거쳐 만들어진 것이다. “단순히 언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차원이 아니라 소리, 메시지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냥 연기자를 데리고 오면 연구하고 고민하는 현지화 작업을 하기 어렵죠.”

성우들은 더빙하면서 입 모양을 맞추는 데도 상당한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길어도 한 달 안에 우리말 더빙을 끝내야 하는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에서 연기자들이 더빙에 참여할 때는 기본적인 테크닉을 갖추는 것만으로도 2~3주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1990년대 후반 데뷔한 중견 성우는 익명을 전제로 “한 유명 영화배우가 더빙에 참여했을 때는 하루에 30분, 1시간만 녹음을 한 적도 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유명 연기자 중에서도 애니메이션 더빙으로 호평을 받은 경우도 있다. 2009년 개봉작 애니메이션 ‘업’의 주인공 칼 프레드릭슨의 목소리를 맡았던 배우 이순재나 2012년 개봉했던 ‘주먹왕 랄프’에서 랄프를 담당한 개그맨 정준하의 더빙은 ‘전문 성우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성우 김정은이나 구자형 역시 “실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더빙에 참여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더빙을 아동들을 위한 배급 서비스로만 인식하거나 유명 연기자만을 내세워 홍보하는 제작·배급사의 인식이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게 성우들의 공통적인 목소리다. 성우 구자형은 “요즘은 거의 사라진 외화 더빙도 자막을 보기 어려운 아동·노인 등 방송 소외계층은 물론 화면에 집중하고 시각·청각적 이미지를 동시에 느끼고 싶어하는 영화 매니아에게도 필요한 서비스”라는 점을 덧붙였다. 이제는 유명해진 미국 드라마 ‘엑스파일’의 성우 이규화·서혜정처럼 더빙으로 캐릭터를 재창조할 수도 있고, 애니메이션 ‘라이언킹’의 악역을 맡았던 성우 김병관의 목소리처럼 해외에서도 호평받는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성우 김정은 역시 “인기 개그맨을 데려다가 유행어를 써 홍보하면 당시에는 잠시 주목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작품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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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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