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오리새끼의 귀환이라도 되는 양 ‘러버덕(rubber duck)’이 떴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 공공미술 작가 플로렌타인 호프만의 거대한 오리가 서울 석촌호수에 뜬 것이다. 그동안 이 오리는 암스테르담을 포함해 오사카, 시드니, 상파울루, 홍콩 등 전 세계 14개 도시를 순회하며 사랑을 받았단다. 문화상품으로 만든 인형도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어쩌면 이 작품은 롯데월드 2관 개설과 함께 초대된 일종의 엔터테이너 비슷한 것으로, 상업적 호객행위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더라도, 그 오리를 보는 관객은 왠지 즐겁다. 그것만큼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렇게 장난스럽고 키치스러운 오브제가 현대미술이 된 것일까? 왜 사람들은 이런 작품에 환호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현대미술이 가진 가장 큰 덕목(?)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은 쇼킹과 스펙터클이다. 현대의 예술작품은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드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는 듯하다. 예컨대 쇼킹한 것은 그 이전까지 작품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대상, 뒤샹이 레디메이드인 변기와 병걸이, 자전거 바퀴, 눈삽을 전시장으로 데려온 사건과 같은 것을 말한다. 반면 스펙터클은 낯익고 진부하고 일상적이고 시시한 사물의 크기를 확대해 전시장과 야외에 가져다 놓았을 때, 새로운 볼거리로 느껴지는 광경을 말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춘 러버덕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단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고, 지루한 일상을 잠깐이라도 벗어나 동심의 세계를 환기하는 등 사람들을 무장해제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이런 종류의 미술을 우리는 팝아트라고 부른다. 팝아트는 대중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그중에서도 대중매체의 부산물들인 익숙한 이미지들, 예컨대 만화나 애니메이션 속의 등장인물이나 동물, 하이브리드한 생명체들이 예술가의 손을 거쳐 공공장소에 설치될 때 느끼는 센세이션은 최고치에 달한다. 특히 이런 공공미술의 호소력은 그것이 아주 펀(fun)하다는 데 있다. 그것도 유머와 농담을 통한 재미의 세계는 요즘 현대미술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대중들은 이제 예술이 개그처럼 가벼워지기를 원하는 것일까?

서울 잠실 석촌호수에 뜬 플로렌타인 호프만의 오리 작품.
서울 잠실 석촌호수에 뜬 플로렌타인 호프만의 오리 작품.

숭고미와 우아미가 반복되는 서양미술사에서 ‘유머’라는 코드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서구문화사에서 유머에 대한 폄하와 경시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에서 드러난다. 이 소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 존재했을 거라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시학’이 비극에 관한 내용이라면, ‘시학’ 제2권은 희극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을 거라고 가정한다. 내용인즉,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평소 진리가 웃음과 같은 경박한 것으로 더럽혀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온 존재로, 사회의 분위기가 점차 경건함과 거리가 먼 방향으로 흘러가자 위기를 느낀 나머지, 웃음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기록한 아리스토텔리스의 ‘시학’ 제2권이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자 음모를 꾸민다. 웃음과 유머에 관한 이 책을 감춰야 한다는 노수도사의 욕심은 광기로 변질되어 결국 수도사 4명을 살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서양문화사가 얼마나 웃음과 유머에 인색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이 중요시 여기는 이성의 사유는 웃음과 유머와 위트를 가볍고 경박하고 천박한 것으로 치부했다. 이는 단지 문학에 관한 담론이 아니라, 서양의 모든 문화에 통괄하는 기본 정조이다. 예외 없이 대략 진지하고 심각하며 멜랑콜리하기까지 한 서양미술사의 전통에서 웃기는 미술, 유머와 농담이 난무하는 미술이 주류가 되기는 힘들었다.

다다이스트 뒤샹이 보여준 자전거 바퀴, 병걸이, 변기, 눈삽과 같은 최초의 팝적인 작품들도 사실 그다지 ‘예술은 가볍고 즐거운 것’이라는 분위기는 아니다. 뒤샹의 적자인 앤디 워홀 그리고 제프 쿤스에 이르러 예술은 완전히 즐거운 놀이가 된다. 워홀이 유머를 아주 천연덕스럽게 사용했다손 치더라도, 그의 유머에는 어딘지 페이소스(pathos)가 묻어나온다. 찰리 채플린의 연기처럼 말이다. 그것은 아마 그가 사회에서 몇 겹으로 배제되고 소외된 타자적 속성을 가진 예술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시골 출신, 체코 이민자로 광부인 아버지를 둔 점, 양성애자, 예술가가 아닌 디자이너로 출발한 점, 백반증으로 인한 이상한 얼굴색 등등.

이처럼 유머에는 반드시 ‘타자(他者) 감각’이 필요하다. 자신을 타자화해, 스스로를 유머의 가장 큰 소재나 주제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앤디 워홀은 작품은 물론 평상시의 대화 속에서 스스로를 “나는 뼛속까지 피상적인 사람이야!(I am a deeply superficial man!)”라고 외치고 다녔다. 워홀이 이런 뻔뻔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메시지를 드러낼 때, 관객들은 “사실, 나도 그래”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이 예술가와 공감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는 택시운전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가난한 유년을 보냈는데, 그런 불우한 환경을 견디게 했던 게 만화였고, 만화에 빠져서 대학을 두 번이나 낙방해야 했던 오타쿠였음을 밝혔다. 그렇게 그는 오타쿠 문화와 팝 문화의 결합에 관심을 갖고 ‘수퍼플랫(Superflat)’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문화역 서울 284’ 앞에 최정화의 플라스틱 작품이 설치돼 있다.
‘문화역 서울 284’ 앞에 최정화의 플라스틱 작품이 설치돼 있다.

이처럼 유머란 자신의 밝히고 싶지 않은 적나라한 치부까지도 농담의 대상으로 삼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또한 자신이 몸담은 사회에서 주류가 아닌 타자가 되어본 경험이 있을 때 유머는 더욱 생생한 것이 된다. 유머는 이처럼 자신을 타자화해서 볼 줄 아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재능이다. 자기 안에 함몰되어 있는 자들은 유머를 쓸 줄도 즐길 줄도 모른다. 어쨌거나 유머를 구사하려면 인생의 고난이라는 긴 터널을 빠져나와야 하며, 그때서야 비로소 자기가 겪었던 고난이 별것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유머는 때로 죽음, 왕따, 이별, 배신, 상처, 좌절 등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의 컨텍스트를 겪은 자들이 전혀 겪지 않은 자들보다 훨씬 능수능란하게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애써 숨기려 했던 가벼움에 대한 취향이나 키치적 취향 혹은 몰취미 같은 것들조차 현대미술에서는 아주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문화역 서울 284’에서 열렸던 최정화의 ‘총천연색’전은 흥미로운 전시였다. 한국적 팝아트의 전설적 인물인 그는 확실히 젠체하지 않는 작가이다. 그는 하찮고 시시한 것에서도 영감을 얻는다. 그의 유머와 위트는 또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유경희

홍익대 대학원 미학 석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박사. 뉴욕대 예술행정 전문가과정 수료. 홍익대 대학원 최고위과정 및 뮤지엄아카데미 강의. 저서 ‘예술가의 탄생’ ‘아트살롱’

유경희 미술평론가·예술처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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