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오베르쉬르 우아즈 교회’. 캔버스에 오일, 68X57㎝, 1890년 6월 죽기 한 달 전, 오르세미술관.
반 고흐, ‘오베르쉬르 우아즈 교회’. 캔버스에 오일, 68X57㎝, 1890년 6월 죽기 한 달 전, 오르세미술관.

성공한 사람은 의욕이 넘친다. 성급하고, 분주하며, 충동적이고, 행동이 앞서는 사람은 성공하는 사업가 기질을 타고났다고 말할 수 있다. 조증(mania) 혹은 경조증(hypomania)을 갖고 있다.

조증은 과도한 활력, 대단한 쾌활함, 과잉활동, 편집증적 과대망상에서 흔히 보이는 팽창된 자존감이 특징이다. 이런 사람은 새로운 자극과 낯선 경험에 대한 갈망이 크기 때문에 모험을 감수하는 일을 즐긴다. 또한 쾌활한 분위기는 수다스러움과 연결되는데, 당연히 사고의 자유연상이 활발하므로 말을 빨리하는 것은 물론, 사고의 비약이 극적이다. 지나친 활력은 며칠 밤을 새도 졸리지 않게 하며, 상상력이 넘쳐나 하룻밤에 소설 한 권을 창작하게 하는 일도 빈번하다.

사업가의 조증인 경우는 행동을 유발하는 추진력이 최고조 상태이며, 빨리 행동해야 직성이 풀린다. 생각하고 실행하는 게 아니라, 행동하면서 생각한다. 대개 그들은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보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느끼는 희열에 중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들은 하나의 목표가 달성되는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다른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사업이 문어발처럼 확장되는 일이 아주 자연스럽다. 이처럼 사업가들의 조증은 대개 일중독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조증과 기업가의 조증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단언컨대 차이가 별로 없다. “사업을 잘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앤디 워홀의 말처럼, 이미 사업은 개념예술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사업가는 이윤을 직원들과 나누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해주니, 그림이 벽에 붙어서 하는 역할보다 더 숭고하지 않은가 말이다. 부디 사업가들은 자신들이 하는 사업이 숭고한 예술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피카소는 ‘자화상’(1907년)조차 조형실험의 도구로 쓸 정도로 우울한 자화상을 한 점도 그리지 않았다.
피카소는 ‘자화상’(1907년)조차 조형실험의 도구로 쓸 정도로 우울한 자화상을 한 점도 그리지 않았다.

미술사에 혁혁한 공을 세운 예술가들은 대략 조증이었을 확률이 크다. 정확하게 말해서 조울증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에서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 즉 멜랑콜리한 선지자 예레미아로 형상화했을 만큼 조울증의 기질이 많았다. 그가 조증이 왕성할 때 만들어진 작품이 천지창조다. 천지창조는 미식축구장 1.5배만 한 크기이며, 33세의 미켈란젤로가 거의 홀로 만들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5년 동안 꼬박 천장을 향해 누운 채로 말이다. 비계에 올라가 천장만을 바라보며 일하던 버릇 때문에 평상시에도 책이나 편지를 위로 들어 고개를 쳐들고 읽었다는 미켈란젤로. 더군다나 당시 교황은 화가 라파엘에게 미켈란젤로의 작업하는 모습을 그리게 했는데, 오른쪽 무릎이 부어있고 변형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통풍에 걸렸던 거다. 매일 사다리로 천장까지 오르내리는 것이 귀찮아 며칠간 먹을 빵과 포도주 그리고 배설물통을 가지고 올라가 며칠씩 밤을 새우며 그렸다. 당시 포도주는 납으로 된 용기에 숙성시켰고, 물감 역시 납 성분이 많았던 탓에 이중으로 납중독에 노출되어 있었던 거다.

미켈란젤로의 조증은 이렇게 과잉활동으로 드러나며, 이는 곧 창조의 동력이 되었다. D. 디드로는 “천재는 자유롭게 고요한 사색을 따라가기보다는, 착상들의 급류에 휩쓸려가고 만다”고 쓰고 있다. 장 콕도의 동성애인이자 배우인 장 마레는 콕도에 대해 “두 달 동안 그는 침대에 누워 책만 읽고 있었다. 어느 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서 8일 밤낮을 거의 쉬지 않고 글을 썼다”고 고백했다. 그런 방식으로 탄생한 것이 ‘무서운 아이들’이었다. 장 콕도도 자신이 그 글을 며칠 만에 쓴 것에 대해 놀라워했다. 그렇듯이 조증의 소유자도 자신의 엄청난 상상력과 창의력에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는 것이다.

조증이 일중독으로 이어지는 것은 비단 미켈란젤로만이 아니다. 18세기 초반 스페인의 대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두 시간마다 하나의 얼굴을 그렸고, 하루에 하나씩 반신상을 조각했으며, 벽화를 이삼일에 하나씩 제작했다. 또 27세의 나이에 화가가 된 반 고흐는 화가생활 총 10년 동안 1000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보통 화가들이 평생 해도 다 못할 작품을 10년 동안 끝장내 버린 것이다. 특히 반 고흐는 죽기 전 2~3년 동안 300여점의 작품을 제작하였으니, 평균 2~3일에 한 점씩 그렸던 것이다. 예컨대 1890년 여름 그가 마지막으로 프랑스 북서부 지방 오베르쉬르 우아즈에 머무르는 동안, 5월부터 생을 마감하는 7월까지, 단 9주 만에 약 70점의 유화와 30여점의 데생을 완성한다. 거의 창조주와 공모한 사람처럼 그림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가 죽기 2개월 전인 1890년 5월에 쓴 한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우울증과 벌이는 싸움과 이 싸움으로부터 나오는 조증의 에너지(정신분석학자 비니코트가 ‘우울증에 대한 조광증의 방어’라고 얘기하는)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4년간 거의 홀로 그린 ‘천지창조’. 1509~1512년
미켈란젤로가 4년간 거의 홀로 그린 ‘천지창조’. 1509~1512년

사실 우울증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평생 조증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던 예술가로 피카소를 따라올 자가 없다. 어마어마한 작품량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우울증의 상태를 의식적으로 멀리했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피카소는 우울해질까봐, 우울증자들의 전유물인 자화상조차 그리지 않았다. 그가 그린 자화상은 그저 자기 작품을 위한 조형적 실험에 불과한 것이었다. 매번 새로운 실험으로 점철된 작업세계는 피카소의 조증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런 까닭에 그는 전 인생을 통해서 하루 평균 5~6점을 그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92세까지 장수했던 피카소의 울증은? 사실 피카소는 규칙적으로 작업을 중단했다. 1903년, 1915년, 1925년, 1936년, 1946년, 1953년, 대략 10년마다 일 년에 몇 개월씩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었다. 울증의 시기로 추정되지만, 그가 우울증을 극심하게 앓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카소의 지칠 줄 모르는 영감, 지나친 변덕스러움, 여자들에 대한 정복욕 등은 조증인 동시에 울증을 보상하기 위해 만든 방어의 메커니즘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처럼 조증과 울증의 교대는 많은 창조자나 비범한 인물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조증은 안정과 균형을 가장 큰 적으로 생각한다. 괴테가 사회적으로 균형 잡힌 시기에 가장 덜 문학적인 작품을 낸 것을 상기한다면, 애써 조증의 상태를 지연시키고 강화하려는 예술가의 필사적인 투쟁은 참 애틋할 정도다. 마치 걷잡을 수 없이 날아다니는 필치를 가졌던 말년의 반 고흐처럼, 그리고 정원에서 새가 그리스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버지니아 울프처럼 말이다.

유경희

홍익대 대학원 미학 석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박사. 뉴욕대 예술행정 전문가과정 수료. 홍익대 대학원 최고위과정 및 뮤지엄아카데미 강의. 저서 ‘예술가의 탄생’ ‘아트살롱’

유경희 미술평론가·예술처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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