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레오나르도 다빈치, 성 히에로니무스, 1480년경<br></div>02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1513~1516년경<br>03 미노스의 형상으로 그려진 비아조 다 체세나.<br>04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넣었다.
01 레오나르도 다빈치, 성 히에로니무스, 1480년경
02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1513~1516년경
03 미노스의 형상으로 그려진 비아조 다 체세나.
04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넣었다.

언제나 ‘분노’라는 감정이 문제다. 한 끗의 감정 때문에 모든 일을 그르친다. 감정은 사람을 성인으로도 악인으로도 만든다. 통상 예술가들은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자주 화내고, 괴팍하고, 비수를 찌르는 말을 잘하고, 제멋대로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예술가가 후원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율성을 가지고 작업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천재와 광기의 예술가라는 개념이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예술가들이 자기감정을 곧이곧대로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대개 자신들의 돈줄과 밥줄을 쥐고 있는, 소위 갑에게 어떤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했을까?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어떻게 했을까? 사실 다빈치가 크게 분노했다는 기록은 별로 회자되지 않는다. 다만 엄청난 굴욕감을 표현한 작품을 통해 당시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얘긴즉슨 이렇다. 1481년 로렌초 메디치는 시스틴 예배당을 장식하는 예술프로젝트를 기획한다. 그는 가장 명망 있는 공방을 운영하던 베로키오의 제자들을 기용한다. 선정된 예술가는 보티첼리, 시뇨렐리, 기를란다요, 페루지노 등이었고, 다빈치만 쏙 빼놓았다. 다빈치가 배제된 속사정은 아마 메디치가의 남자와 함께 남색 혐의로 고소당했던 일, 그리고 맡은 일을 제 기간에 맞추지 못했던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 일로 다빈치는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 그때 느낀 굴욕감과 비애감에 대한 극적 표현이 ‘성 히에로니무스’다. 온갖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돌로 가슴을 치는 성인 히에로니무스의 고뇌 가득한 표정이 바로 다빈치의 자화상인 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겼다는 사실이다. 고작 15점의 회화를 남겼고, 그중 3분의 1이 미완성이었던 다빈치답게 이 작품 역시 완성을 못했던 거다. 왜일까? 추측건대, 세상과 사물에 호기심이 너무 많았던 천재 다빈치는 분노와 모멸의 감정을 오래 붙들고 있을 만큼 감정의 지구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생각보다 빨리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분노를 떠올리면 미켈란젤로만 한 예술가가 없다. 당시 드물게 귀족 출신으로 자긍심이 대단했던 미켈란젤로는 40세 무렵 감정적으로 분노할 만한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의 대표작 ‘모세상’은 당시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동시에 억누르고 있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모세는 구약시대 야훼 하나님의 대리자로 여러 차례 폭발적인 분노를 일으켰다. 지성과 영성을 모두 갖춘 온유한 사람이었던 그는 쉽게 분노하지는 않지만 한번 분노했다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쏟아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작품은 십계명의 석판을 받고 내려온 모세가 황금송아지를 우상 숭배하는 유대인을 보고 분노가 폭발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세심히 들여다보면, 분노가 치밀었으나 이를 자제하고 난 다음의 순간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작품이 자화상이듯이, 분노를 삭이는 모세의 모습은 틀림없이 당시 속물근성에 젖은 주문자들의 횡포와 몰이해에 맞서 자기감정을 조절하고 승화시키는 미켈란젤로만의 전략이 아니었을까?

그뿐 아니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을 제작할 때 교황과 수행자들의 방문을 극도로 싫어했다. 쓸데없는 지적과 엉성한 예술적 충고를 참아내는 것이 괴로웠던 탓이다. 특히 그는 성스러운 장소에 나체를 그렸다고 비난했던 비아조 다 체세나(교황 클레멘스 7세의 의전담당자)와 아레티노(당시 사교계를 드나들던 연대기 작가이자 평론가)의 지적과 비난에 대해 매우 불쾌해했다. 미켈란젤로는 벽화를 통해 자기 감정을 유머러스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했다. 예컨대 오른쪽 아래 벌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 세 명의 지옥 심판관 가운데 하나인 미노스의 형상으로 체세나를 그려 넣었다. 귀가 당나귀처럼 길고, 괴상한 얼굴에, 허리를 감싼 뱀이 성기를 집어삼키려 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체세나는 교황에게 항의했지만, 교황은 “그가 자네를 연옥에 넣었다면 어떻게 해보겠네만, 자네는 지옥에 있지 않나? 그러니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네!”라고 응수했다.

또 하나, 희대의 아첨꾼이자 비방자로 유명한 아레티노가 ‘최후의 심판’에 대해 충고를 했지만 미켈란젤로는 그 충고를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작품을 파괴해야 한다고 여론을 들쑤시며 악의적 비방을 퍼트리고 다녔다. 아레티노는 미켈란젤로에게 공개적으로 “껍질을 벗겨 버리겠다”(‘가만두지 않겠다’는 속어 표현)고 협박했다. 이에 분노한 미켈란젤로는 예수 오른편 아래에 생피박리형으로 순교한 바르톨로메오를 그리면서, 그 껍질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그러니까 실제로 아레티노에게 껍질 벗겨 살해당하기 전 자신이 먼저 껍질을 벗겨 죽어준 것이다. 이야말로 천재의 익살스러운 분노 표현법이자 귀여운 복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전혀 분노의 화가라고 예측하기 어려운 화가가 있다. 인상파 화가인 에드가 드가, 그야말로 그는 분노의 대가였다. 지인들은 드가가 항상 으르렁거리거나 화를 내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비사교적이고 빈정대는 성격을 가진 드가는 예리한 지적으로 기를 죽이는 일을 좋아했는데, 친구들은 더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아예 대꾸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드가는 왜 사람들에게 자주 분노하고 무례하게 대했을까? 사실 드가는 자존심이 강하고 독립적이던 화가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대하지 않고서는 그림을 그릴 시간을 도저히 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밀쳐내는 것이라고 자신의 공격성과 분노를 정당화했다. 예술가로서의 자신만의 삶을 지키기 위해 일종의 부드러운 잔인함을 택했다나! 그러고 보니, 그가 국가에서 주는 모든 훈장이나 명예를 경멸하고 불신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드가는 항상 공식적인 인정에 따르는 위험과 재앙에 대해 스스로에게 경고하고 있었던 것! 그러니까 그의 분노는 험한 세상에서 자신만의 순수한 예술세계를 지키고 싶어했던 그만의 독특한 처세술이었던 셈이다.

사실, 분노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는 것, 분노해야 할 때를 아는 것은 지혜가 필요하다. 이때 분노는 세상과 사람들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귓전에 울린다. “누구든지 분노할 수 있다. 그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올바른 대상에게, 올바른 정도로, 올바른 시간 동안에, 올바른 목적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분노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결코 쉬운 일도 아니다.” 어떻게 하면 멋지게 분노할 수 있을까!?

유경희

홍익대 대학원 미학 석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박사. 뉴욕대 예술행정 전문가과정 수료. 홍익대 대학원 최고위과정 및 뮤지엄아카데미 강의. 저서 ‘예술가의 탄생’ ‘아트살롱’

유경희 미술평론가·예술처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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