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톰블리 ‘퐁텐블로 화파’1960년, 캔버스에 오일
사이 톰블리 ‘퐁텐블로 화파’1960년, 캔버스에 오일

창조는 심심해야 나온다? 그렇지만은 않다. 여러 일로 바쁠 때, 서로 연동하는 가운데 휘몰아치듯 아이디어들이 산출된다. 이럴 때 나오는 아이디어는 대부분 실용적이다. 심심할 때 나오는 아이디어는 대략 쓸모 있는 것과는 상관없는, 맹목적이고 합목적적인 것인 경우가 많다. 더욱 예술적이다.

시인 김소연은 ‘심심하다’는 것을 가장 천진한 상태의 외로움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외롭고 쓸쓸하고 권태롭고 허전하고 공허한 상태를 ‘심심하다’라고 받아들인단다. 심심한 마음이 부르는 손짓을 보고 온 것들 중에는 ‘창작 혹은 발명’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시인의 생각을 포함해 나의 심심함의 사전에는 느림, 기다림, 휴식, 초월에 대한 감수성 같은 용어들이 보태진다. 현대인이 잃어버린 정서들이다. 우리는 스마트폰, 인터넷, 쌍방향 통신기구로 인해 느림과 기다림이라는 노스탤지어를 잃어버렸다. 문학과 예술의 훌륭한 조건인 기다림의 미학이 사라져버렸다. 삶은 심심해져야 느려지고, 느려져야 기다림이 생기고, 기다림이 생겨야 인간에 대한 깊은 시선이 생긴다.

예술가가 심심해서 창조한다는 생각은 근대적인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 예술가는 장인이고 직업인이었기 때문에 주문자의 요구에 충실하면 그뿐이었다. 지루하거나 권태로우려면 인간 존재의 조건이 바뀌어야 한다. 일종의 부조리한 실존적 상태가 되어야 한다. 현대 예술가들은 어떻게 한가함과 심심함과 지루함과 권태로움을 극복했을까? 그들은 그 속에서 어떤 창조를 획득해낸 것일까? 현대인은 감당하기 어려운 정보 속에서 어떻게 잃어버린 심심함을 되찾을 수 있을까?

빌 비올라 ‘침묵의 바다’ 2002년
빌 비올라 ‘침묵의 바다’ 2002년

사이 톰블리의 작품을 보자. 미국 화가로 이탈리아에서 살았던 톰블리는 재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셴버그, 바넷 뉴먼, 마크 로스코와 같이 추상표현주의 2세대에 속한다. 그의 작품은 낙서다. 무엇을 그렸는지 난감하기만 한 그의 낙서화를 보면 “저 정도는 옆집 꼬마도 그릴 수 있겠다”는 느낌을 준다. 톰블리가 서사적이고 고전적인 주제를 다룰 때에도, 화면은 구체적인 이미지 없이 수수께끼처럼 식별하기 힘든 기호와 문자들로 나열되어 있다. 재료도 아이들이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연필과 크레용이다. 그의 그림은 어린아이의 땅바닥 낙서 같다. 톰블리는 삶에서 목도되는 우연, 놀라움, 상처를 절제하거나 계획하지 않고 감정과 심리 상태를 그대로 드러낸다. 에너지의 자발성을 보여주는 톰블리의 그림이야말로, 무활동을 통한 활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노자의 ‘위무위(爲無爲)’, 즉 ‘하되 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의 작품은 작가가 굳이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를 통해서 무언가가 행해지도록 우연을 받아들이고 허용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은 마치 속이 빈 대나무처럼 그저 통로가 되는 것이다.

심심하면 시간이 느리게 가고 사물이 잘 보인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작품은 진정 느림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다. 하이테크 미디어를 사용하는 그는 동양의 선불교, 기독교, 이슬람 수피, 티베트불교를 통해 섬뜩할 정도로 탄생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상징성이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빌 비올라 작품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가 고속촬영을 통한 슬로모션 기법을 사용하여 시간의 속도를 인위적으로 느리게 조절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는 시간의 순서를 비틀어 우리가 기대하는 익숙한 의식의 흐름을 부수고 그 간극을 파고들어 충격을 준다.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함으로써 현실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빌 비올라는 죽음과 부활의 시적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1987년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1987년

‘침묵의 바다’(2002)는 9명으로 구성된 군중들의 얼굴 표정과 몸짓을 담아낸 작품으로, 엄청나게 느려진 시간 속에서 극적으로 증폭된 개개인의 감정을 체험하게 한다. 이 작품은 우리가 얼마나 사람 혹은 사물을 대충 보고 대강 느끼는지 성찰하게 한다. 사물은 천천히 봐야 본질이 드러난다. 우리는 사물을 느리고 꼼꼼히 보는 법을 잊어버렸다. 현대의 속도전쟁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눈과 마음과 감각을 사용해 어떻게 사물을 볼 것인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가 중에 빌 비올라만 한 작가는 드물다.

다시 본래의 화두인 ‘심심함’으로 돌아가기 위해 또 하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다. 어린아이는 어른에 비해 더 느긋하고 더 진득하게 사물을 바라본다. 아이는 호기심이 발동하면 한 가지 사물에 오래 집중한다. 물아일여와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관찰이다.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벤치마킹해서 사물의 형태와 기운을 따라 눈길이 흐르는 대로 진득하게 사물을 바라보다 보면 사물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상대에게 집중하면, 상대의 말을 들으면, 그 상대(사물)로부터 지금까지는 절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피카소는 아이가 되는 데 평생이 걸렸다고 토로했다. 그는 아이가 되어 세상을 새롭고 낯설게 보고 싶었다. 평생 천진스러운 동안(童顔)을 간직했던 백남준 역시 천진난만한 호기심의 소유자였다. 나이 들어서도 그의 천진함과 유희충동은 사라진 적이 없었다. 예술을 심각한 행위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새로운 장난감이 생긴 듯 아이처럼 TV를 가지고 평생을 잘 놀았다. 이렇게 대가들에게서 보이는 들뢰즈식 ‘아이 되기’는 모두가 앙망하지만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려는 노력만큼은 해볼 만한 것 아닌가! 아직 니체의 말이 유효하다면 말이다.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고 놀이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양심의 가책도 없는 비도덕적인 존재이다. 어떤 도덕과 법률, 제도도 아이를 심판할 수 없다. 다른 존재들에게는 전투였던 것이, 아이에게는 재미있는 놀이가 된다. 아이는 배울 필요가 없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생을 즐긴다. 따라서 그가 하는 모든 말은 어린 진리, 혹은 작은 진리가 된다.”

예술가만 아이 되기를 잘하란 법은 없다. 삶이 창의적이고 재미있으려면, 잠깐이라도 아이 되기의 메커니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른 무엇인가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무엇인가의 유보 혹은 포기이다. 우리는 아이다움을 획득하기 위해, 무엇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유경희

홍익대 대학원 미학 석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박사. 뉴욕대 예술행정 전문가과정 수료. 홍익대 대학원 최고위과정 및 뮤지엄아카데미 강의. 저서 ‘예술가의 탄생’ ‘아트살롱’

유경희 미술평론가·예술처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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