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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
[2373호] 201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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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북협상 당시 통일대교에 배달된 짜장면 130년

조성관  편집위원 

지난 8월 25일 남북 고위급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그 시각 판문점 직전 통일대교. 기자들은 남북 고위급회담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면서 지루한 ‘뻗치기’를 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났을 때 누군가 파주의 중국집으로 점심을 주문했다. 얼마 후 짜장면 27그릇이 배달되었다. 취재기자들은 땡볕 아래서 짜장면으로 점심 한 끼를 맛있게 먹었고, 그 힘으로 뻗치기를 이어갔다.
   
   취재기자들 대부분은 20~30대였다. 운전기사들과 두세 명의 데스크급 기자들만 40대였다. 이들 중 누구도 ‘짜장면 점심’에 이의를 단 사람은 없었다. 피자나 햄버거가 맛과 영양 면에서는 짜장면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취재기자들은 암묵적으로 ‘짜장면 점심’에 동의했다. 피자와 햄버거가 아무리 맛이 좋고 영양가가 높아도 노상에서 장시간 대기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짜장면의 효용을 넘어서지 못한다. 왜 그럴까? 짜장면에는 피자와 햄버거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정서적 포만감이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왜 열몇 시간을 자동차 안에 갇힌 채로 고향을 찾아가는가. 고향에는 부모님이 있고, 옛 동산이 있고, 옛 친구가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옛 맛’이 있다. 추석 귀향길은 고향 맛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고향에는 맛의 원형(原形)이 한두 개쯤은 있다. 그게 청국장일 수도, 된장찌개일 수도 있다. 짜장면도 그중 하나다.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인 소설가 하일지의 고향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다. 단양에는 한강 물줄기가 휘돌아나간다. 소백산 바로 아래 온달산성과 온달동굴이 있는 곳이 영춘읍이고, 남천리는 영춘읍에서도 계곡을 따라 깊고 깊은 소백산 기슭으로 십 리를 걸어 올라가야 나오는 산골마을이다. 이곳에서 단양면까지는 32㎞, 팔십 리 길이다. 하일지 교수는 1965년 7월 어느 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날 소백산 산골 소년은 단양에서 난생처음으로 짜장면을 먹어보았다.
   
   지금에야 남천리에서 단양읍까지 자동차로 30여분이면 충분하지만 1960년대는 멀고 먼 길이었다. 나룻배로 강을 건너 하루에 두 번 오는 버스를 타야만 읍내까지 나갈 수 있었다. 영춘초등학교 5학년생 하일지는 글짓기 교내 대표 중 한 명으로 뽑혀 사생 대표들과 함께 군내 예능경시대회에 참석하러 단양에 갔다. 경시대회가 끝나자 인솔자인 박병량 교사는 글짓기·사생 대표 10여명을 데리고 단양읍내의 한 식당으로 갔다.
   
   “선생님은 허기진 우리를 데리고 선풍기가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면서 확확 바람을 뿜어대고 있는 어느 식당으로 들어가셨다. 한옥집으로 기억한다. 난생처음 보는 선풍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우리 앞에 거무스름한 음식이 담긴 그릇들이 놓였고,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허겁지겁 먹었다. 바로 짜장면이었다. 춘궁기의 하굣길에 아카시아 꽃을 따 허기진 배를 채웠던 우리에게 그때 먹은 짜장면의 맛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이따금 씹히는 고기 맛은 난생처음 쐬어본 선풍기 바람만큼이나 상큼했다. 정말이지 그날 우리는 혀가 코에 닿을 만큼 짜장면 그릇을 핥았을 것이다. 갈매기 나루터에서 영춘면까지 시오리, 영춘면에서 남천리까지 다시 시오리 길을 걸어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 낮에 단양에서 뭘 먹었는지 물으셨다. 그리고 아들은 단양에서 먹은 것에 대해 설명하려 애썼다. 그러나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들이 먹었다는 것이 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소년에게 잊을 수 없는 짜장면 맛을 선사한 그 식당은 다시는 가볼 수가 없다. 충주댐을 건설하면서 단양읍은 구단양이라는 이름으로 물속에 잠겨버렸다. 소설가는 그때의 경험을 장편소설 ‘누나’(민음사)에서 상세하게 녹여 냈다.
   
▲ 인천 차이나타운 ‘짜장면 박물관’ 내 1970년대 중국집을 재현한 전시실.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영화감독 강우석은 짜장면과 얽힌 가슴 저린 사연이 있다. 강우석 감독의 집안은 부유했다. 하지만 고3 때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살던 집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집안 형편이 어렵자 부모는 짜장면을 먹고 싶어도 돈을 아끼려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강우석은 집에서 짜장면을 만들기로 했다. 시장에 가서 양파, 감자, 춘장 등 재료를 사가지고 와 짜장면을 만들었다. 아들이 만들어 내놓은 짜장면에 부모는 감동하며 “중국집에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다”고 했다. 청년 강우석은 그날 이후 종종 집에서 짜장면을 만들곤 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영화감독을 꿈꾸던 강우석에게 짜장면은 눈물 젖은 시절을 상기시키는 음식이다.
   
   특별히 면을 싫어하는 식성이 아니라면 한국인은 백인백색의 짜장면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만큼 한국인은 짜장면과 징하다. 짜장면은 수많은 영화와 문학에 소재를 빌려줘 왔다. 아역배우 출신인 안성기가 성인배우로 데뷔한 작품이 1979년 ‘바람 불어 좋은 날’이었다. 배창호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에서 안성기는 중국집 배달부 덕배 역을 맡았다. 안성기는 ‘중국집 배달부’ 역으로 그해 대종상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짜장면은 국민음식이다. 하루 700만 그릇이 팔린다는 게 짜장면이다. 해외여행 중 아무리 좋은 현지 음식을 먹어도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한국 음식이 그리워진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설렁탕, 그리고 짜장면.
   
▲ 짜장면 배달통. 왼쪽은 초기의 나무 배달통, 오른쪽이 현재의 철가방.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 전통음식이 아닌 짜장면은 어떻게 국민음식으로 자리 잡았을까. 짜장면의 시원(始原)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우리의 근현대사와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알려진 대로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다. 조선에 진주한 청국의 실력자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따라 40여명의 군역(軍役) 상인들이 들어왔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되면서 인천에서 가까운 중국 산둥성 주민들이 건너와 본격적으로 정착했다. 1884년 ‘인천구화상지계장정’ 협정체결로 치외법권과 무역활동을 인정받아 선린동 주변에 청국 조계지가 만들어졌다. 이게 청관(淸館)이고, 오늘날 차이나타운이다.
   
   인천 중구 선린동에 모여 산 중국인들이 고향에서 즐겨 먹던 짜지앙미옌(炸醬麵)을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게 기원이다. 짜지앙미옌은 삶은 국수에 중국식 된장과 야채를 얹어 비벼 먹는 음식이었다. 발효음식인 장류 문화가 발달한 한국인에게 짜지앙미옌은 큰 거부감이 없었다. 짜지앙미옌은 무엇보다 조리법이 간단한 데다 국물이 쏟아질 염려가 없어 부두 노동자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화교들은 산둥식 짜지앙미옌을 기본으로 된장을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량하면서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이게 현재의 짜장면이다. 짜지앙미옌은 개항기(期) 인천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짜장면이 국민음식이라는 증표는 수없이 많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0년대 짜장면은 선린동 중국요리집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1950~1970년대에도 산둥성 출신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게 짜장면이었다.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 출생)는 어린 시절 대부분 외식이라는 개념을 모르고 자랐다. 이런 베이비붐 세대가 졸업식과 같은 특별한 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짜장면이었다. 짜장면이 나오면 소년 하일지가 그랬던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 탕수육 같은 요리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던 짜장면을 어느 순간 분식점에서도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중국집이 없는 조그만 시골 동네에 가서도 짜장면을 맛볼 수 있을 정도다. 짜장면은 더 이상 중국 음식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인천 선린동의 차이나타운은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다. 차이나타운 한복판에는 짜장면박물관이 있다.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요리집 공화춘(共和春) 건물에 2012년에 들어선 박물관이다. 이곳에 들어가면 짜장면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게 전시되어 있다. 주변에 패키지로 관람할 수 있는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인천개항박물관, 한중문화관이 있지만 최고 인기는 공화춘 짜장면박물관이다. 입장료는 성인 1000원. 관람객은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 1970년에 나온 최초의 삼양짜장면.

   2층으로 올라가면 짜장면의 탄생을 보여주는 전시공간이 기다린다. 개항기 인천항 부두를 보여주는 흑백사진을 배경으로 짐을 싣고 운반하는 일을 하던 중국인 노동자 쿨리(苦力)들의 모습이 보인다. 짜장면을 먹는 쿨리 옆에는 이동식 간이조리대의 모습도 보인다. 지게를 내려놓고 짜장면으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마네킹으로 만들었다. 개항기 당시 짜장면을 먹는 모습은 21세기 통일대교 앞에서 짜장면을 먹는 것과 배경만 다를 뿐 나머지는 똑같다.
   
   제3전시실은 짜장면의 전성기를 보여준다. ‘선린반점’이라는 1970년대 중국집을 재현해 고등학교 졸업식날 부모와 함께 짜장면을 먹는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했다. 관람객은 졸업장이 들어간 빨강색 원통을 보면서 흘러가버린 시간으로 추억여행을 한다. 제3전시실에서 한 가지 의문이 해결되었다. 왜 짜장면이 달착지근하면서도 짭조름한지를. 박물관 측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캐러멜이 첨가되어 달콤한 맛을 내는 춘장이 개발되면서 한국 짜장면으로 고착화가 되었고, 정부의 밀가루 소비 장려 정책과 산업화에 따른 외식문화 확산에 힘입어 짜장면은 국민음식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독자 여러분은 초등학교 시절 먹었던 짜장면 값을 기억하고 있을까. 개인적인 경험을 덧붙인다면 1970년대 초반 초등학생 시절 딱 한 번 동네 중국집에 가서 친구에게 짜장면을 사준 적이 있다. 그때 짜장면 한 그릇은 60원이었다. 내가 돈을 냈기 때문에 기억한다.
   
▲ 1980년대 초반의 중화요리 음식요금표.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짜장면 가격 변천사 역시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이다. 짜장면은 국민음식이다. 그래서 짜장면 값은 물가변동에 상당히 민감했다. 박물관 측은 짜장면 가격의 변화 추이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쌀값 3010원(1가마니·80㎏) 할 때 짜장면 값은 15원이었다. 그러던 게 1970년대 중반 140원, 1980년대 350원 하던 것이 1990년대 초기 1300원 하다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3000원으로 오른다. 이 시기 쌀 한 가마니 가격은 20만원. 현재 일반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 값은 4000~5000원이다. 전시실에는 실제 중국집 가격표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공화춘의 가격표이고 다른 하나는 인천중화요식업조합의 가격표다. 식사부의 짜장면과 우동은 각각 150원, 간짜장면 220원 등이었고 요리부의 잡채는 700원, 고기튀김은 800원이었다. 인천중화요식업조합 가격표의 짜장면과 우동은 각각 450원, 간짜장면과 짬뽕은 각각 600원, 볶음밥 700원, 짬뽕밥·짜장밥은 각각 900원이었다.
   
   제4전시실의 볼거리는 역시 철가방의 역사다. 개발연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집이 다른 한식에 비해 경쟁력을 가진 것은 바로 신속배달에 있었다. 사람들은 중국집 배달통 하면 알루미늄판으로 만들어진 철가방을 연상한다. 그러나 전시물에 따르면 철가방은 진화된 것이다. 초기에는 나무로 된 배달통을 사용했다. 나무로 만든 배달통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무겁고 음식물이 흐를 경우 나무에 스며들어 여러 가지 위생 문제를 야기했다. 잠시 플라스틱 배달통도 나왔지만 알루미늄판과 함석판으로 제작한 배달통의 편리함을 이길 수 없었다. 철가방은 짬뽕 국물이 흘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은 광복 후 지난 반세기 생활 속 디자인을 선정한 일이 있다. 이때 철가방 디자인이 모나미153, 辛라면, 칠성사이다, 포니자동차, 시발택시와 함께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중국집의 철가방은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에 기막히게 흡수되면서 거의 모든 요식업 분야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철가방은 급기야 코미디극장에 디자인을 무상 대여하기에 이른다. 개그맨 전유성씨는 경북 청도에 2011년 코미디 전용 철가방극장을 개관했다. ‘한국의 앤디 워홀’로 불리는 전유성씨는 “코미디를 배달하겠다”는 뜻으로 극장 외관을 철가방처럼 디자인했다.
   
▲ 1984년에 나온 농심 짜파게티.

   제5전시실은 짜장면이 한국인의 식문화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바로 짜장라면의 역사다. 최초의 짜장라면은 1970년에 세상 빛을 봤다. 굳이 식당에 가지 않아도 물만 있으면 짜장면 맛을 느낄 수 있는 라면. 식품업체라면 당연히 개발할 만하다. 최초의 짜장라면은 1970년 2월 ‘삼양짜장면’이었다. 가격은 20원. 삼양이 독점하던 짜장라면 시장에 두 번째 후발 주자가 뛰어들었다. 1973년 롯데에서 내놓은 ‘소고기짜장면’으로 값은 30원이었다. 이후 삼양과 롯데는 경쟁적으로 짜장라면을 개발해냈다. 1978년에 이르면 농심짜장면이 선을 보인다. 롯데창업주 신격호의 동생인 신춘호씨가 롯데그룹에서 분가해 나가면서 라면 분야를 떼어 농심을 차린 것이다. 이렇게 1970년대는 삼양과 농심의 양대 구도를 형성했다.
   
   1980년대 들어 짜장라면 시장은 춘추전국시대를 맞는 양상이었다. 총 19종의 짜장라면이 소비자의 입맛을 놓고 경쟁했다. 주력 업체인 삼양과 농심 외에도 후발 업체인 팔도, 청보, 빙그레가 짜장라면을 출시했다. 팔도, 청보, 빙그레가 짜장라면을 생산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1987년 청보가 짜장라면 ‘우짜짜’를 내놓으면서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코미디언 이주일을 모델로 썼다는 것이다.
   
   농심의 짜파게티는 1980년대에 처음 나와 30년 넘게 짜장라면 시장의 정상을 유지하고 있다. 성악가 정회정씨는 1990년대 3년간 러시아 우랄음대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정회정 성악가는 러시아 국립음악유학생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짜파게티 사건’을 이렇게 전했다. “1980년대 모스크바에 늦깎이로 유학 간 학생이 하루는 후배 기숙사방에서 배가 고픈 나머지 짜파게티를 몰래 끓여 먹었다. 나중에 후배가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했다. 당시 러시아 유학생들에게 짜장면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짜장면 맛을 느끼게 하는 짜파게티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지난 5월 농심은 고급 짜장라면 ‘짜왕’을 출시해 농심 라면 중 최고의 판매율을 기록하는 중이다. 짜장면의 진화는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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