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맹자. (우) ‘맹자’ 양혜왕 편.
(좌) 맹자. (우) ‘맹자’ 양혜왕 편.

정치란 한마디로 정의를 수호하는 일이다. 정의의 핵심은 억강부약(抑强扶弱)이다. 하지만 정치는 오히려 스스로 강자가 되어 정의를 무너뜨리기 일쑤이다. 이러한 정치는 세상에 평안은커녕 고통을 주게 된다.

아마 정치의 일탈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가 보다. 일찍이 맹자(孟子·BC 372~289)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을 설파한 바 있다. 첫째는 집안의 무고함이요, 둘째는 하늘과 남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요, 셋째는 영재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렇게 삼락을 열거하고 굳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천하에 왕 노릇 하는 것은 여기에 들지 않는다.”

옛날에 왕은 타고나야 한다. 그러니 맹자 같은 일반인에게 ‘왕 노릇’은 곧 ‘정치 참여’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맹자는 그것이 결코 군자의 즐거움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렇듯 정치를 멀리한 그의 모습은 얼마나 고고(孤高)할까. 이러한 상념을 떠올리며 그의 대화집인 ‘맹자’를 펼쳐 보면, 놀랍게도 첫 장부터 의외의 반전이 전개된다.

‘맹자’는 ‘맹자가 양(梁)나라 혜왕(惠王)을 만나다’로 시작한다. 그가 살던 전국시대는 양육강식의 혼란기였다. 당시 수많은 야심가들은 제후국을 순방하며 저마다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 설파하였다. 만약 어떤 제후가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면 곧바로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맹자 역시 혜왕에게 자신의 등용을 요청하러 간 것이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혜왕은 다짜고짜 “무슨 이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왔느냐”고 채근한다. 맹자는 “어찌 이익만을 묻느냐”고 대꾸하며 “아래위가 이익만 추구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한다. 또한 패도정치는 잘하든 못하든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라며, 인의(仁義)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 곧 왕도정치를 제안한다.

다음으로, 맹자는 제(薺)나라 선왕(宣王)을 찾아간다. 그는 자신의 뜻을 주장하기 전에, 그가 전해 들은 선왕에 관한 일화를 언급한다. 어느 날 신하가 잔뜩 겁을 먹은 소를 끌고 지나갔다. 왕이 무슨 소냐고 묻자 신하가 제물(祭物)이라고 답한다. 왕은 소를 살려주고 그 대신에 양을 잡으라고 명한다. 소의 측은함을 직접 보고는 도저히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이것이 유명한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소는 보고 양은 안 본 것이라는 뜻)의 고사이다.

그는 왕의 이러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칭송하며 인(仁)의 정치를 베풀 자질이 다분하다고 한껏 치켜세운다. 그의 유세술이 제법 세련된 모습을 보인다. 이어서 그는 덕치를 베풀면 천하의 백성이 모여들고, 일정한 생산활동을 보장해주면 정신적 기풍이 안정된다고 주장한다. 여기로부터 항산항심(恒産恒心)이라는 말이 유래한 것이다.

또한 그는 왕으로부터 “신하가 왕을 죽일 수 있느냐”는 도발적 질문을 받는다. 그는 “인의를 해친 사람은 이미 왕이 아니고 한낱 범부(凡夫)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범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군주를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둘러댄다. 실로 절묘한 응수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그는 왕의 면전에서 거침없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설파한다.

다음으로, 그는 등(藤)나라 문공(文公)을 찾아간다. 왕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그는 항산항심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토지, 세금 등에 대한 제도개혁을 건의한다. 실제로 이러한 시책이 일부 실시되자 ‘무리를 이끌고’ ‘쟁기를 짊어지고’ 등나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하지만 등나라는 뜻을 펴기에 너무 작고 미약한 나라이다.

본래 맹자는 공자(孔子)의 고향과 가까운 추(鄒) 지방 출신이다. 나이 50세(또는 40대 중반) 무렵 유세에 나서 양(梁)·제(齊)·송(宋)·설(薛) 나라 등을 오가다 고향으로 돌아온다. 다시 등(藤)나라로 갔다가 노(魯)나라를 거쳐 거의 20년 만에 늙고 지친 몸을 이끌고 귀향한다. 그는 제자들과 더불어 공부를 하며 말년을 보낸다.

‘맹자’는 그가 세 나라(양·제·등)에서 유세한 내용과, 제자들과 공부하며 나눈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정치적 삶을 추구했지만 끝내 이상을 펼치지 못했다. 그의 정치적 장래는 이미 양혜왕과의 첫 대면에서 예견되었다. 그는 이(利)를 원하는 군주에게 인(仁)을 내놓았다. 이런 간극을 알면서도 그는 평생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맹자의 일생은 공자(BC 551~479)의 일생과 놀랍도록 닮았다. 공자는 40~50대에 노나라의 관직에 나아가 여러 가지 정사를 담당했다. 특히 무법한 대부(大夫)를 단숨에 주살(誅殺)하는 과단성도 보였다. 그러나 점차 쇠락하는 노나라의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쉰여섯에 주유천하에 나섰다. 그로부터 14년 동안 여러 나라를 떠돌며 유세를 벌였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공자는 석 달 동안 섬길 임금이 없으면 안타깝고 초조해 하고, 국경을 나갈 때에는 반드시 예물을 싣고 갔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떠도는 공자의 모습을 보고 ‘마치 상갓집 개와 같다’라고도 표현했다. 이를 통해 공자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간절하게 정치적 기회를 얻고자 애를 썼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자 역시 끝내 뜻을 펼치지 못했다. 결국 늙은 몸을 이끌고 나이 일흔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며 말년을 보냈다. 이처럼 공자와 맹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판박이 삶을 살았다. 특히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역사 속에 유학을 굳건히 확립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아성(亞聖)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한편 플라톤(BC 427~347)도 비슷한 삶을 살았다. 그는 정치명문가 출신이지만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하자 정치를 등졌다. 그는 아카데미아를 열어 제자들과 더불어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나 60대에 이르러 두 차례나 시칠리아섬을 방문해 그곳 군주를 통해 자신의 철인(哲人)정치를 실현해 보려고 했다. 그의 시도는 번번이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공자, 맹자, 플라톤은 한결같이 온갖 수모를 무릅쓰고 정치를 갈망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고전은 “군자가 자신의 몸만 청결하게 하고자 한다면 큰 인륜이 어지럽게 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몸을 던져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대의가 있었다. 무엇보다 ‘맹자’는 맹자가 자신의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친 정치 현장의 보고서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정치적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정치적 성공보다 더 값진 불멸의 교훈을 남겼다. 그들은 결코 무엇이 되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무엇을 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정치는 막무가내로 무엇이 되려고만 한다. 이러한 정치의 유일한 양식은 상대의 파멸이다. 이것이 작금의 정치가 살벌하고 음습한 이유일 것이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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