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반은 생화, 반은 조화다. 시든 꽃과 가짜 꽃이 한 화면에 있다. 생화는 생명을 다해 말라 비틀어졌고, 조화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자태로 당당하다. 한때 촉촉한 꽃잎에서 향기를 내뿜던 꽃은 시들어 죽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씨앗을 떨궈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을 예고한다.

생때같던 아이를 잃었다. 2009년, 신종플루 때문이었다. 이쁜 짓 많이 하는 여섯 살, 눈웃음이 유독 예쁜 아이였다. 다시는 웃지 못할 것 같았다. 가족의 행복시계는 그 자리에 영원히 멈춰 있을 줄 알았다. 몇 년 후 새 생명이 태어나면서 웃음을 되찾았다. 가족의 행복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삶의 본질은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다는 걸 생명의 순환을 통해 깨달았다.

배우 이광기의 이야기다. 지난 4월 3일 이광기의 개인 사진전 ‘막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영등포구 갤러리AG에서 이광기와 마주 앉았다. 갤러리AG는 안국약품에서 운영하는 비영리 전시공간이다. 접근성이 좋은 1층에 있어 지나가던 누구라도 편히 와서 보고 나간다. 3월 8일부터 시작해 한 달 가까이 이어온 전시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광기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작품의 의도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아이를 잃고 느낀 것도, 깨달은 것도 많은 8년이라는 시간. 꾸역꾸역 쌓아온 무수한 말들을 작품 속에 쏟아낸 듯 보였다. 그는 전시장에서만큼은 자신을 ‘배우’가 아닌 ‘작가’로 불러달라고 했다. 먼저 왜 하필 꽃인지 물었다.

“내가 내 자신을 꽃으로 비유하고 있더군요. 하루가 다르게 피고 지고 죽어가는 것들을 보면서 나 같다고 여겼어요. 나는 시들어버렸다고 생각했죠. 우리 가족은 다시는 안 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더 아름답게 피어 있더군요. 죽음은 끝이 아니라 뿌리를 통해, 씨앗을 통해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제법 치유가 됐다고 한다. 늦둥이에게 형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들려주고 형을 위한 기도도 많이 한다. 그는 “아이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결코 쉽진 않지만, 잊혀지는 건 더 싫다”고 했다. 늦둥이는 덤으로 생긴 아이, 작가는 덤으로 생긴 직업이라고 표현했다.

조화와 생화 중, 진짜 나는?

그가 카메라를 든 건 2010년, 아이티 지진 현장에 자원봉사자로 나서면서였다. 하늘로 떠나보낸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위해 몸으로 봉사하면서 새로운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탕 하나를 받고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또 다른 세상을 봤다. 그 눈빛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담은 눈빛을 모니터로 확대해 보면서 아이들의 눈빛으로 더 빨려들었다. 초롱초롱한 눈동자 안에 비친 자신의 표정에서 잃은 줄 알았던 미소를 발견했다. 희망의 전조였다.

“사진을 통해 누군가에게 기쁨과 감동을 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아이들을 통해 치유의 씨앗이 하나씩 흩뿌려졌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시작한 일인데 아이들을 통해 받은 것이 더 많아요.”

그의 작품에는 성경책이 자주 등장한다. 뉴욕에서 활동 중인 변종곤 작가의 선물이다. 변 작가는 그를 자신의 브루클린 집으로 초대해 두 개의 선물을 건넸다고 한다. 1800년대의 낡은 성경책과 새하얀 아기천사 도자기. 치유의 매개체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성경책과 나란히 놓인 유리 두상은 빈티지숍을 지나다가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쓰러져 있는 모습이 꼭 나 같았어요.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은데 드러내지 않으면 상처가 치유될 수 없어요.” 사진은 그의 상처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자신의 내면 풍경을 닮은 오브제에 마음이 이끌려 하나둘 카메라에 담았고, 웅크려 있던 상처는 그렇게 표출됐다.

그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며 꽃과 꽃병, 성경책이 아무렇게나 놓인 작품 앞으로 데려갔다. “제대로 돼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액자는 비뚤어졌고, 꽃은 처지고, 화분은 엎어지고, 성경책도 멀쩡하지 않고, 테이블보도 우글쭈글하죠. 못난이들의 집합이에요. 힘들고 상처 입고, 좌절해 있는 내 모습 같았어요. 그런데 나 같은 느낌의 사물들이 전시장에서는 어엿한 주인공이 돼 있잖아요. 그 자체가 새로운 미학적 기쁨을 주죠.”

비슷한 콘셉트의 작품이 또 있다. 전시실 입구에 놓인 두 개의 작은 액자. 튤립과 이름 모를 꽃들이 화병에 무질서하게 꽂혀 있는 사진인데 배경이 다르다. 하나는 흰 벽, 또 하나는 검은 벽이다. 그는 “뒤처지고 남은 것들의 조합”이라고 했다. 이 작가는 꽃이 시드는 과정을 보름 남짓 매일 체크해가며 찍었다. 작품 전시는 버리는 일이었다. 수많은 꽃 중에서 선별하고 또 선별하고, 찍은 사진 중에서 버리고 또 버리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분의 존재들에 시선이 닿았다.

“혼자 작업하는데, 선택받지 못해 뒤에 처져 있는 이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빛이 나더군요. 이 친구들을 찍고 싶었어요. 환경에 따라, 배경에 따라 달라 보이더군요.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 보이잖아요.”

자신은 어느 자리에 있는지 돌아봤다. 배우라는 직업 탓에 카멜레온 같은 모습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문득 ‘조화와 생화 중 나는 어느 쪽일까?’ 질문을 파고들었다. 화려하지만 향기도 생명도 없는 조화와, 시들어버렸지만 희망의 씨앗을 남기는 생화. 겉으로는 초라하지만 생명의 고귀함과 탄생의 희망을 담고 있는 시든 꽃이 더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화두를 작품으로 구현했다. 바탕도 달리했다. 새하얀 튤립 조화의 배경은 흑색으로, 시들어 누렇게 쪼그라붙은 생화의 배경은 흰색으로 했다.

“가짜와 진짜, 흑과 백,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대비시키고 어떤 모습이 진짜 나일까? 성찰해 봤어요. 과거에는 화려한 조화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시든 생화에 가까운 것 같아요. 과거에는 내 손에 있는 것이 모두 내 것인 것 같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모습을 포장했어요. 지금은 만나는 사람도, 추구하는 가치도 달라졌죠. 저처럼 본질을 잊은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싶었어요.”

전시장의 마지막 작품은 설치예술이다. 오브제를 찍은 사진이 아니라 오브제 자체를 전시했다. 화려한 조화와 시든 생화가 뒤섞여 있고 효과음이 들린다. 바람소리와 함께 이광기 작가의 음성이 나지막이 울린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야, 나라고.” 가만히 보니 짧은 생을 다한 꽃은 바닥에 점점이 씨앗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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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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