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용으로 좋은 통닭백숙
2인용으로 좋은 통닭백숙

수많은 식당이 들고나는 대한민국에서 수십 년을 이어온 노포(老鋪). 오래도록 사랑받는 식당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맛이 대중적이면서 언제나 한결같고, 주인장의 정직과 정성이 음식에 배어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명성을 이어온 사랑방칼국수도 그런 집이다.

서울 충무로 3가, 인쇄소 뒷골목에 위치한 사랑방칼국수는 외관부터 짙은 세월의 향기를 풍긴다. 하얀 타일을 촘촘하게 붙인 이층집 낡은 외벽엔 그간 출연했던 방송 프로그램과 가게의 역사, 메뉴를 설명하는 글귀들이 미주알고주알 적혀 있다. 긴 세월 알음알음 찾는 손님들로 줄을 잇는 이곳은 쉬는 시간도 없이 아침 10시부터 종일 문을 연다.

밥때를 한참 비껴 찾아도 가게는 여전히 분주하다. 안쪽 주방에선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1층 홀엔 꽤 많은 손님들이 무심히 식사를 하는 가운데 한쪽 구석에선 겉절이용 배추를 쓱쓱 다듬고 양념을 장만하는 식이다. 이 집은 요즘의 세련된 분위기가 아니라 오래되어 낡은 것들이 주는 따스한 정감으로 가득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은 닳고 닳아 오랜 시간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고, 테이블도 묵은 세월의 옷을 입고 있다.

이 집만의 소박한 푸근함은 메뉴에도 그대로 스며 있다. ‘맛좋은 칼국수’가 6000원인데 ‘계란 넣은 칼국수’와 ‘곱배기 칼국수’는 겨우 200원을 더 받는다. 삶은 닭 반 마리에 밥을 주는 ‘백숙백반’은 8000원이다. 둘이라면 1만6000원짜리 ‘통닭백숙’에 반주를 곁들이고 입가심으로 칼국수 1인분만 시켜 나누면 더없이 흡족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백숙백반은 푸짐한 한 상이다. ‘8000원의 호사’라고 할까! 하얗게 살이 오른 닭고기와 따듯한 밥 한 공기, 양은냄비에 대파 동동 띄워 낸 닭 국물, 먹음직스러운 겉절이, 그리고 양파와 초장을 곁들여준다. 먼저 닭을 삶아 기름을 걷어낸 국물로 입을 촉촉이 적신다.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은 담백한 국물이 마치 애피타이저처럼 입맛을 끌어올려준다. 한없이 숟가락이 가는, 똑 떨어지는 맛에 밥 한 덩이 풍덩 말아 먹어도 좋겠다 싶다. 닭고기는 누린내가 전혀 나지 않고 마늘향이 은은하게 감돈다. 얼마나 잘 삶았는지 살이 야들야들 부드러워 슬슬 뜯어 먹기 좋다. 가슴살도 전혀 퍽퍽하지 않고 입에서 살살 녹는다. 닭고기는 소금에 먹어도 깔끔하지만, 묽은 초장에 대파 썬 것을 넣고 찍어 먹으면 새콤매콤한 맛이 어우러져 산뜻하다.

사실 이 닭백숙만으로 웬만큼 배가 찬다. 하지만 옆테이블의 칼국수에 자꾸 눈이 간다.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담겨 나오는 칼국수는 보기만 해도 정겹다. 옛날식으로 깨와 김가루, 양념장을 올려 주는데, 멸치 국물 맛이 강하게 느껴지며 면발이 부들부들 찰랑인다. 칼국수에 매콤아삭한 겉절이를 척척 걸쳐 후루룩 입가심하면 봄날의 나른해진 입맛은 저만치 달아나고 든든해진 속에서 온몸으로 따듯한 기운이 감돈다.

사랑방칼국수가 문을 연 1968년은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정부는 부족한 쌀 대신 값싼 밀가루를 활용한 분식을 장려하면서 식당에서도 일주일에 이틀은 쌀밥 대신 밀가루 음식을 팔게 했다. 창업주 이희주(82)·오금연(72)씨 부부는 그런 점에 착안해 칼국수집을 냈다. 음식점 경험이 없던 이희주씨는 진짜 칼국수 맛을 찾기 위해 고향인 전주로 내려갔다. 그때 30여명의 동네 아주머니들께 칼국수 만드는 법을 전수받아 재현했으니, 이 집 칼국수야말로 우리네 엄마들의 솜씨가 담긴 전통음식인 셈이다.

대표 오금연씨
대표 오금연씨

신성일·남진·혜은이 단골

오픈 당시 충무로는 대한민국의 할리우드였다. 영화사들이 여럿 모여 있었고, 그들과 협력해야 하는 현상소·인쇄소 등이 번성하던 때였다. 오씨가 서글서글 웃는 낯으로 맛있는 칼국수에 인심을 담아내니, 충무로 영화인들의 사랑방이 되다시피 했다. 그 옛날 유명했던 원로배우 고 김희갑, 가수 남진 등도 이 집에서 칼국수 한 그릇으로 점심을 들곤 했다. 배우 신성일, 가수 혜은이 등은 아직도 이곳을 찾곤 한다.

분식바람이 사그라들던 1980년대 초, 칼국수에 접목할 메뉴를 찾던 이씨는 어느 날 방송에서 닭고기 농장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 그 길로 칠갑산 닭 농장을 찾아 닭고기 요리법을 배워, 이씨 나름의 비법을 더해 내놓은 것이 지금의 백숙백반이다. 정성을 쏟았지만 백숙백반이 처음부터 히트를 친 것은 아니었다.

“구전이 참 놀라워요.”

먹어 본 손님들이 입소문을 내면서 차츰 백숙백반을 찾는 이가 늘었고 얼마 가지 않아 칼국수와 같은 비중으로 이 집의 대표메뉴가 되었다. 낮에는 칼국수, 저녁에는 닭백숙이 많이 나가니 밤낮으로 빈자리 없는 대박 가게가 된 것이다. 이씨는 매일 아침 유명 브랜드인 하림 닭 100여마리를 들여와 삶는다. 오랜 명가라지만 요리법은 단순하다. 그저 마늘과 소금 약간을 넣을 뿐인데, 신선한 닭을 사용하고 오랜 노하우로 삶는 타이밍을 잘 맞추기에 닭고기가 유별나게 부드럽다.

“닭고기는 오래 삶으면 퍽퍽해요. 적당히 삶아 밥처럼 뜸을 잘 들여야 부드럽지.”

곁들여내는 초고추장도 직접 만든다. 회를 찍어 먹는 초고추장과 달리 단것을 넣지 않고 고추장에 사과식초를 넣어 향긋하고 상큼하게 준비한다. 맛깔스러운 겉절이는 매일 담아 하루 숙성시켜 내놓는데, 3년 이상 곰삭은 새우젓으로 깊은 맛을 낸다.

이씨는 아직도 한창 바쁠 때면 팔을 걷어붙이고 국수 삶는 일이며 간 맞추는 일을 도맡는다. 아내 오씨는 직접 겉절이를 담그고 홀 서빙에 카운터까지 본다. 노령에 힘들지는 않을까? “힘들면 음식장사 못 하지. 일이 재미있어!”

이씨 부부는 “감언이설로 귀는 속일 수 있어도 혀는 속일 수 없다”면서 그동안 정직하게 해왔기에 이렇게 빛을 보게 된 것 같다고.

사랑방칼국수는 2006년 영화 ‘식객’의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여러 언론에 소개되면서 멀리 타지에서 일부러 찾는 손님들도 많은데, 문이 닫혀 있으면 실망할까봐 명절 연휴와 짧은 여름휴가 때를 제외하곤 연중 문을 연다. 대신 휴일에는 오후 4시까지만 한다. 일본의 여러 안내 책자에 소개되면서 일본인 손님들이 몇 테이블씩 차지한다. 내국인도 외국인도 새 냄비를 마다하고 우그러진 양은냄비만 찾는다.

이씨 부부가 어려운 시절 시작해 평생의 혼을 바친 사랑방칼국수. 이제 그들의 아들 이용성(44)씨가 열성으로 일을 배우고 있다.

“부모님이 공들여 닦아 놓으셨으니 잘 이어서 백년 가게 만들어야죠!”

정수정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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