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세라믹 가마솥으로 손님 한 명분씩 따로 짓는다. 보통 30분 정도 걸린다.
밥은 세라믹 가마솥으로 손님 한 명분씩 따로 짓는다. 보통 30분 정도 걸린다.

독일에서는 맥주를 급하게 따르지 않는다. ‘7분 법칙’ 때문이다. 맥주를 잔에 따르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최상의 맛을 보장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독일의 상식이지만, 맥주를 따를 때는 허공에서 가늘게, 잔의 한가운데에 조금씩 따라야 한다. 한국식 맥주잔보다는 큼직한 독일제 1L짜리 맥주잔이 맛을 더 좋게 한다. 거품으로 잔이 가득 차면 거품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천천히 맥주를 따르는 동작을 수차례 반복해야 한다. 거품이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 맥주가 잔에 채워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대략 7분이다. 이렇게 맥주를 따르면 거품이 아니라 크림 상태의 맥주 포말이 잔 위에 넘실댄다.

쌀밥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정확히 몇 분 법칙인지 모르겠지만 쌀의 양, 물과 불과의 조합을 고려한 최적의 밥 짓기 시간이 있을 듯하다. 압력밥솥의 삑 소리나 전자밥솥의 디지털신호가 최적의 시간을 알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쌀밥에 대해서만은 밥 짓는 사람 저마다 왕도(王道)의 시간이 있을 듯하다. 따지고 보면 쌀만큼 뭔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 곡식도 없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던 것이 쌀을 둘러싼 특별한 ‘신앙’이다. ‘쌀 한 톨에 농부의 땀 일곱 방울’이라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 쌀 한 톨 남김 없이 밥 그릇을 청소하듯 먹는 것은 상식이다. 비위생적이라 질타를 당하지만, 바닥에 밥알이 떨어져도 곧바로 주워서 먹는 것이 필자의 습관이다.

도쿄(東京) 긴자(銀座)의 ‘하치다이메 기헤이(八代目儀兵衛·이하 기헤이)를 찾아간 이유는 두 가지다. 어릴 때부터 굳어진 쌀에 관한 신앙과, 쌀로 연결될 수 있는 맥주의 7분 법칙 같은 것을 확인하고 느끼기 위해서다. 기헤이는 일본 음식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딘가에서 한번쯤 들어본 노포(老鋪)다. 1787년 문을 연, 230년 역사의 음식점이다. 교토(京都)에 본점을, 도쿄 긴자에 지점이 들어서 있다. 최근에는 나리타(成田)공항에도 진출한 상태다.

기헤이는 특별한 음식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재료로 손님을 맞이한다. 바로 쌀이다. 쌀 그 자체를 주제로 한, 쌀밥 전문 음식점이다. 쌀밥이라고 하면 그다지 시선을 끌지 못하는 음식이라 말할지 모르겠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고 평생 함께할 수 있는 음식은 극히 드물지만 한국인은 삼시 세끼 쌀밥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평범한 것이 비범한 것이라 했던가? 매일 먹는 쌀밥이기에 맛에 관한 아주 미세한 차이라도 금방 발견해낼 수 있다. 입맛이 까탈스러운 사람만이 아니라 미식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라도 간단히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기헤이는 그런 평범하면서도 단순한 재료를 통해 일본을 대표하는 밥집으로 성장했다.

기헤이는 항상 만원이다. 최소한 1만엔대에서 출발하는 저녁 식사 예약은 상대적으로 여유 있지만, 주머니 사정에 민감한 사람들이 즐겨 찾는 점심은 항상 손님들로 터져나간다. 인터넷 덕분에 예약 상황을 한눈에 확인할 수도 있다. 필자가 확인하던 날, 기헤이 교토점의 점심 예약은 한 달 뒤에나 가능했다. 긴자점도 마찬가지다.

하루 20인분만 한정판매하는 긴 샤리(銀シャリ) 정식. 쌀 하나하나에 정성이 들어가 있다.
하루 20인분만 한정판매하는 긴 샤리(銀シャリ) 정식. 쌀 하나하나에 정성이 들어가 있다.

어디 하나 거품이 없는 공간

항상 만원인 외국 유명 음식점 예약에 관한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하나 있다. 점심 직전에 전화를 해서 지금 10분 거리에 있는데 자리가 가능할지를 묻는 식이다. 혼자 멀리서 찾아왔다는 점도 알려야 한다. 물론 합석도 마다하지 않는다. 경험에 따르면 성공률은 대략 30%대다. 직전에 예약을 취소하는 사람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기헤이 긴자점의 점심은 11시부터 시작이다. 10시30분 전화를 걸어 운좋게 자리를 얻었다. 15분 뒤인 10시45분 음식점 앞 도로에 도착했다. 긴자는 차량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 골목형 도로로 구성돼 있다. 좁은 도로 양쪽에 크고 작은 매장이 들어서 있다. 어디를 가도 긴자 특유의 정취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기헤이 앞 도로에는 이미 예약 손님 10여명이 기다리고 있다. 11시 예약 손님이 10시50분까지 안 나타날 경우 예약을 취소한다는 경고문이 눈에 띈다. 정확히 10시50분이 되자 여자 종업원이 나타났다. 예약자 이름을 부르면서 즉석에서 주문을 받는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도로 위에서 주문을 받는다. 특별한 요구를 하지 않는 한, 점심 메뉴는 크게 두 개로 나눠진다. 1593엔과 2259엔짜리 ‘긴 샤리 고젠(銀シャリ御膳)’이다. 긴 샤리는 은빛 사리(舍利)라는 의미다. 고젠은 각기 따로 차려진 1인용 밥상이다. 사리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따온 불교용어로, 유골이나 뼈로 풀이된다. 입적한 스님으로부터 사리가 얼마나 나왔다는 뉴스 때문에 귀에 익었을 듯하다. 그런데 일본에서 사리는 쌀이란 의미로도 통한다. 은빛 사리는 환하게 빛나는 쌀이라는 이미지로 통한다. ‘유골=쌀’이란 점이 조금 섬뜩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일생에 한 번 맛볼지도 모를 음식이기에 조금 비싼 것으로 주문했다.

정확히 11시가 되자 문이 열리면서 손님을 받았다. 종업원이 지정해주는 테이블로 가야 한다. 12명 좌석과, 4명이 앉을 수 있는 다다미(疊)방이 전부다. 모두 어깨를 바짝 붙인 채 빈틈 없이 앉아야 한다. 일본 음식점의 특징이지만, 공간적으로 어디 하나 거품이 없다. 통로, 화장실, 세면대 모든 것이 좁고 작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익숙해지면 거꾸로 크고 넓은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필자는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다다미방에 앉았다. 테이블 한가운데 대나무로 만든 병풍이 앞 손님을 가리고 있었다. 앉은 자리의 맞은편 벽에는 큰 붓글씨로 쓴 ‘쌀(米)’ 족자가 걸려 있다. ‘米’란 한자는 ‘八+十+八’이란 3개의 단어로 연결된 합성어다. 쌀 한 톨 만들기까지 88번의 손이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주방은 테이블 맞은편에 들어서 있다. 안이 환하게 보이는 개방형이다. 모두 5명이 일하고 있다. 입구에 늘어선 세라믹 가마솥이 눈에 들어온다. 손님 한 명에 가마솥 하나다. 불을 붙인 뒤 밥을 푸기까지 대략 30분이 걸린다고 한다. 독일 맥주 7분이 긴자 밥집은 30분에 해당하는 셈이다. 주문을 받기 전 이미 밥 만들기에 들어가기 때문에, 실제 기다리는 시간은 얼마 안 된다. 저녁의 경우 기헤이 특산 숯으로 밥을 짓지만, 점심 때는 가스불로 대신한다. 고기가 그러하듯, 가스냐 숯불이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숯도 어떤 나무를 어떤 식으로 가공한 숯인지에 따라 차이가 난다. 불조절 담당인 듯 주방의 요리사 한 명은 가스밸브 조절에 열심이다. 가마솥 뚜껑 위의 작은 구멍을 타고 밥 익어가는 냄새가 퍼져 나간다. 시장기는 혀가 아니라 후각을 통해 뇌로 전달된다. 소설가라면 이런 밥 익어가는 냄새를 어떤 식으로 표현할까?

식당 입구에 들어선 직판 쌀 전시관. 5㎏에 약 5만원 정도로, 시중의 보통 쌀보다 2배 정도 비싸다.
식당 입구에 들어선 직판 쌀 전시관. 5㎏에 약 5만원 정도로, 시중의 보통 쌀보다 2배 정도 비싸다.

식당 테이블은 12명이 앉으면 꽉 찬다.12명을 위해  종업원 2명, 주방 요리사 5명이 일한다.
식당 테이블은 12명이 앉으면 꽉 찬다.12명을 위해 종업원 2명, 주방 요리사 5명이 일한다.

기헤이는 밥알 요리점?

노포 기헤이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형제가 운영하고 있지만, 형이 전국 200여 벼농사 산지를 돌아다니며 쌀을 엄선해 확보한다. 어디에서 갖고 온 쌀인지는 비밀이다. 일본 왕실에 쌀을 납품했다는 말도 있다. 동생은 교토의 본점 주방 요리사다. 기헤이는 쌀밥만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엄선한 쌀도 전국에 판매한다. 유명세 때문이겠지만, 가격은 보통 쌀의 2배 정도다. 비싼 긴자에다 매장을 연 이유는 밥장사와 더불어 쌀판매를 위한 전시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음식점 곳곳에 기헤이 특산 쌀 관련 광고가 붙어 있다. 형형색색 고급 포장지로 치장된 쌀을 보면, 쌀 한 톨 한 톨을 신주 모시듯 하는 느낌이 든다.

기다린 지 20분쯤 지나자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일본 특유의 작은 반찬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선을 보인다. 멸치, 생선 알, 사시미(刺身), 오이와 무 피클, 덴푸라. 물론 주메뉴는 흰 쌀밥이다. 정밀한 카메라로 사진을 찍듯 밥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기헤이는 밥알을 하나씩 요리해서 제공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깃밥이 아니라 밥알 요리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공기 안에 든 밥알을 보면 전부 120% 풍만하게 부풀어진 상태다. 밥알 하나라도 짓눌리거나 부서진 상태에서 적당히 요리된 것이 없다. 젊고 풍만하다. 입안에 넣어 씹으면 한여름밤 폭죽처럼 터져나간다. 고맙게도 밥은 원하는 만큼 무료로 다시 주문할 수 있다.

일본에서 보통 식사는 국으로부터 시작한다. 국은 음식점의 얼굴이다. 생선이나 된장을 주된 재료로 삼지만, 국맛을 보면 다른 요리의 전체적인 그림, 즉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소스의 수준을 알 수 있다. 기헤이는 다르다. 국이 아니라 그냥 긴 샤리, 즉 맨밥만 한 공기를 비우는 것이 음식을 먹는 순서다. 기헤이 식사법은 크게 3단계로 나눠진다. 일단 긴 샤리만 먹고, 긴 샤리와 더불어 반찬도 골고루 나눠 즐기면서 먹고, 긴 샤리를 오차(お茶) 속에 말아 반찬을 조금 얹은 뒤 먹는다.

이런 식사법에 따르면 최소한 세 공기의 밥을 먹게 된다. 필자는 전부 네 공기를 비웠다. 마지막에는 누룽지도 제공된다. 일본인의 약한 치아를 감안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일본식 누룽지는 딱딱하지 않다. 조금 눌어붙은 상태로, 밥보다 좀 단단한 정도다. 여성들은 얼마나 먹을까. 주변 테이블을 보니 무려 여섯 공기를 해치우는 여성도 있다.

식사 중 느낀 것이지만 음식점 전체가 너무도 조용하다. 필자를 제외한 다른 손님들은 둘씩, 넷씩 함께 온 사람들이다. 짧은 대화를 하거나 간혹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묵묵히 식사를 한다. 밥알 하나하나의 맛을 음미하려는 것 같다. 종업원 두 명은 똑바로 선 채 손님들의 주문을 기다리고 있고, 주방의 요리사들은 쉴 새 없이 뭔가를 만들고 있다. 이미 밖에 길게 줄을 선 다음 손님들을 위한 준비 같다.

기헤이에 다녀온 후 필자는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사치 목록에 재래식으로 잘 지은 밥을 포함시켰다. 전자밥통을 버리고 기헤이에서 본 대로 30분 법칙을 따라 제대로 밥을 지어 먹어 보자는 것이다. 좋은 쌀을 골라 불에 올리기 전 10분간 물에 담가두는 것은 기본이다. 가마솥에 밥을 지으면 최고겠지만 가정에서 가마솥을 사용하기는 당연히 어렵다. 대신 필자는 튜니지산 고깔형 세라믹 그릇을 이용해 집에서 밥을 짓고 있다. 지금까지 10번 정도 시도해 봤지만 기헤이의 맛 근처에도 가질 못했다. 앞으로 1만번 이상의 식사가 내 인생에서 남았다고 생각해 보면 언젠가는 내 손으로 지은 기헤이 수준의 밥을 만들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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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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