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골목에는 오수의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뒷골목에는 오수의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초록이 짙어졌다. 산과 들이 동색(同色)이다.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들인지 구분하기 힘든 시기, 초여름이다. 산비탈 감자밭에 감자꽃이 만발했다. 수확이 한창이다. 24절기 가운데 열 번째 절기인 하지(夏至)를 전후해서 캐는 감자를 하지감자라 한다. 이즈음에 캐는 감자가 제일 맛있다. 수확과 씨뿌리기로 바쁜 이 시기에 가뭄이 깊어지면서 농부들 애간장은 다 녹아내린다. 옛말에 ‘하지가 지나면 구름장마다 비가 내린다’는 속담이 있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는 하지 무렵이 되면, 구름만 지나가도 비가 온다는 뜻이다. 부디 조상들의 믿음대로 시원한 빗줄기가 뿌려지길!

오수천 건너로 옛 제사공장 굴뚝이 보인다.
오수천 건너로 옛 제사공장 굴뚝이 보인다.

의견(義犬)의 고장, 오수(獒樹)

장수에서 오수로 이어지는 13번 국도를 탔다. 목적지까지 좀 더 빠르고 넓은 길이 있지만, 부러 느린 길을 택했다. 도로명은 ‘비행기로’이고, 고개 이름은 ‘비행기재’다. 비행기재란 이름은 정선에도 있고, 정읍에도 있다. 모두 높고 험한 고갯길이다. 장수 비행기재는 해발 530m로 그리 높지 않지만, 남쪽에서 이 정도면 강원도에서는 1000m급이다. 2년 전 장수군에서 1억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만들었다는 ‘사진 찍기 좋은 녹색 명소’라는 이름의 전망대 앞에 차를 세웠다. 멀리 장수군 산서면과 임실군 오수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목적지는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인구 2000명이 채 안 되는 면소재지다. 전라선 철도와 전주와 남원을 잇는 17번 국도가 지난다. 해발 500~600m의 높지 않은 산이 멀찌감치 둘러싸 있고, 길고 낮은 구릉지 사이로는 오수천과 둔남천, 율천이 흐른다. 이러한 자연적인 조건만 놓고 봐도 오수는 풍요로운 고장이다. 한때 임실·남원·장수·순창 일대 12개 면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중심 상권이었던지라 면소재지이지만 읍소재지 못지않은 번화한 시절도 있었다. 열차와 국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 덕분이기도 하지만, 근동에서 이렇게 넓은 들을 가진 곳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1960년대 인구가 1만9000명이었으니까 딱 10분의 1로 줄었지요. 비단 오수의 문제만은 아니겠지만, 인구가 줄다 보니 상권도 다 죽었어요. 하루 종일 기다려 봐야 손님 한두 명 태우기도 힘드네요.”

오수역 앞에서 만난 개인택시 기사 정도상씨 얘기다. 역시 개인택시를 운전하는 최갑수씨와 역 광장의 나무 그늘을 사무실 삼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장날이 아니면 택시를 타는 승객이 거의 없다. 다 옛날 얘기지만, 점심도 못 먹고 하루 종일 운전대를 잡는 날도 있었다고 했다. 택시에 달린 카폰이 쉴 새 없이 울리고, 전주·남원·광주는 물론이고 심지어 서울까지 장거리를 뛰기도 했다.

여행깨나 한다는 사람에게도 오수란 지명은 낯설다. ‘오수’를 검색하면 ‘의견(義犬)’이 가장 많이 뜬다. 그렇다. 오수는 의견(義犬)의 고장이다. 얘기는 이렇다. 불이 난 것을 모르고 잠든 주인을 구한 개의 이야기가 고려시대의 문인 최자(崔滋)가 1230년에 쓴 ‘보한집(補閑集)’에 전해진다. 김개인(金蓋仁)이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 잠든 사이 들불이 일어났다. 주인이 위험에 처한 것을 본 그의 개가 개울물에 몸을 적셔 들불 위를 뒹굴며 불을 끄다 죽고 말았다. 개 덕분에 살아난 김개인은 개를 땅에 묻고 자신의 지팡이를 꽂았는데, 나중에 이 지팡이가 실제 나무로 자라났다. 그런 이유로 훗날 오수는 개 ‘오(獒)’ 자와 나무 ‘수(樹)’ 자를 지명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현재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에는 복원한 김개인의 생가가 있다.

2대 60년째 문을 열고 있는 장안집 소머리국밥. 오래된 토담집 안방에서 밥상을 받는다.
2대 60년째 문을 열고 있는 장안집 소머리국밥. 오래된 토담집 안방에서 밥상을 받는다.

오수에서는 매년 5월 김개인이 기르던 충견을 기리기 위해 ‘의견(義犬) 문화제’가 열린다. 개성 있는 개와 예쁜 개 선발대회, 국내 최초의 그레이하운드 경기장에서는 경진대회도 열린다. 행사 프로그램만 놓고 보자면, 의견(義犬)과는 무관한 애견 문화제에 가깝다. 의견(義犬)공원에는 세계 유명 개의 상(像)이 전시되어 있고, 오수면 곳곳에서 의견(義犬)과 관련된 상징물을 만날 수 있다. 사리에 어긋나거나 질서가 없는 판국을 속되게 이르러 ‘개판’이라는 말을 쓰는데, 반려동물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개들의 신명 나는 한 판이 펼쳐지는 셈이다. 주인공을 제쳐두고 객들이 설치는 형국이 돼서는 안 될 일이다.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 문화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세 시간이면 다 돌고도 남을 만큼 오수면 소재지는 좁다. 오수공용버스정류장에서부터 걷기로 했다. Y자 모양의 면사무소 앞 도로인 삼일로와 터미널 앞 도로인 오수로가 광혜당약국 앞에서 하나가 된다. 도로명은 ‘오수로’로 바뀌었지만 오수사거리에서 금암교까지 약 500m 거리의 ‘시장통’은 여전히 오수의 중심상권이다. 농협과 마트, 농약사, 철물점, 건재상, 약국과 내과 병원, 과일가게가 이 주변에 모두 모여 있다.

오수에 들어서기 전부터 보였던 거대한 붉은 벽돌 기둥을 농협 앞에서 만났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된 오수망루(望樓)다. 1940년경 세워진 것으로 주변 지역의 화재를 감시하고 빨치산 경계 등 비상상황이나 야간통행 금지를 알리는 데 사용되었다. 높이 12m의 원기둥 모양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망루 가운데 가장 높다. 망루보다 더 높은 굴뚝이 길 건너편에 또 있다. 누에 원사를 빼던 공장인 오수 제사공장 굴뚝으로 1990년대까지 가동되다 문을 닫았다. 현재는 공장 건물 일부와 굴뚝이 남아 있다.

“옛날에는 생산시설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정부에서는 노는 땅에 뽕나무를 심어 양잠을 장려했는데,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헬기를 타고 오수지역 뽕밭을 돌아볼 정도로 국가적 관심사였죠. 제사공장에서 명주실을 뽑는 여자 직공이 150명이 넘었으니까, 오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했답니다.”

의견상(義犬像)이 있는 옛 제사공장 옆 원동산공원의 박만영(80) 관리인 얘기다. 당시의 흔적은 주변 골목에서도 만날 수 있다. 오수망루를 중심으로 옛 제사공장 주변에 빼곡히 들어선 적산가옥과 목조건물이 그것으로, 현재는 상가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 꼭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과거의 흔적을 따라 골목길을 걷는다. 걷다 보면 동쪽 끝은 오수천이, 서쪽 끝은 둔남천이 흐르고 있어 좌우 어느 길로 방향을 잡든 다시 시장통으로 돌아오게 된다.

농협 뒤편의 원동산공원에는 의견비(義犬碑)와 의견상(義犬像)이 들어서 있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 수백 년 된 노거수 숲이 한여름 주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기도 하고, 이따금 찾아오는 여행자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장소로 이용된다. 김개인이 꽂았다는 지팡이가 실제 나무가 되어 자랐다고 하는데, 이 아름드리 노거수 중 하나일 터 어떤 나무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를 잠시 피할 겸 면소재지를 벗어나 오수천을 따라 내려간다. 약 4㎞ 거리에 있는 둔덕리의 이웅재 고가를 찾아가는 길이다. 전국에 ‘둔덕’이라는 지명이 많다. 나지막한 산에 길게 언덕을 이룬 형상을 둔덕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지형을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명당으로 친다.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의 증손인 춘성정 이담손이 1500년경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이웅재 고가는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간직한 왕실가문의 집이다. 고택의 문화재적 가치도 의미 있지만, 예로부터 천하의 명당으로 소문난 둔덕마을 입구 정자인 둔덕정에 앉아 바라다보이는 풍경이 그윽하다. 오수천이 마을 앞을 흐르고 모내기를 마친 들녘이 평화롭다.

여행 Tip

전라선 오수역까지 용산역에서 하루 9회 무궁화호가 운행한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오수까지는 30여분, 남원에서는 10여분 거리로 주변과 연계해서 여행 일정을 잡으면 좋다.

풍요로운 고장답게 오수는 예로부터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오수망루 우측 골목 안에 있는 장안집(063-642-5268)은 시어머니가 30년 운영하던 것을 며느리 김춘자(66)씨가 이어받아 60년째 소머리국밥을 내고 있다. 곰삭은 파김치와 갓김치가 별미다. 원동산공원 바로 앞에 있는 원동산식당(063-642-5244)은 가정식 백반 전문점이다. 된장찌개와 계란찜, 생선구이가 기본으로 나오고, 제철 재료 위주의 10여가지 밑반찬이 푸짐하다.

회룡포 전망대에서 내려와 공사장 발판으로 사용하던 구멍이 숭숭 뚫린 철판 다리인 ‘뽕뽕다리’를 건너면 회룡포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회룡포 전망대에서 내려와 공사장 발판으로 사용하던 구멍이 숭숭 뚫린 철판 다리인 ‘뽕뽕다리’를 건너면 회룡포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내성천 수중용궁의 전설을 지명으로, 용궁(龍宮)

용궁으로 간다. 동해바다 어디쯤이겠거니 하겠지만, 틀렸다. 낙동강변 경북 예천군 용궁면이다. 지명이 탄생하게 된 얘기부터 해야겠다.

내성천과 금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삼강진(三江津) 강물 속에 용담소(龍潭沼)와 용두소(龍頭沼)가 있는데, 기우제를 지내면 가뭄이 해결되었고, 물이 고갈되는 일도 없었다. 감 잡았겠지만, 이곳에 살던 두 용이 부부가 되어 지역의 수호신이 되었다. 수중 용궁(龍宮)과 같은 지상낙원을 꿈꾸었던 옛 사람들은 용궁을 지명으로 삼았다.

용궁면 소재지 읍부리 용궁역 앞 골목에는 별주부전을 모티브로 한 토끼와 자라의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고, 무인역이 된 용궁역에는 자라 커피와 토끼간 빵도 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한낮, 넓은 벌판 한가운데서 자라와 토끼를 만난다. 좀 생뚱맞기는 해도 방문객들은 재밌다는 반응이다. 용궁이니, 이 정도 분위기는 내줘야 하는 게 맞다.

용궁면 소재지인 읍부1리, 읍부2리는 통틀어 850명쯤 거주하는 소읍 중에 소읍이다. 이 작은 동네에 주말이면 거주인구보다 몇 배가 많은 방문객이 찾아온다. 이유는 순대국밥! 한 예능프로그램에 용궁 순대국밥이 등장한 이후부터 생겨난 현상인데, 사실 용궁 장터에서는 40~50년 전부터 국밥집이 성업 중이었다. 그러다 방송을 통해 그야말로 빵~ 터진 것.

“매년 용궁에서는 순대축제를 합니다. 현재 11곳의 식당이 영업 중인데, 소문난 맛집 덕분에 외지에서도 많이 찾아오지만 지역주민들 역시 순대국밥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용궁면 주민복지센터 윤현주(47) 주민복지계장 얘기다.

최소 100년이 넘었다는 용궁양조장 권순만 대표는 15살 때부터 막걸리 배달을 했다. 사양길에 접어든 막걸리 사업이지만, 수십 년 단골손님을 외면할 수 없어 여전히 술을 빚고 있다.
최소 100년이 넘었다는 용궁양조장 권순만 대표는 15살 때부터 막걸리 배달을 했다. 사양길에 접어든 막걸리 사업이지만, 수십 년 단골손님을 외면할 수 없어 여전히 술을 빚고 있다.

‘카페용궁’의 최대한씨가 용궁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를 설명하고 있다.
‘카페용궁’의 최대한씨가 용궁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를 설명하고 있다.

꽃이나 지역문화를 주제로 한 축제는 많아도 음식을 주제로 한 축제는 흔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용궁 순대국밥은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순대국밥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했는데, 막상 먹어보니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의 머리고기 덕분인지 다른 지방의 순대국밥과는 좀 다른 듯하면서 독특하네요.” 서울의 한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단체여행을 왔다는 김지윤(49)씨 얘기처럼 용궁 순대국밥은 순대보다 머리고기가 듬뿍 들어가 있어 돼지국밥 맛에 가깝다. 단지 순대가 들어갔다는 것만 다를 뿐.

외곽도로가 생겨나기 전까지 34번 국도가 지났던, 소재지 입구 서쪽 용궁역에서 동쪽 끝 용궁교 다리까지 1㎞ 남짓한 ‘용궁로’가 면소재지 중심도로다. 이 도로를 가운데 두고 북쪽의 면사무소와 남쪽의 시장통 지구로 나뉜다. 시장통 입구 동아당약국 사거리가 중심가라 할 수 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그런지 약국 앞에는 모처럼 나들이 삼아 장 구경 나온 시골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계신다. 동아당약국은 장터의 입구이자 버스정류장이다. 또 이 마을 저 마을 어르신들의 사랑방이 되기도 한다. 버스터미널이 따로 없다 보니 약국 안에 마련된 의자가 곧 임시 터미널이 되는 셈이다. 회룡포행 버스가 떠나자 곧바로 덕계리행 버스가 약국 앞에 선다. 12시를 막 넘긴 시간이다. 이 정도면 대충 장도 파장이란다. 시골 어르신들도 순대국밥을 좋아하실까. 아니다. 가장 인기 있는 장터 음식은 짜장면이란다. 예나 지금이나 짜장면은 시골사람들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인가 보다.

채소와 과일, 옷가지, 생선 좌판, 낫이나 톱을 갈아주고 농기구나 소쿠리 등을 파는 잡화 좌판, 이 정도가 용궁 장터의 전부다. 과거 1970년대까지 근동(近洞)에서 알아주는 우시장이 따로 열릴 만큼 이삼십 리 거리에서도 용궁장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는 얘기는 이제 추억 속의 사진첩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그나마 오일장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주말 관광객 덕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순대국밥집 앞을 중심으로 노점 좌판이 펼쳐져 있었다.

‘육지 속의 섬마을’ 회룡포.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 만든 ‘물돌이 동’이다.
‘육지 속의 섬마을’ 회룡포.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 만든 ‘물돌이 동’이다.

용궁로 동쪽 끝까지 걸었다. 50년 된 참기름집도 있고, 농협 마트, 한의원, 각종 농기계를 수리하는 새마을공업사도 보인다. 다방이 하나둘 사라진 자리에 들어서기 시작한 커피집도 있다. ‘카페용궁’이란 간판이 걸려 있지만, 전통찻집에 가까운 분위기다. 최대한·김점숙 부부가 운영하는 이 집은 오랜 기간 수집한 지역 관련 자료가 빼곡하다. 각종 생활도구와 농기계, 용궁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 등을 카페 내부에 전시해 놓았다. 최대한씨는 “퇴직 후 소일거리 삼아 자료를 모았는데, 우리 부부만 보기에는 아깝더라고요. 그래서 5년 전에 문을 열었어요. 처음엔 이 시골동네에 무슨 커피집이냐고 비웃었지만, 지금은 지역주민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답니다”라면서 자료가 늘다 보니 공간이 비좁아 따로 박물관을 만들 예정이라고 했다.

담쟁이 넝쿨이 붉은 벽돌 건물을 감싸고 있는 예스러운 분위기의 낡은 건물 한 채, 골목에서 단연 눈에 띈다. 용궁양조장이다. “이 건물은 1958년에 지었으니까 60년 되었지만, 양조장이 생긴 건 정확히 나도 몰라요. 100년이라고들 하는데, 아마도 200년은 되었을 거요. 원 주인이 3대째 운영했었고, 그 다음부터는 내가 운영하고 있으니까.” 용궁양조장 권순만(71) 대표 얘기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15살 때부터 친척이 운영하던 양조장에서 배달일을 했다. 부친도 막걸리 배달부로 평생을 이 양조장에서 보냈다.

“6명의 양조장 주주가 있었는데, 한 20년 되었지 싶네요. 막걸리가 안 팔리니까 주주들이 하나둘 권리를 팔고 떠났어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가 그 권리를 사들여서 지금까지 막걸리를 만들고 있답니다.”

장날 노점에서 20년을 썼다는 톱날을 갈고 있다. 요즘 나오는 톱은 약해서 오래 못 쓴다고 한다.
장날 노점에서 20년을 썼다는 톱날을 갈고 있다. 요즘 나오는 톱은 약해서 오래 못 쓴다고 한다.

용궁막걸리는 술맛 좋기로 유명했다. 비법은 물. 양조장 안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물을 길어다 먹을 정도로 양조장 물은 맛이 좋기로 소문났다. 권순만 대표는 여전히 그 물을 사용해서 술을 빚는다. 안타까운 것은 막걸리 사업이 사양길에 접어든 지 오래다. 문 닫을 날만 기다리며 술을 빚은 게 십수년이다. 다행이랄까. 아들이 식품공학과에 다닌다. 아들이 이 양조장을 물려받았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안 팔리는 막걸리 사업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도 고민이라고 했다. 갓 빚은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다. 한마디로 깔끔한 맛이다. 요즘 다양한 재료를 섞은 현대식 막걸리가 유행한다. 하지만 필자 생각은 ‘막걸리 맛은 막걸리다워야 한다’이다.

접시꽃이 소담스럽게 핀 골목을 지나 금남리로 향한다. 우리나라 나무 중에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세금 내는 부자나무 황목근(黃木根)을 보기 위해서다. 황목근(黃木根)은 수령이 약 500년으로 추정되는 팽나무다. 이 나무의 성은 황씨고, 이름은 목근이다. 우리나라 나무 중에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세금도 내는 부자나무다. 천연기념물 제400호로 1939년 마을 사람들이 쌀을 모아 마련한 마을의 공동 재산인 토지를 이 팽나무 앞으로 등기 이전하면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5월이면 누런꽃을 피운다 하여 성을 황, 근본 있는 나무라는 뜻을 따 이름을 목근이라 하였다. 눈앞에 보이는 이 넓은 들이 다 이 나무의 소유라니.

용궁 기행의 마지막 코스는 회룡포다. 워낙 유명해서 가보진 않았어도 한번쯤 들어는 봤을 것이다. 회룡포는 ‘육지 속의 섬마을’이다. 정확히는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 만든, 안동 하회마을, 영월 청령포, 무주 앞섬마을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적인 ‘물돌이 마을’이다. 제 모습을 보려면 장안사 뒤편으로 올라 전망대에 서야 한다. 내려다보는 맛이 일품이다. 부지런한 여행자라면 이른 새벽 풍경을 추천하지만, 느긋한 여행자라면 언감생심, 한낮의 평화로운 풍경도 223계단을 밟고 올라서는 수고에 대한 보답치고는 과하다. 마을 산책도 권한다. 공사장 발판으로 사용하던 구멍이 숭숭 뚫린 철판 다리인 ‘뽕뽕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여행 Tip

용궁역까지는 부산과 영주에서 경북선 열차가 하루 서너 차례 운행하고 주말에는 한 편이 더 증차 운행한다. 무인역으로 현재는 사회적 기업에서 운영하는 자라 커피와 토끼간 빵을 파는 점포가 들어서 있다.

용궁 순대를 내는 식당이 11곳 운영 중이다. 40~50년 전 장터에서 시작된 순대국밥과 연탄불에 구워 내는 오징어불고기가 주 메뉴다. 농협주유소 맞은편 용궁순대(054-655-4554)와 장터의 단골식당(054-653-6126), 두꺼비식당(054-653-4229) 등이 있다.

면사무소 입구 사거리 카페용궁(054-655-3080)에 가면 용궁의 과거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역사적 자료와 근현대사를 담은 사진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고, 용궁 일대 여행 안내도 받을 수 있다.

눌산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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