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해록’(금속활자본)
‘표해록’(금속활자본)

휴가철이다. 누구나 여행에 대한 기대로 설렌다. 평소 우리는 일상을 통째로 바꾸기는 어렵더라도 여행쯤이야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살다 보면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돌연 강제로 여행에 나서야 하는 경우도 있다.

조선 초 제주도에서 급히 뭍으로 향하던 관리가 악천후로 표류하게 된다. 그는 순식간에 뜻밖의 여행으로 내몰렸다가, 꼬박 다섯 달 동안 바다와 대륙을 떠돈다. 귀향한 그는 왕명에 따라 그간의 사정을 날짜별로 자세히 기록한다. 그것이 바로 최부(崔溥·1454~1504)의 ‘표해록’(漂海錄·1488)이다. 그가 실제로 바다를 표류한 것은 불과 보름 정도였다. 하지만 바다든 뭍이든 이 세상이 고해(苦海)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보다 멋진 제목도 없다.

최부는 전라도 나주 출신의 문관이다. 1476년 스물셋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1487년 11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제주도에 부임했다. 추쇄경차관이란 도피 중인 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조정에서 직접 파견하는 중앙관직이다. 이를 통해 당시 뭍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로 많은 죄인들이 도망가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듬해인 1488년 정월 그믐날 고향집의 하인이 상복(喪服)을 가지고 와서 부친의 부음을 전한다. 그는 잔무를 정리하고 사흘 뒤인 윤정월 3일 출항 준비를 한다. 배로 전라도 해남으로 갔다가, 거기서 육로로 나주로 갈 예정이다. 그런데 일기가 좋지 않아 출항 여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부친의 영전에 가야 한다는 일념에 출항을 결심한다.

본래 그에게 딸린 일행은 자신을 포함해 8명이다. 여기에 제주 목사가 제주 출신 선원 35명을 붙여준다. 이리하여 승선 인원은 모두 43명이나 된다. 악천후 속에 출항한 배는 섬을 멀리 벗어나기도 전에 곧바로 폭풍우에 휘말려 황망하게 표류하기 시작한다. 식수를 싣고 뒤따르던 거룻배와도 두절되고 만다.

갑자기 극한 상황으로 내몰린 사람들은 제각각 다양한 행동을 보인다. 병들어 누운 사람,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 고통을 참지 못해 자살하려는 사람, 성실히 사태 수습에 나서는 사람 등. 최부는 상복으로 갈아입고 하늘에 일행의 무사를 빈다. 그는 자신의 일로 고난에 처한 점을 사과하며 일행을 다독인다.

일행은 갈증과 허기로 시달린다. 표류 아흐레째 날 드디어 중국 쪽 섬에 상륙하지만 해적을 만난다. 일행은 그에게 관복을 입고 위엄을 보이라고 하지만, 그는 천리(天理)를 내세워 상복을 고집한다. 해적들은 일행을 알몸으로 만들어 매질을 하며 금품을 요구한다. 다시 나흘을 표류한 끝에 드디어 중국 절강성(浙江省·저장성) 해안에 표착한다. 표류 13일 만의 일이다.

그러나 일행은 정체 모를 자들에 의해 감금상태가 된다. 다음날 그들의 감시를 따돌리고 마을로 도망치지만, 이리저리 쫓기며 구타당하는 신세가 된다. 왜구(倭寇)에 시달리는 해안지방 주민들이 이방인을 결코 환영할 리가 없다. 가까스로 군사를 거느린 관리를 만나 병영으로 인계된다. 일행은 필담(筆談)으로 나흘밤을 심문받고 나서야 왜구의 혐의를 벗는다.

명(明)나라 조정은 일행을 북경(베이징)으로 호송하라고 명령한다. 최부는 항주(杭州·항저우), 소주(蘇州·쑤저우) 등 중국의 강남지방을 지나게 된다. 당시 명나라는 철저히 해금(海禁)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심지어 각국의 사신에게도 오가는 길을 세세하게 지정해줄 정도였다. 그는 뜻밖의 표류를 통해 외부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금단의 땅인 강남지방을 관찰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는 대운하를 지나며 이것저것 탐문한다. 도중에 수차(水車)를 보고 호송인에게 제작공(製作工)을 소개해 달라고 조른다. 그것이 어려우면 수부(水夫)라도 만나 보고 싶다고 채근한다. 갈 길 바쁜 호송인이 자신이 아는 대로 말해주자, 그는 세세하게 물어가며 꼼꼼히 기록해둔다. 그의 호기심은 물산, 산업, 주택, 음식, 복식, 풍속, 교통, 무기 등에 두루 미치고 있다. 특히 그는 장강(長江) 이남과 이북을 대비시켜 각 지역의 특징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강남사람들은 농·공·상업에 힘쓰고 있었으며, 강북은 놀고 먹는 건달들이 많았다. 강남에는 육로로 다니는 행인들은 가마를 이용하지만, 강북은 말이나 노새를 이용하고 있었다.… 강남사람들은 독서를 즐기는데… 강북에는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3월 28일 북경에 도착한 일행은 객사에 머물며 비교적 환대를 받는다. 명나라 조정은 일행에게 상을 내리고 황제 알현의 기회까지 제공한다. 이때도 최부는 상복을 고집하여 명나라 관리를 당황시킨다. 결국 입조(入朝) 때만 잠깐 길복(吉服)으로 갈아입기로 한다. 그는 수많은 문무백관 뒤편에 서서 황제를 향해 절을 올린다.

일행은 4월 24일 북경을 떠나 고국으로 길을 재촉한다. 도중에 북경을 향해 오던 조선의 사신을 만나기도 한다. 일행은 산해관(산하이관), 요동반도를 거쳐 6월 4일 압록강을 건넌다. 제주 앞바다에서 윤정월 3일 표류한 지 꼬박 다섯 달 만이다. 임금 성종은 최부가 상중(喪中)임을 알면서도 그에게 표류기를 작성하고 귀향하라고 명한다. 아마 임금도 중국 강남지방의 풍물이 사뭇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 기록이 후일 출판 과정에서 ‘표해록’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최부는 극한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일행을 침착하게 지휘한다. 때로는 기지를 발휘해 사지를 벗어나기도 한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필담을 통해 유교적 소양을 과시한다. 중국에서 유학의 가치가 무너졌다고 질타하며, 상중임을 내세워 언제나 상복을 고집한다. 그는 항상 마음을 다잡고 시종일관 조선 선비의 ‘꼿꼿한’ 풍모를 유지한다. 때론 그런 ‘꼿꼿함’이 다소 허식적(虛飾的)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인생은 흔히 여행에 비유된다. 대부분의 여행은 미리 계획을 세워 떠난다. 그러나 계획을 세워 태어나는 인생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최부의 경우처럼 갑자기 ‘빈손’으로 떠난 여행이 진실로 인생을 닮았다고 볼 수 있다. 한순간의 폭풍우가 잦아들자, 그의 여행은 제법 여유롭고 평화롭게 펼쳐진다. 더구나 그의 여행지는 당시 외부인의 발길이 일절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땅이다. 그것은 미리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처럼 ‘표해록’이야말로 우리가 여행이 인생을 닮았다고 하는 이유를 제대로 보여준다. 최부는 뜻밖의 불운으로 말미암아 진실로 인생을 닮은 멋진 여행을 경험한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는 여행은 잊어 버리고 관광만 선호한다. 하지만 관광을 인생에 비유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인생을 논하려면 여행의 불편함도 느긋하게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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