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 보던 일본의 음식 잡지가 있었다. 식상한 조리법이나 음식점 소개가 아니라 매번 기발한 기획으로 그 기획에 맞는 음식과 음식점을 소개하던 잡지였다. 음식이라는 콘텐츠를 오랜 세월 다양한 방식으로 다뤄온 일본다운 저력이 돋보이던 매체였다. 그런데 그 잡지가 경영 악화로 폐간을 맞게 되었다. 잡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특유의 기획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폐간호의 주제는 ‘최후의 만찬’. 편집진은 그동안 제작에 참여한 요리사, 음식평론가, 요리연구가, 사회 저명인사 등에게 “당신이 마지막 한 끼로 먹고 싶은 음식과 그 음식을 먹기 위해 찾아갈 음식점이 어디냐”고 물었다. 말 그대로 최후의 만찬 메뉴와 장소를 추천해달라는 뜻밖의 질문에 참여자들은 적잖은 상념에 빠졌을 것이다. 생애 마지막 한 끼라는데 누군들 그러하지 않겠는가.

잡지를 읽어 보면 추천한 음식이나 음식점보다 추천 이유가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음식의 맛은 인간이 오감을 통해 느끼는 총체적인 결과물, 즉 관능의 영역이다. 하지만 관능은 추억을 이기지 못한다. 생애 마지막 한 끼를 선택한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맛있는 음식보다는 추억이 있는 음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추억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백자 사발에 담긴 쌀밥 한 그릇. 순간 ‘이거다!’ 싶었다. 맛이 추억이라면 음식과 관련한 사람들의 추억 중에서 가장 큰 공통분모를 차지하는 음식은 어쩌면 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솥뚜껑을 열었을 때 훅하고 올라왔던 뽀얀 수증기와 구수한 밥내, 할머니가 밥 위에 얹어주시던 조기 한 조각, 가마솥의 밥을 뜸들일 때 남을 열로 쪄낸 계란찜의 부드러움,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위해 아랫목에 두었던 스테인리스 합에 담긴 밥의 온기. 한동안 잊고 있었던 밥과 관련한 아련한 추억들이 다시금 살아났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각성이 나를 덮쳤다. 밥에 대한 추억은 그렇게 많은데 정작 밥에 대해 내가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흔히 익숙한 것에는 무심하기 마련이다. 평생을 매일같이 먹는 밥이니 당연한 것이고, 당연한 것에 굳이 깊은 관심과 시간을 쏟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내 입장은 좀 달랐다. 명색이 맛과 음식에 대한 칼럼을 써서 밥 벌어먹고 사는 처지에 정작 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건 부끄러움을 넘어 치욕적이었다.

각성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적어도 와인의 포도 품종과 양조법, 커피의 원두와 드립 방식에 대해 아는 만큼 쌀과 밥에 대해서도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전국의 밥맛으로 유명한 음식점을 찾아갔다. 벼농사를 짓는 농가도 가봤다. 심지어 절밥 맛있기로 소문난 사찰이나 암자를 찾아 공양주들도 만났다. 맛있는 밥만 실컷 얻어먹었을 뿐 별 소득이 없었다. 그들이 가진 쌀에 대한 정보와 밥을 짓는 비법은 거의 대부분 경험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험은 사례일 뿐 논리가 될 수 없었다.

한동안의 시행착오 끝에 경험이 아닌 논리로 쌀과 밥을 설명해줄 전문가를 찾았다. 국립식량과학원에서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모든 벼 품종을 개량하는 연구자,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브랜드의 전기밥솥을 만든 개발자, 대형 유통업체에서 쌀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MD, 30년 동안 쌀로 밥을 짓고 그 밥을 손으로 쥐어온 초밥 요리사 등을 만났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수십 년 동안 쌀과 밥을 연구해온 전문가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쌀과 밥에 대해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지식을 쌓았다.

신기하게도 그들이 말하는 맛있는 밥을 위한 쌀의 조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맛있는 밥의 결정적 조건은 좋은 쌀로 짓는 것이다. 쌀을 고르는 첫 번째 조건은 우수한 품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형태가 온전한 쌀을 골라야 한다. 쌀은 씨앗이다. 씨앗은 그 자체로 생명이기에 겉껍질에 싸여 있기 마련이다. 겉껍질에 의해 보호받는 곡물은 표면에 윤기가 흐르고 형태가 온전한 완전미로 골라야 한다. 세 번째는 최근에 도정한 쌀을 고르는 것이다. 쌀을 도정한다는 것은 쌀이 생명을 잃는다는 뜻이다. 생명을 잃은 쌀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가급적이면 최근에 도정한 쌀을 골라야 하는 이유다.

정리하자면, 혼합미가 아닌 단일품종의 쌀 중에서 도정일자가 2주 이내고 완전미 비율이 높은 쌀을 고르면 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밥을 짓는 도구는 밥맛에 미치는 영향이 의외로 적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아무리 좋은 도구도 쌀 자체의 품질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고 한결같이 지적했다.

이후로 나는 와인을 구매하듯 쌀을 구매했다. 새로운 쌀이 보이면 무조건 사서 밥을 지어 먹었다. 새 쌀로 밥을 지어 밥솥을 여는 기분은 높은 점수를 받는 빈티지 와인의 코르크를 따는 것과 비견될 정도로 두근거리는 일이다. 좋은 품종의 쌀을 재배하는 농가나 지역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면 열일 제쳐두고 달려갔다. 감각은 경험을 통해 단련된다. 한번 높아진 맛의 기준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모른다. 쌀을 고르는 안목이 트이고 밥맛을 알게 되니 매일매일이 즐겁다. 쌀을 고르는, 밥을 짓는, 밥을 나누는 매 순간이 즐겁다. 그것은 와인이나 커피 같은 기호식품이 주는 희열과는 결이 다른 일상의 즐거움이다.

즐거움을 아는 자들은 그 즐거움을 나누고 싶기 마련이다. 나는 가끔 지인들에게 밥을 지어준다. 살림 아티스트로 알려진 효재 선생도, 사찰 음식의 대가인 선재 스님도 내가 지은 밥을 인정해주셨다. 소박한 한 그릇 밥맛에 감탄하는 그들의 표정에서 나는 더없는 기쁨을 느낀다.

밥을 나누는 것은 끼니를 넘어 추억을 나누는 행위다. 한 그릇의 공깃밥은 결코 허투루 볼 음식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생애 마지막 한 끼를 장식할 쌀을 찾아 헤매고 있다.

박상현 맛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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