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친구 상가에 갔다가 우연히 언론사 간부와 합석했다. 이런저런 화제가 오가다가 ‘소울푸드’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내게 “당신의 소울푸드는 뭔가요?”라고 물었다. 당황하는 내게 상주인 친구가 “정작 소울은 있고?”라고 농을 걸어왔다. 이후 나는 내 소울푸드는 뭘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6·25전쟁 통에 만나 부부의 연을 맺으셨다. 서울 토박이인 우리 어머니의 외증조부는 내의원 의원이셨다고 한다. 외증조부는 외할아버지 형제 세 분에게 각각 중국어·일어·영어 교육을 시키셨다니 당시 돈 잘 번다는 역관(譯官)을 마음에 두셨던가 보다. 그 덕에 막내인 외할아버지는 감리교 본부의 회계를 맡아 보셨다. 외할머니 댁이 있던 서울 내자동은 조선시대 대궐과 육조에 물자를 조달하던 내자시(市)가 있던 곳이니 집안의 경제는 비교적 여유로웠을 것이고, 이른 시기에 개화되었던 것 같다.

한편 아버님은 대구 토박이로 할아버지 삼형제가 큰 울 안에 세 채의 집을 짓고 오순도순 살며 철도공무원과 농사 등을 하며 어렵지 않은 살림을 이루고 계셨다. 그 할아버지 세 분은 나름 풍류객이셨던지 세 형제가 저녁에 모여 거의 매일 시회(詩會)를 열고 약주를 즐기셨다고 한다. 지금은 빛 바랜 삼형제의 한시(漢詩) 한 축만이 그때의 풍류를 전하고 있지만 우리 할머니의 ‘주안상 시집살이’가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간다. 아버지에게는 할머니의 시집살이와 할아버지들의 지루한 시회를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 대구탕이었다. 심해에 살다가 겨울이면 얕은 바다로 떠오르는 대구는 겨울이 제철인데, 기름기가 없어 경상도 사나이들의 입맛에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흉을 보면서도 대구탕의 시원한 맛을 알아가던 아버님의 젊은 어느 날 6·25전쟁이 터졌다. 일찍 과수댁이 되어 하숙을 치던 외할머니, 맏이인 어머니와 형제들은 1·4후퇴 때 대구로 피란을 오게 되었다. 6·25전쟁은 아버님과 어머님이 만나는 인연을 만들었고 슬하에 삼형제가 태어났다.

서울 토박이들은 원래 좀 특별한 자부심이 있다. 사대문 안에 살던 ‘문 안’ 사람과 ‘문 밖’ 사람을 구별하고 말씨도 달랐다. 외할아버지는 광화문 종교교회에서 내자동 집까지 짧은 퇴근길에 철철이 과실을 사서 먹성 좋은 아이들의 입맛을 다시게 했고, 마포나루에 부려지는 제철 생선을 지고 오는 생선장수로부터 생선을 사서 철 땜도 거르시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중에도 어머니가 유독 잊지 못하는, 좋아하는 음식이 민어탕이었다. 민어는 여름에 먹어야 제격인 기름지고 좀 사치스러운 음식이다.

“서울 사람은 보신탕 같은 건 몰랐어. 삼복에는 민어 대가리를 한나절이나 진하게 고아낸 맑은 민어탕이 제일이지.”

그렇다. 민어탕도 모르는 대구 사나이와 대구탕을 시시하게 여기던 서울 아가씨가 만나게 된 것이다. 대구 남자의 열렬한 구애에 감복, 서울 아가씨가 혼인을 허락한 후에도 두 분의 귀여운 ‘대구탕 대 민어탕 문화전쟁’은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수년 전까지 지치지도 않고 한 갑자 넘게 계속되었고, 그 사이에 나 역시 나이를 먹고 대구탕과 민어탕의 깊은 맛을 알 만한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사실 우리 형제들은 민어탕을 그리 자주 접할 기회가 없었다. 티격태격 하시면서도 어머니는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대구탕(큰 놈이어야 맛이 좋단다)을 해마다 찬바람 나면 끓여 드렸고 아버님이 별로 즐기시지 않던 여름별미 민어탕은 툭하면 건너뛰어서 잊혀질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수(白壽)를 장담하시던 아버님이 병환에 들어 찌렁찌렁하던 목소리가 사위어가면서 어머님의 대구탕은 때론 제철을 잊기도 했다. 아마도 생전에 한 번이라도 더 좋아하시는 대구탕을 해드리고 싶은 욕심에 그러하셨던 듯하다. “한 숟가락이라도 드시유” 하시는 어머님의 말씀에 도리질하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의 대구탕도 조금씩 시들해가고 어느 여름의 초입에 아버님은 어머님을 홀로 두고 대구 사나이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셨다. 지난해엔가 대구가 풍년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기후온난화의 영향으로 해류가 바뀌었단다. 하지만 대구 사나이가 없는 세상에 대구가 풍년이면 무슨 소용인가.

아버님이 돌아가신 첫 여름, 나는 서울 이촌동의 아는 요리사에게 청을 넣어 민어회와 민어전, 민어 껍질 쌈을 늘어 놓고 뽀얗게 곤 민어탕을 어머님께 권하였다. 그러나 왠지 예전 같지 않게 드시는 어머님의 옆 모습에서 아버님과 어머님의 오랜 ‘민어탕 대 대구탕 대전’의 환영을 찾고 있는 내 마음속에도 민어탕의 시원함과 함께 쓸쓸한 바람이 스치는 듯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민어탕의 계절이 돌아왔다. 물 좋은 큰 놈을 특별히 주문해서 민어상을 차려내었다. 올해는 어머니가 탕보다도 민어회와 껍질을 특별히 맛있게 드셨다. 그리곤 매년 이어지는 대구탕과 민어탕 이야기가 성탄절 TV 영화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민어탕이나 대구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비닐하우스에서는 가을 수박, 겨울 딸기가 나고 양어장에는 사시사철 생선이 지천인 세상이다. 사오십 년은 갈고닦아야 키울 수 있는 제철 입맛을 어떻게 요즘 아이들에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먼 훗날 아이들에게 그들만의 ‘대구탕과 민어탕’은 무엇이 될까? 실없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래! 아이들에게는 민어탕도 대구탕도 강요하지 말아야지. 그들의 소울푸드는 그들만의 것이므로. 두서없이 기억을 반추하다 보니 중늙은이의 자경문이 되어 버렸다. 그저 오래오래 여름이 변함없이 찾아오고 그때마다 민어 한 마리 잡을 기회가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올겨울에는 어머님께 대구탕도 한번 권해 봐야겠다.

배영호 배상면주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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