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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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렛(마림바를 연주하는 스틱)을 쥔 손이 현란하게 움직인다. 두 개의 말렛이 나무 건반을 두드리고 지나가자 공명관을 통해 투명하고 맑은 소리가 울려퍼진다. 말렛과 손이 마치 하나처럼 움직인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 속도가 빠르고 강렬한 곡이다. 마치 건반 위를 벌떼가 날아다니는 것 같다.

지난 9월 4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근처 연습실, 마림바 연주자인 전경호(29)씨를 만났다. 오는 9월 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독주회를 앞두고 있다. 이번 독주회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마림비스트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알리는 무대이다. 지난해 첫 독주회는 솔리스트 선언 무대로 다양한 타악기를 연주했지만 올해는 마림바에 집중한다. 타악기 연주 10여년 만에 ‘왕벌의 비행’을 시작하는 셈이다.

마림바는 실로폰과 비슷한 타악기로 피아노 건반을 닮았다. 역사가 100년 남짓 된 현대 악기이다. 지금도 진화 중이다. 현재 많이 사용되는 형태는 5옥타브, 61개의 건반이다. 국내에서 마림비스트는 한 손가락에 다 꼽을 수 있을 만큼 흔치 않다. 그중에서도 전경호씨는 특별하다. 그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조기출산아에게 나타나는 미숙아망막증으로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이 마림바를 연주한다는 것은 그가 나서기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타악기 중에서도 음정악기인 마림바는 가장 어려운 악기이다. 마림바의 폭은 3m에 이른다. 좌우를 오가면서 건반을 쳐야 하기 때문에 일반인도 음을 놓치기 쉽다. 건반의 폭도 저음은 넓고 고음은 좁아 일정하지 않다. 악기마다 건반의 크기가 달라 익숙한 자신의 악기가 아니면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안 돼!” 그가 마림바에 도전한 후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그는 마림바를 배우고 3년여 됐을 때인 2007년, SBS 예능프로그램 ‘스타킹’에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 마림비스트’로 출연해 뛰어난 연주 실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가 말했다. “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배웠는데 몇 년 동안 바이엘을 못 뗐어요. 피아노는 안 되는데 마림바는 되는 것이 제가 생각해도 신기해요.”

한빛맹아학교 시절 관현악 음악을 듣다 유난히 그의 귀를 붙잡는 소리가 있었다. 오케스트라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 짧지만 강한 타악기의 울림이었다. 오케스트라에 입단하고 싶은 꿈이 생겼다. 일단 음대를 가야 지원 자격이 생겼다. 주변의 반응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안 돼!” 오케스트라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해야 하는 타악기 연주를 시각장애인이? 무엇보다 지휘자를 볼 수 없으니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불가능은 단지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딱 한 사람이 그를 믿어줬다. 한빛맹아학교에 2년제 전문학사 과정의 음악전공이 신설되면서 타악기 전공 선생님이 새로 왔다. 그의 마림바 스승인 이철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몸짓을 만져가면서 건반을 익히고 음을 익혔다. 점자 악보를 보면서 눈이 아닌 손으로 악기를 익히기 위해서는 연습밖에 없다.

“연습시간요? 보통 아침 6~7시면 연습실에 나가 저녁 9시에 집에 옵니다. 연습실이 작아서 마림바 놓고 나면 겨우 앉아 있을 자리밖에 없어요. 게임도 하고 싶고 음악도 들으면 좋은데 할 수가 없으니 연습을 하는 거죠.”

‘안 돼!’를 ‘왜 안 돼?’로

2012년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기악과에 입학했다. 그해 입시에 처음 도입된 장애인 특별전형을 통해서 합격했지만 학교 측에서는 일반전형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실력이라는 평가였다. 한예종 교과과정은 일반인도 따라가기 힘들 만큼 벅차다. 새로운 곡을 배울 때마다 악보를 점자로 옮기고 건반의 위치도 익혀야 하니 일반 학생보다 몇 배 더디다. 한 곡씩 익힐 때마다 산 하나를 넘는 기분이라고 했다. 그는 현재 한 학기를 남겨놓고 휴학 중이다. 이론수업 교재가 점자로 준비가 안 돼 수업을 들을 수가 없어서다. 장애인복지단체 등에서 점자 지원을 해주긴 하지만 1인당 신청 횟수가 제한돼 있다.

지난해 말 휴학 기간 동안 미국에 단기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학교를 마치면 유학을 계획하고 있다. 그의 롤모델은 세계적인 타악 연주자인 영국의 에블린 글레디(52)이다. 청각장애인인 글레디는 바닥의 진동을 통해 음을 느끼기 위해 맨발로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티비 원더도, 글레디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장애인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음악이 좋기 때문 아닌가요?” 그가 반문하면서 덧붙였다.

“‘안 돼!’라는 말을 ‘왜 안 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물론 힘들고 벽에 부딪힐 때도 많았죠. 슬럼프가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마림바의 아름다운 소리가 저를 붙잡아줬습니다. 제 연주를 통해 사람들이 마림바의 매력을 알고, 마림바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이번 독주회도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대중적이고 쉬운 곡을 선택했다. 2007년 KBS 교향악단 협연을 시작으로 그는 많은 무대에 섰다. 뉴욕, 프랑스, 러시아 등 해외 공연을 다녔고 지난 8월에는 핀란드로 날아가 예술을 통해 장애인의 가능성을 찾는 ACCAC(Accessible Arts and Culture) 페스티벌 무대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연말에는 같은 행사로 이집트에도 다녀올 계획이다. 아직까지 그의 이름 앞에는 ‘시각장애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언제쯤이면 수식어 없이 ‘마림비스트 전경호’로 무대에 설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말했다.

“저한테는 끝없는 도전입니다. 그동안 마림바와 친해지기 위한 도전이었다면, 이젠 음악적 성숙을 이루기 위한 도전이죠. 공명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그의 백팩에는 색색의 말렛으로 가득했다. 말렛은 긴 스틱과 공 모양의 머리로 이뤄졌다. 머리 부분은 다양한 색의 실을 감는다. 실을 몇 번이나 감는지, 느슨하게 감는지, 공 부분 소재가 플라스틱인지 고무인지에 따라 공명이 달라진다. 보통 두 개 또는 네 개의 말렛으로 연주한다. 같은 곡이라도 연주자가 어떤 말렛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난다. 말렛이 공명을 일으키듯, 그의 성실과 도전은 사람들에게 깊은 공명을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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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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