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일리아스

상상력의 원천이 된 최초의 문학작품

기원전 12세기에 트로이전쟁이 벌어졌다.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구송시(口誦詩)로 전승되다가, 기원전 8세기 중엽 호메로스(Homeros)에 의해 문자로 옮겨졌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문학 작품인 대서사시 ‘일리아스(Ilias)’이다. ‘일리아스’는 본래 ‘일리온(트로이의 또 다른 이름)에 관한’이란 형용사가 그대로 제목으로 굳어진 것이다.

전쟁은 10년 동안 계속됐지만, 이 작품은 마지막 해의 얼마 동안, 특히 단 나흘 동안의 전투를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그리스 명장 아킬레우스는 한 포로 여인에 대한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부당한 처사에 격분하여 전장을 떠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여인 자체가 아니라 그 일로 인해 손상된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이었다.

그가 없는 그리스군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참다 못한 그의 친구 파트로클레스가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를 갖추고 출전하지만,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이에 격분한 아킬레우스가 다시 전장으로 돌아와, 헥토르를 죽이고 친구의 원혼을 달랜다. 당시에 우정은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비밀리에 그를 찾아온 헥토르의 아버지에게 정중하게 시신을 인도한다. 적에 대한 존중도 명예의 소중한 덕목이었다.

이 전쟁에는 신들도 편이 나뉘어 복잡하게 개입한다. 하지만 신은 불멸하고 인간은 필멸한다. 인간이 신처럼 불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불멸의 명예를 남기는 일이다. 그리하여 영웅들은 명예를 위해 무모할 정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아킬레우스가 분노하여 전장을 이탈한 것도, 분노하여 전장으로 복귀한 것도 한결같이 명예 때문이었다.

‘일리아스’에는 불멸을 갈망하는 영웅들의 분투와 좌절이 숨가쁘게 교차한다. 또한 신과 인간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끝없이 펼쳐진다. 이로 인해 ‘일리아스’는 고대 비극작가들은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우리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전쟁 후 10년간의 귀향 이야기인 ‘오디세이아’가 ‘일리아스’의 뒤를 잇고 있다.

02 소크라테스의 변명

눈물로 채집한 철학의 씨앗

기원전 399년 어느 날, 노(老)철학자 소크라테스(BC 470~BC 399)가 아테네 법정에 피고의 신분으로 소환된다. 재판은 피고에 대한 사형선고로 막을 내린다. 이때 20대 후반의 젊은 제자 플라톤(BC 427~BC 347)이 비통하게 이 과정을 지켜본다. 그는 법정에서 스승이 스스로를 변호한 발언을 고스란히 기록으로 옮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ia Sokratous)’이다.

소크라테스는 ‘무지(無知)의 지(知)’를 부르짖은 선각자였다. 그에게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그의 철학을 배웠고 다시 흩어져 그것을 전파하였다. 어느 사회든 이런 폭로적 철학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건전하지 못한 사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당시 아테네는 이미 찬란한 기상을 잃고 점점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급기야 아테네는 그를 법정에 세운 것이다.

그는 신에 대한 ‘불경죄’라는 애매한 죄목과 더불어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로 기소되었다. 하지만 그는 교육은 자신과 같은 전문가의 몫이지, 일반 시민은 청년들을 교육할 자격이 없다고 일갈한다. 이는 쇠락해가는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질타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피고라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고, 부조리한 현실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그는 재판 과정이나 수감 과정에서 해외추방 또는 탈옥 등 구명의 기회를 일절 거부한다. 그는 불의한 사회에 타협하느니 차라리 죽음으로써 저항을 각오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목숨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인 것이다. 결국 그는 타락한 민주주의가 건네는 독배를 마시고 의연하게 생을 마감한다. 그의 죽음은 우리를 깊은 묵상으로 이끈다.

그는 죽음을 통해 철학을 선명하게 남겼다. 이로 말미암아 플라톤은 평생 동안 스승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대화체 저작을 통해 철학의 기초를 닦았다. 아마 그가 구차하게 목숨이나 건졌더라면 그의 철학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또한 플라톤 철학도 결코 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야말로 눈물로 채집한 철학의 씨앗이 아닐 수 없다.

03 국가

마르지 않는 지적(知的) 저수지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脚註)’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플라톤은 지난 2000여년 동안 서양의 철학과 사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30여권의 저작을 남겼는데 그중에 단연 최고봉은 ‘국가(Politeia)’이다. ‘국가’는 방대한 분야를 두루 망라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인이 ‘국가’를 구석구석 정확히 독해해 내기란 쉽지 않다.

이럴 때 제법 유용한 편법이 있다. 세밀한 부분은 건너뛰더라도 큰 줄기만은 놓치지 않는 것이다. 과연 ‘국가’의 큰 줄기는 무엇일까. 이 책의 제목은 본래 ‘국가 또는 올바름에 대해’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 책의 주제가 ‘올바름의 구현을 통한 행복한 공동체(국가) 만들기’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행복한 공동체’야말로 유사 이래 인류의 공통된 염원이다. 플라톤은 그 비결이 ‘올바름’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생물학적 욕구(욕망), 도덕적 인정의 욕구(기개), 배움과 진리의 욕구(이성)를 가지고 있다. 이 상충적 요소들이 내면적으로 ‘각기 제 역할을 잘 하는 것’이 곧 개인의 올바름이다. 국가도 개인의 내면적 요소에 상응하는 계급들(생산자·전사·수호자)로 구성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들이 ‘각기 제 역할을 잘 하는 것’이 곧 국가의 올바름이다.

이러한 올바름은 오로지 ‘이성’을 통해 분별되고 구현된다. 하지만 누구나 이성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이성의 담지자인 철인왕이 다스리는 국가가 이상적이다. 그의 이상국가론은 그 이후 서양 역사에서 시도된 다양한 역사적 기획들의 모델이 되었다. ‘국가’는 개인이 이성의 단련을 통해 완전함에 도달해 궁극적으로 행복한 공동체를 건설하기까지의 전(全) 과정을 다룬다. 따라서 거의 모든 분야의 철학을 두루 포괄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오늘날에도 우리는 거기로부터 실로 다양한 사유의 단초를 얻을 수 있다. ‘국가’야말로 결코 마르지 않는 거대한 지적 저수지인 것이다.

04 논어

중국 사상의 챔피언, 한국 사상의 수퍼 챔피언

기원전 5~4세기 무렵 동서양에서는 거의 동시적으로 인간의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서 서양에 ‘국가’가 있다면, 동양에는 ‘논어’가 있다. ‘논어’는 공자(BC 551~BC 479)와 제자들의 문답을 후대에 누군가가 편집한 대화록이다. 이것이 동양사상, 나아가 한국 사상에 끼친 영향력은 새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공자는 자신의 조국 노(魯)나라에서 정치적으로 좌절하자 쉰여섯부터 자신의 뜻을 알아줄 군주를 찾아 중원을 두루 헤맸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석 달 동안 섬길 임금이 없으면 초조해 하고 국경을 나갈 때에는 반드시 예물을 준비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공자의 모습을 보고 ‘마치 상갓집 개와 같다’고도 조롱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공자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간절하게 정치적 기회를 얻고자 애를 썼는지 알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춘추전국시대는 약육강식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로지 왕도정치만이 이런 비참한 현실을 구제할 수 있다고 외쳤다. 왕도정치란 엄격한 수양을 통해 도덕적 완성을 이룩한 군자(君子)가 펼치는 인의(仁義)의 정치이다.

그러나 패도의 세상에서 아무도 그의 유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나이 일흔에 유세를 단념하고 늙고 지친 몸으로 귀향했다. 그때부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논어’는 주로 이 시기에 제자들과 나눈 문답이다. 그 주제는 ‘어떻게 완전한 사람이 되어 행복한 공동체를 건설할까’이다. 그것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고민한 바이기도 하다.

유가는 백가(百家)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더구나 유세에 실패하여 당대에는 별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권력과의 결합을 통해 국가의 정통사상으로 꽃을 피웠다. 드디어 그것은 동양사상의 챔피언으로 군림했다. 조선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로 말미암아 다른 사상들이 이단으로 억압된 것은 동양사회의 크나큰 손실이었다.

05 한비자

인간사를 꿰뚫어본 현실주의적 통찰력

흔히 “제왕은 남이 볼 때는 ‘논어’를 읽고, 혼자 있을 때는 ‘한비자’를 읽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두 대립적인 사상의 특징을 절묘하게 웅변해준다. 잘 알다시피 ‘한비자’는 한비(韓非·BC 280?~BC 233)의 저작이다. 그는 법가(法家)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그에 앞서 법가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사람은 상앙(商鞅·BC 395~BC 338)이었다. 그는 과거의 제도나 법을 확 바꾸자는 변법운동을 제창했다. 그는 이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철저한 법치주의를 채택했다. 그는 진(秦)나라 효공을 도와 진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효공이 죽자 귀족을 비롯한 반대파에 의해 능지처참을 당했다.

한비는 상앙보다 약 한 세기 뒤에 태어난 한(韓)나라 공자이다. 그는 무엇보다 인간관계를 철저히 이해(利害)가 작용하는 관계로 파악했다. 그는 상앙의 변법사상을 충실히 계승한 위에, 군주가 자신의 권세를 활용하여 통치술을 발휘하는 방법을 다각적으로 제안했다. 그는 정치란 세(勢)를 다투는 것이지 결코 의(義)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군주는 힘을 바탕으로 신하를 효과적으로 부려야 한다. 심지어 고의로 의혹을 일으키고 일을 시켜 사실 정황을 파악하고, 말을 거꾸로 하고 일을 반대로 함으로써 의심스러운 부분을 확인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군주란 무릇 한 손에 법(法)을, 다른 한 손에 술(術)을 들어야 한다. 말더듬이인 그는 그의 생각을 ‘한비자(韓非子)’에 유려하게 담았다.

진나라의 위협을 받자 한나라는 한비를 사신으로 보냈다. 진왕(나중에 진시황)이 그에 대해 호의를 보이자 이를 질시한 이사(李斯)가 첩자의 죄를 씌워 그를 살해했다. 비록 그는 비참하게 죽었지만 그의 법가사상은 진시황이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기본강령이 되었다. 이처럼 동양에는 일찍이 세상을 이해관계로 꿰뚫어본 현실주의적 탁견이 있었다. 유학의 정통화로 말미암아 이런 사상이 지속적으로 발전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노릇이다. ‘한비자’는 간혹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비교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차가 무려 1800여년이다.

06 사기

고통을 녹여 만든 매혹적인 인간탐구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 우리는 이 천리(天理)에 굳게 의지해 고달픈 삶을 꾸역꾸역 살아간다. 간혹 이 천리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우리는 깊은 혼란에 빠지곤 한다. 이러한 혼란을 극단적으로 경험한 사람이 바로 사마천(司馬遷·BC 145?~BC 86?)이다.

어느 날 그의 평온한 일상은 순식간에 파탄난다. 그는 사관(史官)의 양심에 따라 어느 장군의 처지를 변호하다가 무제(武帝)의 격분을 불러일으킨다. 무제는 그에게 가차없이 궁형(宮刑)을 내린다. 사마천은 ‘망가져 못쓰게 된 몸’으로 부친의 유지(遺志)인 ‘사기’ 집필에 매달린다. 그는 백이숙제(伯夷叔弟)를 ‘열전’의 첫 편으로 삼는다. 잘 알다시피 백이숙제에 대한 공자의 논평은 유명하다. “인(仁)을 구해 인을 얻었는데 무슨 원망이 있으랴?”

하지만 사마천은 공자의 평가에 감히 의문을 표한다. 백이숙제 같은 의인은 나물이나 캐먹다 굶어 죽었다. 반면 도척(盜跖) 같은 악인은 매일 사람을 죽였어도 평안 속에 천수를 누렸다. 그는 “이런 것이 천도(天道)라면 과연 그것이 옳은가?”라고 반문한다. 이 물음은 또한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절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발분(發憤)하여 ‘사기’를 완성한다.

그의 고난은 그의 시선을 심오하게 만들었다. 잘난 삶이든 못난 삶이든 그의 눈에 귀하지 않은 삶은 하나도 없다. ‘사기’는 크게 보아 제왕을 다룬 ‘본기’, 제후를 다룬 ‘세가’, 그보다 ‘못난’ 사람들을 다룬 ‘열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지난 2000여년 동안 가장 사랑받은 것은 ‘본기’도 아니고 ‘세가’도 아니다. 바로 ‘열전’이다. 만약 그가 쓰라린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 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역사의 주인공으로 다듬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사기’야말로 고통을 녹여 만든 매혹적인 인간탐구가 아닐 수 없다. ‘사기’는 역사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

07 성서

서양문명 이해를 위한 핵심 코드

우리는 흔히 서양고전이 어려운 이유가 언어 장벽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결정적 장벽은 엉뚱한 곳에 있다. 바로 종교적 장벽이다. 서양문명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기독교 사상을 모르고는 서양의 고전, 역사, 예술, 문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기독교 사상을 오롯이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성서’이다. 천지창조부터 예수 이전까지의 이야기가 구약이고, 예수 이후 약 1세기간의 이야기가 신약이다. 하나님은 보잘것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삼는다. 그들이 자신을 믿으면 자신은 그들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한다. 이 약속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한다. 그들이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 하나님은 그때마다 그들을 구제한다. 구약에서는 배신-징계-애원-구제가 지루하게 되풀이된다. 그만큼 인간의 죄성이 끈질기지만, 하나님의 구원의지 역시 확고하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가 결정적으로 좁혀질 수 없다.

드디어 하나님이 결단을 한다. 자신의 분신인 아들(예수)을 지상에 보내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게 만든다. 예수는 모든 계명을 ‘사랑’으로 요약한다. 그의 희생으로 인간은 죄가 용서되고 그의 형제가 된다. 이를 통해 인간은 드디어 하나님의 자식이 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종(從)이던 인간을 자식으로 받아들여 극적으로 화해의 길을 연다. 이로써 구약과 신약이 어우러져 ‘진노(심판)와 사랑(구원)’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골격이 완성된다. 오늘날 우리는 서양문명을 떠나 한시라도 살 수 없다. 그런데 서양문명은 기독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 점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서양의 고전, 역사, 예술, 문명이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 ‘성서’야말로 서양문명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코드인 것이다.

08 국부론

자본주의의 현장보고서이자 미래설계도

이기심이란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꾀하는 마음’이다. 문명이나 종교는 한결같이 그것을 부도덕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그것을 가치중립적으로 바라보고 그 기능을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포착한 놀라운 시도가 있었다. 바로 애덤 스미스(1723~1790)의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1776)이다.

스미스는 당시 급격히 해체되던 중세적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시민적 질서를 모색하는 작업에 천착했다. 그 결실이 ‘국부론’이었다. ‘국부론’의 정식 명칭은 ‘국부의 본질과 근원에 관한 연구’이다. 당시 중상주의 아래에서 국부란, 한 나라가 소유한 금은, 즉 화폐의 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국부의 ‘본질’을 한 나라가 창출하는 재화나 서비스의 양으로 새롭게 정의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국민총생산(GNP) 개념이다.

이때 국부의 ‘근원’은 당연히 그 나라의 생산력이다. 당시 생산력은 노동의 생산성에 의해 정해졌다. 그런데 노동의 생산성은 분업에 의해 한창 촉진되고 있었다. 설사 이기적 동기에서 비롯될지라도 분업과 교환을 통해 좋은 상품이 싼값에 공급된다면 대중의 후생이 증대된다. 시장이 ‘공정’하다면 이런 과정이 확대 반복되며 대중의 후생은 더욱 증대된다.

이런 놀라운 사실을 담은 ‘국부론’은 10여년간의 준비 끝에 1776년에 출간되었다. 당시는 산업혁명의 태동기였다. 그는 혁명의 맹아를 관찰하며 다가올 시대를 위한 지침을 만든 셈이다. ‘국부론’을 통해 사람들은 새로운 현실을 명료하게 이해하며 자신있게 변화를 이끌어 나갔다. ‘국부론’이야말로 자본주의의 현장보고서이자 동시에 미래설계도인 셈이다.

그는 “그들(경제주체들)의 자비심에 호소하지 말고 그들의 자애심(이기심)에 호소하라”고 설파했다. 그는 시장만 ‘공정’하다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모든 과정이 조화롭게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부인한 공산주의의 실험은 한 세기도 못 되어 파산하고 말았다. 아마 당분간 시장경제를 대체할 만한 또 다른 질서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09 종의 기원

사소한 시작에서 비롯된 경이로운 드라마

근대과학은 우주와 자연에 관한 이해를 가속적으로 향상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지동설이었다. 그럼에도 정작 인간 자신에 대한 과학적 규명은 유난히 지체되었다. 어느 누구도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믿음에 쉽게 도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최후의 믿음도 새로운 시대의 도전을 마냥 피할 수 없었다.

이 도전의 주인공이 바로 찰스 다윈(1809~1882)이다. 그는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1859)을 통해 “모든 생명체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화했다”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당연히 인간도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진화의 산물일 뿐이다. 처음에는 극렬한 반발에 직면했지만, 진화론은 머지않아 움직일 수 없는 과학으로 공인되었다.

종(種)이란 교배를 통해 2세를 재생산할 수 있는 개체군이다. 같은 종일지라도 그 안에 변이(variation)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변이는 개체마다 보유한 서로 다른 형질이다. 사람만 해도 생김새나 성격이나 체질이 제각각 아닌가. 그런데 모든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생존가능한 개체수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낳는다. 이로 인해 극심한 생존경쟁이 불가피하다.

이때 환경에 가장 적합한 변이를 가진 개체들만 살아남아 자손을 남기게 된다. 이런 변이가 장기간에 걸쳐 후대로 전달, 선택되면서 서서히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 이런 과정이 바로 ‘자연선택’ 또는 ‘적자생존’으로 불리는 진화 메커니즘이다. ‘종의 기원’은 과학을 종교의 질곡으로부터 결정적으로 해방시키고 현대과학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사실 원시생명의 탄생은 확률적으로 기적에 가깝다. 어렵사리 생겨난 생명체는 진화를 거듭하며 오늘날 울창한 생태계를 이루었다. 이 세상이야말로 다윈의 표현대로 ‘그토록 사소한 시작으로부터(from so simple a beginning)’ 비롯된 경이로운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종의 기원’이 섭리를 부정했다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주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10 시간의 역사

生老病死 겪는 우주의 비밀

우리는 오랫동안 우주를 만고불변의 절대자로 생각했다. 하지만 현대과학은 다양한 증거를 종합해 우주가 절대자가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존재라는 충격적 결론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일반 대중은 그러한 과학적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유명한 과학자 스티븐 호킹(1942년생)은 이러한 타성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현대 우주과학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책을 썼다. 그것이 바로 ‘시간의 역사’(The Brief History of Time·1988)이다. 그는 ‘빅뱅에서 블랙홀까지’(From the Big Bang to Black Holes·이 책의 부제임) 최신의 과학적 성과를 인상적으로 기술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우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뜨겁게 폭발시켰다. 무엇보다 대중은 1970년대에 이미 과학계의 확고한 정설로 자리 잡은 빅뱅을 이 책을 통해 드디어 센세이셔널하게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빅뱅이 대중에 수용되는 빅뱅이 일어난 것이다. 우주는 137억년 전에 빅뱅을 통해 탄생했다. 그 순간에 비로소 시간과 공간도 탄생했다. 우주는 지금도 여전히 팽창을 계속하고 있다. 이대로 계속 팽창할지 아니면 다시 쭈그러들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우주도 시간도 공간도 태어나 지금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가지며 생로병사를 겪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과학이 우주의 비밀을 낱낱이 밝히는 마당에 과학 이외의 것들이 설 자리는 있을까. 실제로 호킹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도 우주가 왜 빅뱅이라는 ‘번거로움’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고 고백한다. 빅뱅 이전은 무엇이며, 빅뱅은 왜 ‘번거롭게’ 일어났으며, 우주는 어디로 향해 가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이다. ‘시간의 역사’는 저자의 독창성이 풍부한 저작은 아니다. 하지만 한 시대의 거대한 지적 성과를 정리하여 이토록 광범위하게 대중들의 생각을 바꾼 저작도 드물다.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유형의 고전인 것이다.

키워드

#창간특집 4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