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어니스트 헤밍웨이,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쿠바를 직접 가보지 않고도 쿠바를 저절로 떠올리게 하는 뜨거운 상징들은 정말 많다. 어쩌면 ‘쿠바의 현재’보다도 ‘쿠바의 과거’야말로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싶은 여행의 이상향이었는지도 모른다. 쿠바의 현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쿠바의 과거에 대해서는 귀동냥이 참 많았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뿐 아니라 쿠바의 다양한 음악들을 틈날 때마다 찾아 듣곤 했고, ‘체 게바라 평전’이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거나 관람했으며, 헤밍웨이의 작품들과 카스트로 평전 등등도 집에 잔뜩 쌓여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도 ‘쿠바’ 이야기가 나오면 귀를 쫑긋 세우며 ‘언제 한 번 그 머나먼 아바나나 트리니다드로 떠나볼까’ 궁리하곤 했다.
그런데 쿠바에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쿠바에 며칠만 있으려고 했는데 한 달, 또는 그 이상을 눌러앉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쿠바에 그토록 매혹된 것은 쿠바의 과거 때문이 아니었다. 쿠바의 과거를 꿈꾸며 여행했던 사람들도 쿠바의 현재에 매혹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쉴드’를 치는 법이 거의 없는 쿠바 사람들의 순수함, 보는 사람을 첫눈에 무장해제시키는 그들의 꾸밈없는 미소, 그리고 뜻밖에 맛있고 가격 부담도 없는 음식 인심 등등. 이 모든 ‘쿠바의 현재’가 여전히 여행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쿠바는 내 오랜 꿈이었다. 그런데도 수많은 핑계를 만들어내며 쿠바행을 미루었다. 너무 멀어서, 시간이 없어서, 스페인어를 몰라서. 그 모두가 핑계임을 알면서도, 나는 제일 좋은 것을 맨 나중으로 미루는 어리석음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 마흔의 문턱에 덜컥 다가서고 말았다. 마침내 모든 것을 자꾸 미루기만 하는 내가 참 밉고, 싫고, 원망스러워질 때가 오고 만 것이다. 그때 비로소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쿠바로 떠나자고. 아바나의 뒷골목과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태어난 장소 코히마르와 체 게바라의 혁명의 꿈을 만나러 가자고. 그렇게 결심하자마자, 미친 듯이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출발하기도 전에, 마침내 꿈이 이루어진 느낌이었으니까.
의사보다 택시기사 월급이 많은 나라
가는 길은 정말이지 멀고 험난했다. 나는 멕시코시티를 거쳐갔기 때문에 더욱 험난했다. 인천공항에서 밴쿠버까지 거의 10시간, 밴쿠버에서 멕시코시티까지도 11시간이 넘게 걸렸다. 나흘간의 멕시코시티와 칸쿤 여행을 마치고 칸쿤에서 아바나공항까지 또 3시간30분이 걸렸다. 인천에서 미국 애틀랜타공항을 경유하여 아바나로 바로 가면 22시간 정도가 걸린다. 어떻게 가도 미국이나 캐나다를 거쳐야 하므로 최소한 22시간이 넘게 걸린다. 아바나에 도착하여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예약해 둔 올드카 택시를 탔다. 올드카는 아바나의 명물이다. 연식이 50~60년은 넘은 그 옛날의 명차들은 분홍색, 하늘색, 보라색, 온갖 과감한 빛깔들로 옷을 갈아입었다.
내가 탄 올드카를 운전해준 택시기사의 이름은 줄리어스 시저다. 스페인어로 발음하면 줄리오 세자르. 그는 아바나의 택시운전사다. 그리고 훌륭한 의사이기도 하다. 왜 의사로 일하지 않고 택시 운전을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쿠바에서는 의사 수입보다 관광객들의 택시운전사 수입이 낫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의료 복지를 자랑하는 쿠바 의료계의 서글픈 현실이 아닐까 싶다. 그가 운전하는 선홍빛 올드카를 타고 아바나를 질주하는 여행자는 그저 감사하고 행복했다. 의사이자 택시운전사이자 아바나를 사랑하는 훌륭한 시민이기도 한 그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아바나의 모든 것이 낡았다. 거리의 자동차도, 벽돌도, 보도블록도, 간판들도, 하나같이 낡았다. 특히 아바나의 벽들은 하나같이 오래되어, 긁힘과 부서짐의 흔적이 선연하다. 그런데 촌스럽지도, 궁벽스럽지도 않다. 아바나 사람들이 이 오래된 벽을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일까. 아바나에서는 세월의 흉터조차 눈부시다. 쿠바 사람들은 새것에 집착하거나 신제품에 열광할 기회가 차단되어 있기에 ‘오래된 것들과 새롭게 함께하는 법’을 찾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아바나에서는 새로운 것에 발 빠르게 대처하고, 유행에 신속하게 따라가는 우리의 삶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물건과 공간에 대한 더 깊고 오래 가는 애착이 느껴진다. 오래된 벽은 오래된 그대로, 낡은 자동차는 낡은 그대로, 서로의 찬란한 파트너가 되어준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체 게바라,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 쿠바 어딜 가나 만날 수 있는 세 사람의 얼굴이다. 이들은 엽서로, 티셔츠로, 포스터로, 열쇠고리와 냉장고자석으로, 심지어 건물의 로고가 되어 살아 있다. 아바나의 오래된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아마도 마음속에 아직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별’의 아스라한 빛을 끝까지 믿고 따라간 사람들이 아닐까. 게바라에겐 혁명이, 카스트로에겐 조국이, 그리고 헤밍웨이에겐 문학이 바로 그 보이지 않는 마음속 별빛이 아니었을까. 때로는 시대의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마음속에는 존재하는 별들의 발자취를 따라, 나는 끝없이 방랑하고 있는 여행자였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의 공연장을 찾아 음악을 들으며, 나는 훨씬 더 젊어지고, 훨씬 더 엔터테인먼트의 요소가 강해진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의 화려한 쇼보다 세상을 떠난 이브라힘 페레르를 비롯한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의 원년 멤버들의 노래가 더욱 그리워졌다. 내 마음속의 보이지 않는 별, 당신 마음속의 보이지 않는 별은 무엇일지 가만히 헤아려 보는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헤밍웨이가 아바나에서 즐겨 마셨다는 모히토로 유명한 카페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로 갔다. 카페 앞에서 사람들은 참 열심히도 셔터를 눌러댄다. 나도 덩달아 신들린 듯 셔터를 눌러대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누가 이렇게 노래를 구슬프고 가녀리게 부르는가 했더니, 거리의 버스커였다. 그는 전혀 사교적이지가 않았다. 거리의 버스커들은 여행자들이 칭찬의 의미로 모자나 박스에 돈을 넣어주면 ‘고맙다’는 눈인사를 보내곤 한다. 그들은 청중과 교감하는 법을 거리의 혹독한 체험을 통해 온몸으로 알아낸 사람들이다.
그런데 헤밍웨이가 모히토를 자주 마시러 왔다는 이 카페 앞의 버스커는 청중과 절대로 교감하는 눈빛을 보이지 않았다. 대리석상같이 단단한 눈빛으로 오직 노래만 혼신의 힘을 다해 불렀다. 그래서 더욱 처연하고 애처롭게 들렸을까. 그의 영롱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그에게 인사하고 지폐를 전해주고 돌아서려는 순간, 그가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아름답다고 칭찬을 해주었으나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청중과 교감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눈빛’으로는 청중과 교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자 나는 왠지 부끄러워졌다. ‘내가 감동했음을 당신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너무 이기적인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불현듯 그의 노래를 더 오래 듣고 싶어졌다. 그와 눈빛으로 교감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노래를 그냥 ‘걸어가며’ ‘스쳐가며’ 듣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듣고 있다는 것을, 그도 마음의 눈으로 느껴주기를 바라며.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도 아름답다는 것을 그도 깨닫기를 바라며 나는 그 자리에 오래오래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