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민주주의 하면 으레 제도적 민주주의를 떠올린다. 실제로 우리의 민주화 과정도 주로 제도적인 면에 초점을 두었다. 그런데 19세기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은 일찍이 민주주의를 뒷받침해주는 주요 바탕의 하나로 ‘생활태도와 관습’을 꼽았다. 이는 민주주의가 일상생활에 배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일상생활의 주무대 가운데 하나는 가정이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 거기서 부당한 관습으로 인해 억압과 불편함을 겪는다면 민주주의는 바탕부터 흔들리는 셈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이 살든 따로 살든 시집생활의 불편함이다. 여성들에게 며느리라는 역할은 죽거나 이혼하지 않고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 굴레다.

그런데 죽거나 이혼하지 않고도 며느리의 굴레를 어렵사리 벗어던진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이 이 과정에서 겪은 눈물겨운 경험을 세상 사람들에게 진솔하게 풀어 놓았다. 그것이 바로 영주(필명)의 ‘며느리 사표’(2018)다. 이 책은 한마디로 ‘의존적이고 나약했던 한 여자가 결혼과 동시에 겪어야 했던 부당함과, 그에 맞서 변화를 만들어내기까지의 이야기’다.

2013년 추석 이틀 전, 저자는 혼자 시부모를 찾아가 ‘며느리 사표’라고 쓰인 빈 봉투를 내밀었다. 연로한 시부모는 의아해하다가, 곧바로 평정을 찾았다. “네가 많이 힘들었나보구나. (시집에는) 오고 싶을 때나 와라.” 시부모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러나 친정엄마, 남편, 주변 사람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그러면 안 된다.” 결혼 후 23년 만의 일이었다.

저자는 열애 끝에 스물다섯에 결혼했다. 남편은 가부장적인 대가족의 맏아들이었다. 분가는 아예 생각할 수도 없었다. 결혼 두 달 후, 시할머니 생신 때 새벽부터 손님접대를 하다가, 그날 저녁에 실신해서 병원에 실려갔다. 그러면서 차츰 대가족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어갔다. 어쩌다 외출했다가도 저녁할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후다닥 일어나야 했다.

‘나’는 증발, 그냥 맏며느리일 뿐

이런 분위기에서 남편의 도움이나 이해를 받기도 불가능했다. 남편은 남편이기 이전에 이 집안의 맏아들이었다. 더구나 주말에도 바깥에서 동네사람들과 어울리기 바빴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사실상 ‘남편 없는’ 삶이었다. 겉으로는 유복한 대가족의 맏며느리고 사회생활 잘하는 남편의 아내였다. 그러나 ‘나’는 증발해버리고 그냥 맏며느리일 뿐이었다.

“시집 가면 그 집 귀신이 돼야 한다.” “맏며느리는 하늘이 내려준다.” 시어머니는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그런 신념이 평생 시어머니의 버팀목이었다. 이제 저자도 그런 신념을 받아들여 맏며느리로 일생을 살아야 할 판이었다. 자칫하다가 “여기서 쉽게 나가기는 어렵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는 그런 삶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며느리 사표 내기 1년 반쯤 전, 저자는 남편에게 이혼을 하든지 분가를 하든지 택하라고 단호하게 요구했다. 맏아들인 남편은 오랫동안 갈등했다. 결국 아내가 우울증에 걸려 치료가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고 분가를 했다. 분가를 하자, 저자는 다시 남편에게 세 가지 요구를 했다. 첫째, 아내의 이야기는 무조건 들어준다. 둘째, 아내는 어떤 역할(며느리·아내·엄마)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살겠다. 셋째, 최소 1년간 주 1회 부부상담을 받는다.

남편이 어렵사리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부부상담을 2년이나 받았다. 그러는 사이에 부부 간에 평등한 위치에서 차츰 대화가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남편이 설거지를 받아들이는 데는 무려 5년이나 걸렸다. 남편도 자신이 대가족의 맏아들인 줄만 알았다가, 비로소 한 아내의 남편이고 부부는 수평적 관계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전혀 어른이 될 준비도 없이 결혼을 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리하여 자식 남매에게 일찌감치 독립적인 삶을 요구했다. 마침 군대를 다녀온 아들과 딸이 동시에 대학을 졸업했다. 반년치 생활비와 월세를 줘서 사흘 간격으로 각각 독립시켰다. 남매는 ‘을’에 자신들의 이름이 적힌 임대계약서를 받아들었다. 그들은 난생처음 ‘을’이 되었다.

저자는 착한 딸로 살다가 결혼해서는 착한 아내와 착한 맏며느리로만 살았다. 정작 ‘나’는 누구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복하지만 내면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집살이를 통해 비로소 ‘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자식들에게 자신과 같은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아들과 딸이 더 이상 부모의 아들과 딸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성인으로서 자신만의 이력을 쌓으며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저자는 자신이 수동적 삶을 스스로 받아들인 측면이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착한’ 여자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던 것이 오히려 ‘어리석었다’고 한탄한다. 일상의 부당함에 대해 ‘왜’라고 물으며 진작 행동에 나서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그는 뒤늦게나마 ‘사즉생(死則生)의 각오로’ 부당함에 항거했다.

‘1인분’의 삶에 대한 희구

그는 누구를 배척하거나 누구에게 상처를 입힐 마음이 조금도 없다. 다만 ‘나’의 온전한 삶을 찾고 싶을 뿐이다. 그는 그것을 ‘1인분’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주체적’ 삶이라는 상투적 표현조차 절대 쓰지 않는다. 그는 며느리, 아내, 엄마라는 다중적 역할에 매몰되기보다 모두가 각자 자신의 ‘1인분’을 온전하게 살아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가 ‘며느리 사표’를 낸 이후, 집안 풍경도 확 바뀌었다. 지금은 명절에도 별도로 차례 음식을 준비하지 않는다. 아침에 성묘를 다녀와 다함께 점심을 해먹으며 남녀노소가 한데 어울려 논다. 생일 등 집안 행사도 대개 음식점에서 치른다. 독립한 남매도 자립적으로 각자 씩씩하게 살아간다. 저자도 자신만의 조그마한 공간을 마련해 상담 관련 일을 한다.

저자는 오랜 번민 끝에 ‘며느리 사표’를 내고 일상의 부당함에 반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그의 항거를 이해한 시부모의 도량이 넉넉하다. 시부모의 장벽을 넘은 그의 항거는 남편과 자식들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며느리, 아내, 엄마의 역할은 서로 맞물려 있다. 저자는 이런 ‘역할’의 삶을 넘어 내 자신이라는 ‘1인분’의 삶을 희구한 것이다.

저자의 경우는 다소 극단적이다. 하지만 기혼이든 미혼이든 여성들에게 며느리 역할은 여전히 버거운 짐이다. 달리 말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질적인 속성은 변함없이 잔존해 있다. 물론 며느리 문제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부부관계를 비롯해 가정생활 전반을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며느리 사표’는 가족관계를 파괴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아무런 악의도 없으면서 관습에 얽매여 억압을 초래하는 부당함을 개선해보자는 제안이다. 이것은 결혼한 사람들의 바람일 뿐만 아니라, 결혼할 사람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이런 민주적 요구는 점점 거세질 것이다.

이번 추석에는 부모가 나서서 ‘며느리 사표’를 요구하는 파격도 상상해볼 만하다. 그로 인해 부모와 자식 사이는 더욱 탄탄해질 것이다. 이제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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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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