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만화 장르인 ‘방드 데시네(BD)’의 대표 작품 ‘틴틴의 모험’.
프랑스 만화 장르인 ‘방드 데시네(BD)’의 대표 작품 ‘틴틴의 모험’.

크레타섬의 미로라고나 할까? 루브르박물관에 갈 때마다 어디가 어딘지 방향을 잃게 된다. 실내 지도를 보면서 걸어도 워낙 넓어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특히 전시물에 몰두하다 보면 안테나를 잃게 된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골목이 실외 미로라면 루브르는 실내 미로다. 모바일폰으로 구글 지도를 켜놓고 걸어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 루브르박물관에 들렀다가 미로 찾기에서 잠시 벗어나려고 박물관 구석 책방에 들렀다. 최하 한 권에 50유로 정도 하는 초대형 미술화보들이 진열돼 있다. 온통 모나리자 얼굴이다. 내용을 들춰보려고 책을 드는데 무거워서 감당할 수가 없다. ‘예술=무게’라는 것이 유럽의 대국 프랑스가 자랑하는 심미안 중 하나일지 모르겠다. 루브르의 규모가 그러하듯, 박물관 책방의 책 역시 크고 무겁다. 루브르 전체를 소개하는 화보는 5㎏은 될 듯한 무게다. 기념으로라도 사고 싶지만 들고 다닐 힘이 없다.

프랑스식 심미안에 대한 불만을 삭이다가 낯익은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틴틴의 모험(Les Aventures de Tintin)’이다. 달나라와 티베트, 피라미드를 종횡무진 여행하는 틴틴의 깜짝 놀란 듯한 얼굴 모습이 전시대 한가운데 들어서 있다. 다른 화보와는 달리 책이 가벼워서 사기로 마음먹었다. 크기는 미술화보들과 비슷하고 30쪽 정도의 분량이다. 양에 비해서는 비싸지만 가격도 15유로 정도로 화보보다는 싸다.

틴틴의 모험을 사면서 ‘방드 데시네(Bande Dessinee·이하 BD)’와 첫 번째 연(緣)을 맺었다. BD는 프랑스 만화장르를 일컫는 말이다. 넓게 보면 애니메이션도 포함하지만 보통은 최대 50쪽 정도에 그치는 사각형 속의 만화다. 프랑스만이 아니라 벨기에·스위스·룩셈부르크 등 프랑스 언어권 만화는 모두 BD라 불린다. 이 중에서도 프랑스는 유럽 최고의 만화 천국이다. 출간량, 판매량, 종사자 모두 유럽 1위다.

루브르가 인정하는 프랑스 만화

필자가 최초로 구입한 BD ‘틴틴의 모험’ 판매처는 루브르다. 박물관 책방 매대에는 수십여 종의 다른 BD들도 진열돼 있었다. 꼰대의 세계관일지 모르지만 ‘유서 깊은 루브르가 만화를 판다’는 사실이 특이하게 느껴졌다. 프랑스에서 BD가 ‘제9의 예술(Le Neuvieme Art)’로 통한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됐다. 프랑스에서 예술이라 불리는 영역은 크게 10개로 나눠진다. 건축·조각·회화·음악·문학·무대예술·영화·미디어예술·비디오게임, 그리고 BD다. 아직 루브르에서 비디오게임 전시회가 열린 적은 없다. 그러나 BD의 경우 이미 2005년에 ‘루브르 BD 프로젝트’란 전시회가 열렸다. 루브르가 인정하는 예술이 BD이고 BD 종사자들도 예술가로 불린다.

‘틴틴의 모험’을 구입한 후 책방에 갈 때마다 BD코너를 유심히 관찰했다. 보통 파리 책방에서 BD코너는 비디오·음악·애니메이션 매장과 함께 운영된다. 손님의 연령으로 치자면 가장 어린 손님들이 북적이는 코너다. 필자는 프랑스어는 잘 모른다. 그러나 만화 그림과 영어·독일어·이탈리아어에서 유추한 단어를 통해 대략적인 줄거리 파악은 할 수 있다. 필자가 갖고 있는 한국·미국·일본 만화 지식을 총동원해 보면, BD만이 가진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해낼 수 있다.

첫째, 눈이 아니라 머리로 읽는 만화라는 점이다. 텍스트로 나타나는 지문이 엄청 길다. 한꺼번에 많은 텍스트를 넣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글자 크기도 작다. 장면 하나하나에 나타나는 글의 길이가 거의 소설 수준이다. 1쪽 정도의 분량을 읽고 내용을 파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엄청 길 수밖에 없다.

둘째, 그림의 수준이다. 아련한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작고 세밀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디테일의 극치가 BD의 특징이다. 과학이 가미된 그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사진과 같은 디테일은 아니다. 상상력이 가미된, 무한한 공간 속의 디테일이다.

셋째는 BD가 다루는 영역이다. 대중적 흥미를 유발하는 소재만이 아니라 역사·문학·과학·철학·수학에 이르기까지 인류문명 모든 것을 다룬다. 재미만이 아니라 객관적 팩트와 사실(史實)에 입각한 스토리 전개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관한 BD를 보면 철학가의 얼굴은 물론 건축, 의상, 심지어 음식조차도 당대 고증하에 묘사되고 있다.

파리 서점의 BD 코너. BD 전문점도 곳곳에 있다. ⓒphoto 유민호
파리 서점의 BD 코너. BD 전문점도 곳곳에 있다. ⓒphoto 유민호

곳곳에 BD 전문 책방

프랑스에는 BD 전문 책방도 따로 있다. 이곳에서는 문학서나 실용서가 아닌 BD만 다룬다. 작고 허름하지만 도시 주변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마주친다. 신간뿐 아니라 이미 수십 년 전에 발간된 BD도 고가로 판매한다. 이번에 파리에 들렀을 때도 노트르담대성당 근처를 돌아다니다 작은 BD 책방 하나를 발견했다. 신서보다 고서 BD가 주종인 책방이다. 6.6㎡(2평) 남짓한 작은 공간으로 들어가는 순간 사람들과 부딪쳤다. 대충 훑어보고 나가려는데, 30대 프랑스 남성이 180유로짜리 BD 한 권을 구입하고 있다. 우주과학에 관한 BD로 ‘1955년판’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밖에서 기다렸다. 그동안 궁금했던 BD에 관해서도 물을 겸 함께 근처 카페로 갔다.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100% 파리지앵이다. 모든 것에 소심한 프랑스인답게, 익명을 전제로 물음에 응해줬다.

그는 “9000편의 BD를 소장하고 있다”고 자랑부터 했다. 재산목록 1호라는 것이다. 2500편은 아날로그 책으로, 나머지 6500권은 모바일에 저장돼 있다고 한다. 운 좋게도 진짜 BD 매니아를 만난 셈이다. 아이폰을 열어 저장된 BD 중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명작을 몇 개 보여줬다. 19세기 말 제작된 고전부터 최신판까지 다양하다. 대부분 컬러판이다. 100년 전 BD가 어떻게 컬러판일 수 있냐고 물으니까 스마트폰 등장과 함께 디지털 컬러 공정이 이뤄졌다고 답한다. 이 30대 프랑스 남성은 BD 매니아인 동시에 자신을 ‘다다미제(Tatamiser)’라 지칭했다. 다다미제란 일본의 다다미(畳)에서 유래한 프랑스어로, 간단히 말해 일본 서브컬처(Sub-Culture)에 빠진 오타쿠(オタク)를 지칭하는 말이다. 프랑스인으로 망가(漫畵)나 애니메이션 같은 일본 문화에 정통한 사람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BD의 특징이나 캐릭터가 어떤지 묻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논리적으로 설명해줬다. “BD는 모든 예술세계를 총괄하는 영역이다. 공간·시간을 넘나드는 것은 물론 다른 예술세계를 객관적·주관적으로 다룰 수 있다.”

원래 어린이용 취미 정도로 활용됐지만, 현재는 어린이와 성인 모두가 즐기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내용에 관한 분석이다. “일본 만화를 비롯한 아시아권 카툰의 경우 스토리텔링 중심으로 이어진다.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결론으로 나아가는 식이다. 영역에 따라 다르지만, BD의 경우 스토리보다 메시지에 무게중심을 둔다. 다른 장면으로 바뀔 때마다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구체적인 텍스트 묘사보다 소설적 구도에서 읽는 것이 BD의 맛이다. 일본 만화의 경우 한 장면 뒤 다음 장면에 대한 예상이 가능하지만 BD는 다르다. 뒷장에 무슨 그림과 텍스트가 등장할지 알기 어렵다. 예측 불가능은 BD를 대하는 재미 중 하나다.”

프랑스 BD 전문점을 돌아다니는 동안 알아낸 것이지만 ‘일본 망가’에 대한 프랑스인의 관심사가 엄청나다. BD 전문점은 물론 조금만 큰 서점에도 망가 코너가 따로 설치돼 있다. 2017년 기준 프랑스에서 판매된 일본 망가 규모는 전부 1500만부에 달한다. BD를 포함한 만화 전체 시장의 35%가 일본 망가다. 매년 성장세이기 때문에 일본 망가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위한 전문학교가 들어설 정도다.

일본 망가 열풍이 다다미제로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더불어 1970년대 초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을 도입한 나라다. 유럽에서 제작하는 것보다 10분의 1 수준의 가격에 불과했기 때문에 대량 수입해서 어린이용 프로그램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저작권 시효가 없기 때문이겠지만 지금도 프랑스나 이탈리아 TV를 틀면 기억에도 새로운 197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이 반복 방영되고 있다. 프랑스의 망가 열풍은 1970년대 어린이였던 어른들이 배경이다. 이미 50대에 접어든 당시 세대들이 1980년대부터 만들어온 망가 열풍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50대만이 아니라 현재는 어린이와 성인 모두가 즐기는 ‘오리엔탈 BD’가 바로 일본 망가다. ‘도라에몽’은 기본이고 ‘슬램덩크’ ‘드래곤볼’ ‘원피스’ ‘나루토’ 등 일본 망가 히트작들이 BD매장 바로 옆에서 팔리고 있다. 1970년대 방영된 애니메이션이 일본에 호감을 갖는 이른바 ‘다다미제’ 탄생의 배경이 된 셈이다.

같은 배경이지만 이탈리아보다 프랑스가 일본 망가에 더 빠지게 된 흥미로운 이유도 있다. 프랑스가 지향하는 다양성의 문제다. 일본 망가는 단일민족·단일문화권에 기초한 것이다. 프랑스는 다양한 인종과 언어에 기초한, 유럽판 ‘멜팅포트(Melting Pot)’ 문화를 자랑한다. BD 그림이나 글이 다양한 배경하의 사람들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금기사항이 많고 소재로 다루기 어려운 분야도 많다. 잘못 다뤘다가는 큰 화를 당하기 십상이다. 2015년 1월 발생한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은 극단적인 본보기다. 일본 망가는 그 같은 금기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인종적 고려 없이 아무거나 소재로 담는 것이 일본 망가의 세계다. 문제가 생겨도 일본 탓으로 돌리면 된다. 일본 망가와 달리 프랑스 BD의 세계화는 거의 제로 수준이다. 문화교류 차원에서 일본도 프랑스 BD를 적극적으로 번역·출간하고 있지만 일본에서 히트작에 오른 것은 단 하나도 없다. 프랑스 특유의 섬세한 유머와 사투리, 역사적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프랑스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BD의 기원

BD의 기원은 18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위스 화가 루돌프 도플러(Rodolphe Topffer)가 고안한 사각형 만화가 원조다. 이후 소재·주제·양식 면에서 발전을 거듭하지만 대중과 본격적으로 마주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크게 볼 때 분야별로 세 개의 시기로 나눠져 발전했다.

1. 어린이용 BD

1950년대부터 30여년간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전부 24권으로 이어진 연재물 ‘틴틴의 모험’이 대표적 작품이다. ‘틴틴의 모험’은 원래 1929년부터 어린이신문에 연재됐던 것으로 전 세계 80여개국에서 번역됐다. 어린이 BD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흥미로운 것은 ‘틴틴의 모험’의 작가가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벨기에 기자로 나오는 틴틴 본인이 그러하듯, 벨기에인 조르주 프로스페르 레미(Georges Prosper Remi)가 원작자다.

2. 성인용 BD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발전했다. 프랑스 BD의 대부 격인 작가 메비우스(Mœbius)가 집필한 ‘블루베리(Blueberry)’ 시리즈가 대표작이다. 1963년부터 1986년까지 20년간 이어진 장편 BD다. 전 시리즈가 무려 28권에 이른다. 일본 망가 작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3. BD의 춘추전국시대

1990년대 이후 작가의 개성을 내세운 작품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했다. 전 시대에 비해 오락성이 강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원래부터 BD 작가는 돈과 무관한 직업이었지만,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생계형 BD 작가들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본래 BD 작가들은 춥고 배고픈 직업이다. 오타쿠처럼 혼자 틀어박혀, 혼자 기획하고, 혼자 스토리를 만들어 출판하는 것이 보통이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