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관 오늘은 영국 영화 ‘칠드런 액트’(The Children Act·감독 리처드 이어·2018)를 다뤄볼까 합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배우 엠마 톰슨이 가정법원 판사 역할을 맡은 영화입니다.

배종옥 원작이 있습니다. 권위 있는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이언 매큐언(Ian McEwan·71)의 작품이지요. 그의 소설은 이미 몇 편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어톤먼트’(2007), 시얼샤 로넌 주연의 ‘체실 비치에서’(2017)가 대표적입니다.

신용관 원작자 이언 매큐언이 ‘칠드런 액트’의 각본도 직접 맡았습니다. 제목 ‘칠드런 액트’란 1989년 제정된 영국의 아동법을 지칭합니다. 법정이 미성년자(아동)와 관련한 사건을 판결할 때 최우선적으로 ‘아동의 복지’를 고려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지요.

배종옥 가정법원 판사 ‘피오나’(엠마 톰슨 분)는 무엇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완벽주의 판사입니다. 퇴근 후 집에서도 서류 더미에 얼굴을 묻은 채 일에 몰두하지요. 인문학 교수인 남편 잭(스탠리 투치)은 그런 그녀에게 여러 차례 대화를 시도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습니다.

신용관 그래서 어느 날 선언을 하지요. “아무래도 나 바람 피울 거 같아”라고.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피오나는 남편을 믿었던 만큼 크게 상심을 합니다.

배종옥 법정에서 피오나는 결혼생활 문제로 소송을 건 여성에게 “남편과 대화는 했는가. 대화부터 하고 오라”고 말하는데, 정작 자신은 남편과 정서적 교류가 없는 모습을 보였던 거지요.

신용관 피오나는 세간의 관심이 쏠린 사건 하나를 맡고 있습니다. 만 18세를 수개월 앞두고 있어 현재 미성년자인 애덤(핀 화이트헤드 분)의 케이스인데요. ‘여호와의 증인’을 모태신앙으로 믿는 애덤은 백혈병 환자로서 당장 수혈을 해야 살 수 있지만 종교적 신념으로 수혈을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배종옥 미성년이기에 칠드런 액트에 따라 판사의 결정으로 강제 수혈을 할 수가 있는 거지요. 그런데 남편의 외도 선언과 그 실행에 피오나는 ‘과연 그동안 내가 내려온 결정이 최선이었을까’라는 회의감에 빠지지요.

신용관 그래서 피오나는 죽음까지 각오한 소년 애덤이 수혈 거부라는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여러 결과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결정한 것인지를 직접 알아보기 위해 법정 밖으로 나가 중환자실로 향합니다. 이 영화의 법정 장면은 어떻게 다가오던가요.

배종옥 저도 요즈음 법정 장면을 찍고 있지만 이게 촬영은 힘들고 표시는 별로 안 나는, 시쳇말로 본전 뽑기 어려운 작업이지요. 올 10월에 개봉 예정인 ‘결백’(감독 박상현)이라는 작품에 법정 신이 몇 군데 나오는데, 카메라를 아무리 잘 돌려도 그림이 예쁘게 나올 리가 없잖아요. 판사·변호사·피고인 등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가야 하는 작업이라 감독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칠드런 액트’의 법정 장면은 심플하면서도 깔끔하게 잘 만들었어요.

신용관 법정에서 엠마 톰슨의 대사 중에 상당히 긴 것도 있던데 외워야 할 내용이 많으면 배우로서 힘들지 않나요.

배종옥 대사 길다고 어렵진 않은 듯해요. 하지만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을 구사하려면 괴롭지요. 영화 촬영 땐 오히려 짧은 대사들이 더 힘들어요. 감정을 적절하고 밀도 있게 담아야 하니까요.

신용관 중환자실에서 만난 피오나와 애덤은 길지 않게 대화를 나누지만, 애덤은 피오나로부터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습니다. 애덤의 기타 반주에 맞춰 피오나가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워낙 예상을 벗어난 일이라 배석한 사람들도 놀라지요.

배종옥 영국계 아일랜드 시인인 예이츠의 시에 곡을 붙인 거였지요.

신용관 192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의 서정적인 시 ‘다운 바이 더 샐리 가든(Down by the Sally Garden)’인데, 이후 곡조가 붙어 아일랜드 민요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배종옥 둘의 첫 대면은 피오나의 수혈 결정으로 살아난 애덤이 시의 세계에 빠지고 피오나를 쫓아다니게 되는 계기가 된 장면이라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신용관 그렇습니다. 부모의 영향으로 종교만이 전부였던 소년에게 예술을 알게 해준 피오나는 애덤의 새로운 우상이 되었고, 그는 판사를 따라다니기 시작합니다. 짧은 외도 후 집으로 돌아온 남편과의 관계 때문에 가뜩이나 머리가 아픈 피오나로선 아주 당혹스러운 상황이 닥친 것이지요.

배종옥 이 지점부터 영화가 다소 헤매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피오나가 “이제 네 재판은 끝났고, 너와 나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어야 한다”며 단호하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뻘인 판사의 동선과 휴대폰 번호를 알아내 쫓아다니는 애덤의 모습이 영화에서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그려져 있냐는 거지요.

신용관 동기를 유추해볼 수는 있을 겁니다. “다가올 삶과 사랑을 떠올려봐”라고 충고하고, 판결을 통해 자신을 살려 놓았으며, 시와 예술의 세계를 알게 해준 인물이니까요.

배종옥 무작정 피오나를 따라다니는 애덤을 위험한 스토커로 보이지 않게 하고 일종의 연민마저 느끼게 만드는 건 애덤 역을 맡은 핀 화이트헤드의 연기력에 힘입고 있습니다. 막 성인의 단계에 접어든 아이의 복잡한 심정을 미묘하게 표현했더군요.

신용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Dunkirk·2017)로 스타덤에 오른 핀 화이트헤드는 ‘칠드런 액트’에서의 섬세한 연기 덕분에 제39회 런던 비평가협회상에서 영국신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역시 이 영화의 중심엔 피오나 역의 엠마 톰슨이 있습니다.

배종옥 물론입니다. 저는 암에 걸린 교수가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는 내용의 TV 영화 ‘위트’(Wit·2001)를 보고서 엠마 톰슨의 팬이 됐습니다. ‘칠드런 액트’에서는 지성미와 더불어 약간 건조한 느낌을 절제된 표정으로 잘 전달하고 있더군요. 1959년생이니 올해 60인데, 깊게 팬 주름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화면에 드러내고 있어서 주인공의 고뇌와 깊이를 효과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신용관 ‘칠드런 액트’는 영국 특유의 문화를 엿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판사 피오나와 그녀의 서기 나이젤(제이슨 왓킨스 분)의 관계는 직업 간의 신분 차이를 엄격히 지키는 영국 사회의 단면을 부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배종옥 어쨌든 영화엔 피오나와 애덤의 관계라는 메인 축이 있고, 피오나와 남편과의 관계라는 또 다른 축이 있는데, 이 두 축이 잘 연결되지 않는 것 같아요. 아마도 애덤이라는 캐릭터의 설정이 모호해진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는 듯합니다.

신용관 제 별점은 ★★★. 한 줄 정리는 “환갑인 엠마 톰슨의 어찌할 바 모르겠는 표정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배종옥 저도 ★★★. “결말이 다소 아쉬운?”

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기획취재위원 / 배종옥 영화배우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