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뜻하는 킬리만자로 정상 ‘우후루 피크’를 오르내리는 등산인들. 마지막 캠프에서 1200m나 고도를 더 올려야 하는 힘든 과정이지만 아프리카 최고봉 정상을 오른 기쁨은 그 어떤 성취감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판타스틱한 풍경을 배경으로 우뚝 솟구친 킬리만자로 2위 고봉 마웬지 피크가 바라보인다.
‘자유’를 뜻하는 킬리만자로 정상 ‘우후루 피크’를 오르내리는 등산인들. 마지막 캠프에서 1200m나 고도를 더 올려야 하는 힘든 과정이지만 아프리카 최고봉 정상을 오른 기쁨은 그 어떤 성취감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판타스틱한 풍경을 배경으로 우뚝 솟구친 킬리만자로 2위 고봉 마웬지 피크가 바라보인다.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Kilimanjaro ·5895m)는 아프리카 최고봉이자 세계 최대의 휴화산이다. 열대 평원에 우뚝 솟아오른 이 산은 국민가수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 속 가사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가 연상될 만큼 실제 높고 거대하면서도 독특한 풍광이 인상적이다. 또한 아마추어 등산인들에게는 특별한 등반 장비나 기술 없이 오를 수 있는 대륙 최고봉으로서 매력적인 산이다.

13년 만에 다시 찾은 킬리만자로는 예전 풍광 그대로였다. 지난 1월 2일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를 거쳐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공항에 내려서자 제주의 한라산처럼 웅장하면서도 넉넉한 킬리만자로의 풍광이 이역만리에서 찾아온 23명의 등산인을 맞아주었다.

킬리만자로에는 마랑구(Marangu), 마차메(Machame), 시라 플라토(Shira Plateau) 등 6개 루트와 정상인 키보(Kibo·5895m) 외곽을 도는 서킷 루트가 있다. 그중 ‘코카콜라’ 또는 ‘투어리스트 루트’로 불리는 마랑구 루트가 등산인이 가장 많이 몰리는 대표적인 루트다. 반면 케냐 접경 지역에서 출발하는 롱가이(Rongai) 루트는 접근이 불편하기 때문에 인지도가 낮다. 움웨카(Umweka)나 움브웨(Umbwe) 루트는 주로 하산로로 이용된다.

필자가 이번에 오른 마차메 루트와 시라 플라토 루트는 최근 몇 년 새 인기가 점점 높아지는 코스이다. 전 일정 캠핑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다른 산길에 비해 풍광이 뛰어나고 해발 4000m 안팎 고도에서 사나흘 지내며 고소적응을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만큼 등정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필자는 ‘월간 산’ 기자 시절인 2007년 11월 말 마차메 루트를 찾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일행 6명이 6박7일간 산행을 하면서 만난 외국 산악인을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인적이 드물었다. 이번 산행 때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커진 캠프장마다 오색 텐트가 빼곡히 들어차는 등 산악인들로 붐볐다. 산행 3일째 시라 플라토 루트와 합쳐진 이후로는 등산로가 전 세계에서 몰려든 산악인들로 줄을 잇는 듯했다. 이제 킬리만자로를 대표하는 등산로로 자리 잡은 셈이다.

킬리만자로의 풍광은 예전 그대로였다. 단지 우기(4~5월, 11~12월)가 길어지면서 키보 일원에 눈이 많이 쌓여 있다는 점이 다른 면이었고, 그래서 산이 더욱 웅장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폴레, 폴레(천천히, 천천히)~.”

국립공원 규정에 따라 우리가 고용해야 하는 현지인은 가이드와 8명의 보조가이드, 조리팀 3명, 포터 92명 등 총 104명이었다. 일행 23명을 더하면 127명의 대(大)부대다. 하지만 매일 아침 캠프를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거운 짐을 등이나 머리에 짊어진 포터들은 일행을 추월하기 일쑤다. 때문에 출발 2시간이 지나면 일행과 가이드들끼리 산을 오르는 경우가 많다. 포터들은 무거운 짐을 진 채 등산로를 오르다가도 우리가 “잠보(jambo·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얼굴이 환해지며 “폴레, 폴레”라고 응답한다. 고소증을 염려해 천천히 걸으란 의미다.

마차메 루트는 첫날과 둘째 날 고도를 많이 높인다. 첫날 공원 입구인 마차메 게이트(1800m)에서 마차메 캠프(3010m)까지 약 1200m를 오르고, 둘째 날엔 열대우림을 벗어난 시라 캠프(Shira Camp·3840m)까지 올라선다. 아열대 숲길이라 원시림 외에는 딱히 볼 만한 것은 없지만 간혹 원숭이들이 나타나 눈을 즐겁게 한다.

고산의 혹독한 자연환경을 견뎌내며 400년 넘게 생존한다는 키네시오 킬리만자리. 바란코 캠프 가는 길.
고산의 혹독한 자연환경을 견뎌내며 400년 넘게 생존한다는 키네시오 킬리만자리. 바란코 캠프 가는 길.

킬리만자로 3대 봉우리 시라 산군의 풍광

둘째 날은 숲이 걷히고 조망이 터지면서 탄자니아 도착 첫날 묵었던 모시(Moshi) 일원이 모습을 드러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도시락을 먹는 사이 정상부에서 밀려온 먹구름이 비를 쏟아붓는 바람에 우비나 우산 차림의 산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목 한계선 위쪽 테라스 지형에 자리한 시라 캠프에서 하룻밤을 자고 깨어났을 때는 키보·마웬지(Mawenzi·5149m)와 함께 킬리만자로 3대 봉우리인 시라 산군(3962m)이 눈앞에 펼쳐졌다. 평원에 봉긋 솟구친 메루산(Mount Meru·4562m·아프리카 5위 고봉)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멋진 풍광을 보여주었다.

셋째 날 묵은 바란코 캠프(Barranco Camp·3900m)는 시라 캠프와 고도가 엇비슷하지만 해발 4600m가 넘는 라바타워(Lava Tower) 안부를 넘어야 한다. 아침 햇살과 구름안개가 몽환적인 풍광을 자아내는 키보 남서벽의 모습에 빠져들고, 수묵화 같은 메루산의 풍광에 감동하며 오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 약세로 뒤처지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다. 고소증이 심해지면서 라바타워 캠프장에 스태프들이 마련해놓은 라면조차 먹지 못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라바타워 안부에서 바란코 캠프로 가는 내리막길은 킬리만자로 특유의 식생을 만나는 구간이다. 고도가 400m쯤 낮아지자 400년 넘게 산다는 키네시오 킬리만자리(Senecia Kilimanjari·영어명 Giant Groundsel)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식물은 외가닥 혹은 서너 개의 가지를 치며 5m 안팎 높이까지 자라는데 말라붙은 잎이 밑으로 처지면서 아래쪽 잎을 덮어줌으로써 단열·보온 역할을 해준다. 그렇게 수많은 잎이 겹쳐지면서 제법 굵은 나무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산의 혹한을 견뎌내는 고산식물의 생존법이 아닌가 싶다.

자정을 넘어 비가 멈추자 밤하늘은 별들의 세계로 변신한다. 산 아래 대지 또한 가가호호의 불빛으로 반짝인다. 아름답다. 지금 이곳, 바란코 캠프장은 도시인들이 그리는 이상향이 아닌가 싶다. 캠프장에 머무는 사람들마다 “정말 아름다워요, 행복해요”를 연발한다.

하얀 구름과 반짝이는 설릉이 아름답고도 웅장한 풍광을 자아내는 킬리만자로 정상 남벽. 바라푸 캠프 가는 길.
하얀 구름과 반짝이는 설릉이 아름답고도 웅장한 풍광을 자아내는 킬리만자로 정상 남벽. 바라푸 캠프 가는 길.

세계 100대 캠프장 카란가 캠프

바란코 캠프에서 카란가 캠프(Karanga Camp·3930m)로 가려면 300m 높이의 바란코 월(Barranco Wall)을 올라야 한다. 제법 거친 바위 절벽이지만 일행 모두 스릴 넘치는 길을 오르면서 즐거워한다.

바란코 월 상단 테라스에 올라서자 더욱 감동적인 풍광이 위아래로 펼쳐진다. 흰 눈을 이고 있는 남벽 주변으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며 환상적인 풍광을 자아내고 산 아래 아프리카 대지는 풍요롭기 그지없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가 푸른 빛을 띠는 것은 역시 킬리만자로가 젖줄 역할을 하기 때문이리라.

거대한 산록을 가로지르고 계곡을 건너 된비알을 올라가자 지능선에 자리한 카란가 캠프에 도달한다. 경사진 능선에 위치해 잠자리가 편치 않은 곳이지만 조망은 ‘세계 100대 캠프장’이란 명성이 빈말이 아니다 싶다. 13년 전에도 하루 더 묵고 가고픈 마음이 들 만큼 풍광이 멋진 곳이었다. 하기야 킬리만자로 남벽 아래 캠프장 중 조망과 풍광이 시원찮은 곳이 있을 리 없다.

이튿날 1월 7일은 마지막 캠프인 바라푸 캠프(Barafu Camp·4680m)로 가는 날이다. 머문 곳에서 서너 시간 거리다. 서양인들은 바란코 캠프에서 바라푸 캠프까지 하루에 걷고 그날 밤 정상을 향한다. 우리는 순조로운 고소적응을 위해 중간 위치인 카란가 캠프에서 하루 더 묵기로 한 것이다.

바라푸 캠프로 가는 길은 수많은 등산인들과 현지 스태프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하지만 구름을 머리에 인 키보 정상은 수시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바라푸 캠프에 도착하자 컨디션이 좋지 않은 이들이 여럿 보인다. 오늘 밤 정상을 향해야 하는데 걱정이다. 대부분 여러 해 벼르고 벼르다 적잖은 비용까지 치르고 아프리카 최고봉에 도전했기 때문에 실패할 경우 상심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텐트 안에 누웠는데 정신이 더 맑아진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이들의 발자국 소리 때문에 잠이 더 오지 않는다. 결국 밖으로 나가 정상에서 내려오는 이들을 볼 때마다 축하 인사를 건네며 오늘 밤 산행을 머릿속에 그린다.

저녁식사 후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잠에 빠져드는 듯했으나 곧 출발시각이 다가온다. 밤 11시, 예정대로 출발이다. 오늘 정상까지 약 1200m를 오르고, 다시 바라푸 캠프를 거쳐 움웨카 캠프(3060m)까지 2800m를 내려가야 한다.

벌써 정상을 향하는 팀이 있다. 우리 팀이 두 번째다. 높이를 올릴수록 한 명 한 명 포기하는 사람이 나온다. 이를 악물고 정상을 향해 한 발짝씩 떼어보지만 무거운 다리와 고소증세는 그만 포기하라고 자꾸 유혹한다.

라바타워 가는 길. 무언가에 홀린 듯해 뒤돌아서면 평원에 솟아오른 메루산이 수묵화 같은 풍광으로 발걸음을 붙잡았다.
라바타워 가는 길. 무언가에 홀린 듯해 뒤돌아서면 평원에 솟아오른 메루산이 수묵화 같은 풍광으로 발걸음을 붙잡았다.

고소증세 극복하고 정상을 밟은 희열

서브 가이드에게 무전이 온다. 바라푸에 가장 늦게 올라온 60대 중반 여성 등산인이 너무 힘들어 보인다는 내용이다. 곧이어 70대 등산인이 포기 의사를 밝히고, 이어 50대 남자, 여성 등산인도 하산을 결정한다. 이렇게 한 명 한 명 포기하고 일행 23명 중 17명만이 분화구 능선인 스텔라포인트(Stella Point·5756m)에 올랐다. 13년 전과 달리 눈이 두텁게 쌓인 능선길을 따라 최정상 우후루(Uhuru) 피크에 올라선 것은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 지 8시간이 지난 오전 7시 전후. 희뿌연 안개 탓에 보이는 것이라곤 아프리카 최고봉 정상을 상징하는 안내판밖에 없지만 저마다 세상을 통째로 얻은 듯 가슴 벅찬 표정이다.

아프리카 대륙 최고봉 정상을 오른 감동은 실제 경험해 보면 엄청나다. 이렇게 높은 고봉 등정이 처음인 아마추어 등산인이 대부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설과 영화 속에서만 보던 킬리만자로를 ‘정복’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은 ‘모든 것을 상실한 고독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 소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오른 이들은 정반대다. ‘자유’를 뜻하는 ‘우후루 피크’에서 환한 미소와 함께 적잖은 성취감을 느끼고, 새로운 미래를 향한 힘찬 발걸음을 새로 내딛는다.

급경사 하산길을 내려서는 사이 새벽에 바라푸 캠프에서 출발한 등산인들이 올라온다. 외국 산악인들은 “컨그래추레이션~” 인사말을 건네지만 아프리카 가이드들은 현지말로 축하한다.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no problem’과 같은 희망적인 의미).”

불현듯 ‘어떤 역경을 만나든 인생은 살 만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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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필석 ‘월간 산’ 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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