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어주도(漁舟圖)’. 18세기. 종이에 연한 색. 117.2×70.3㎝. 국립중앙박물관
정선. ‘어주도(漁舟圖)’. 18세기. 종이에 연한 색. 117.2×70.3㎝. 국립중앙박물관

왕권이 교체되고 왕조가 바뀌는 구간은 자연생태계의 하구와 비슷하다. 하구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다. 담수와 해수, 즉 민물과 짠물이 만나면서 물속 환경이 엄청나게 변화하는 곳이 하구다. 민물에 살던 물고기가 짠물을 마셨을 때의 충격과 공포를 상상해 보라. 왕권이 교체되는 시기에 산 사람들의 심정이 딱 민물고기가 바닷물을 만났을 때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하구는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지역이 된다. 물길의 방향에 따라 여러 형태의 습지와 갯벌이 발달하고 환경이 좋으니 온갖 종류의 물고기와 새와 조개와 곤충들이 모래와 갈대숲을 터전 삼아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울 수 있다. 개체 수가 많고 다양할수록 대어도 있기 마련이다. 왕권교체기에 산 사람들은 하구처럼 소용돌이치는 환경에 뛰어들어 전대미문의 사건들을 겪으며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수립했다. 사람도 많으니 사연도 많다. 유독 왕권교체기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이유는 그곳이 문제에 대한 해결 다양성이 풍부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주(周)나라를 창건한 태조 문왕(文王)과 여상(呂尙)의 만남도 그중 하나다.

기도와 감응에 대한 얘기를 다시 해야겠다. 고종이 꿈에 본 부열의 초상화를 그려 축암에서 실제 인물을 찾았다는 얘기는 주간조선 2619호에서 살펴보았다. 문왕 역시 꿈으로 인해 여상을 만났다. 이런 것을 몽복(夢卜)이라고 한다. 꿈에서 예시를 받아 원하던 사람을 찾아냈다는 뜻이다. 몽복은 ‘꿈과 점’이다. 꿈을 꾸고 점을 쳐서 현명한 재상을 만났으니 결과적으로 몽복 자체가 ‘현상(賢相)을 얻는다’는 단어다. 몽복을 불교적 용어로 바꾸면 몽중가피(夢中加被)라고 할 수 있다. 꿈을 통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을 예시받는 것이 몽중가피다. 가피는 불보살이 중생에게 내려주는 은혜나 은총이다. 기독교의 기적과 같다. 몽복과 가피는 꿈이 인간생활에 여전히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로잡을 것은 용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고

문왕이 상나라의 마지막 황제 주제(紂帝)를 무너뜨리기 전이었다. 문왕은 자신을 보좌할 신하를 절실하게 찾고 있었다. 어느 날 문왕이 사냥을 나가기 전에 점을 쳤다. 그런데 점쟁이가 이상한 말을 했다.

“사로잡을 것은 용도 아니고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고 곰도 아닙니다. 사로잡을 것은 패왕을 보좌할 신하일 것입니다.”

사냥을 하러 가는데 짐승이 아닌 사람을 잡는다고? 문왕은 점괘의 해석을 반신반의하며 길을 나섰다. 그가 위수(渭水)라는 물가의 반계(磻溪)를 지날 때였다. 팔십 정도나 되었을까. 한 노인이 바위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는데 물의 표면에서 석 자 정도나 위로 떼어 놓고 있었다. 한마디로 낚시에 마음이 없다는 소리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말을 안 듣는 물고기만 올라와서 물어라.” 노인의 혼잣말은 ‘성탕해망(成湯解網)’에서 탕임금이 새의 그물을 풀어주면서 했던 말의 데자뷔다. 노인의 측은지심이 탕임금 못지않았음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다. 그 모습이 하도 이상해 문왕이 노인 곁으로 다가가 보았더니 낚싯대 끝에 굽은 갈고리가 없었고 미끼도 매달려 있지 않았다.

‘기이한 늙은이가 다 있군.’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서려던 문왕은 문득 점쟁이의 말이 생각나 그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문왕은 그와 몇 마디를 주고받자마자 바로 알아차렸다. 점괘에 나온 사람이 바로 이 노인이라는 것을. 오랜 숙원을 해결한 문왕은 기쁨에 겨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선왕 태공(太公)께서 꿈속에 나타나 ‘성인(聖人)이 주나라에 나타날 때가 되면 주나라는 그로 인해 흥성할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선생이 정녕 그 사람이 맞습니까? 우리 태공께서 선생을 기다린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문왕은 말을 마치자 노인을 ‘태공망(太公望)’이라 부르며 수레를 타고 함께 돌아와 즉시 국사(國師)로 삼았다. 태공망은 ‘태공이 바라던 사람’이란 뜻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귀인이란 표현에 다름 아니다. 태공망은 이름이 여상으로 성은 강(姜)씨다. 그는 원래 산둥성(山東省) 바닷가에 살던 사람인데 상나라의 주제가 폭정을 행하자 이름을 숨기고 숨어 살았다. 강태공은 여상의 이름이지만 그가 낚시하다 문왕에게 발탁되었기 때문에 이후 낚시꾼을 모두 강태공이라고 부른다. 여상은 문왕을 만나기 위해 위수에서 70세에 낚시를 시작해 80세에 만났다. 10년 동안이나 갈고리 없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으니 그가 낚아 올린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세월이었다. 당(唐)의 이태백(李太白)은 ‘양보음(梁甫吟)’이란 시에서 강태공의 10년 기다림의 세월을 ‘삼천육백조(三千六百釣)’라고 표현했다. 365일을 열 번 보낸 10년 동안의 낚시질이라는 뜻이다. 삼천육백조는 기다림 끝에 귀인을 만났으니 몽복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몽복이 왕의 입장에서 현명한 재상을 얻는다는 표현이라면 삼천육백조는 신하의 입장에서 성군(聖君)을 만난다는 표현이다. 엎어치나 메치나 결론은 매한가지다.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정선(鄭敾)이 그린 ‘어주도(漁舟圖)’는 강태공이 반계에서 세월을 낚아 올리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진한 먹과 연한 먹의 농담조절을 통해 바위의 질감을 실감 나게 표현한 작품이다. 그림은 바위에 앉은 강태공을 중심으로 열 십(十) 자를 그어보면 정확하게 사등분된다. 사등분 중 상단은 계곡과 절벽이 좌우로 배치되었고, 하단은 강태공이 앉은 바위와 낚시대가 꽂혀 있는 강물로 나뉜다. 왼쪽 여백으로 남겨진 강물이 바위나 나무 등과 대등한 무게감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동양화에서는 여백이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없음으로 있음을 드러낸다. 물도 보통 물인가. 주나라의 역사가 들어 있는 특별한 물이지 않은가. 저 물이 있어 문왕과 강태공의 스토리가 전개될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 저 물이야말로 아무런 신분증도 제시하지 않은 시골 노인을 강태공으로 드러낸 증거이기 때문이다.

정선의 ‘어주도’ 주인공은 생계를 위해 낚시를 하는 진어옹(眞漁翁)이 아니다. 가어옹(假漁翁)이다. 가어옹은 생계형 어부와 달리 강호 생활의 방편으로 낚싯대를 드리운다. 그의 복장이 조선시대 유가(儒家)들의 평상복인 심의(深衣)인 것만 봐도 그가 어부인 체하는 가짜 어부임을 알 수 있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니 악착같이 낚시에 매달릴 필요도 없다. 하물며 고기 담는 바구니가 있을 리 만무하다. 조선시대에는 낚시하며 자연에서 은거하다 때가 되면 정계에 진출하거나 복귀하기를 기다리는 은일자(隱逸者)가 의외로 많았다. 당파싸움으로 억울하게 정계에서 밀려난 사람도 낚시하며 정계복귀를 꿈꾸었다. 뇌물을 지나치게 많이 먹어 들통난 사람도 낚싯대를 잡고 앉아 사람들의 기억이 희미해지기를 기다렸다. 낚시꾼들이 ‘자연을 벗 삼아 초야에 묻혀 사는 즐거움은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으리…’ 어쩌고 하는 시를 지었다 해서 그의 마음이 진짜 초야에 묻혔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말이 그렇다는 뜻이지 실제로 벼슬을 포기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궁궐로 향하는 길 쪽에서 눈을 뗀 적이 없었다. 행여 나를 추대하기 위해 궁궐에서 온 사람이 없을까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가어옹들의 낚시질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웬만한 사대부 집안에는 강태공을 흉내 낸 어부도(漁夫圖)나 조어도(釣魚圖)를 한두 점 정도 소장하고 있었던 것만 봐도 낚시질의 유행현상을 진단할 수 있다. 사실 정선의 ‘어주도’의 주인공이 정확히 강태공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정선이 ‘어주도’를 그릴 때만 해도 낚시하고 있는 인물이 곧 강태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를 강태공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설사 그가 강태공이 아니라 해도 상관없다. 강태공과 비슷한 콘셉트로 낚시질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강태공 학파의 지회에 소속된 인물로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작품 제목도 수정했으면 한다. 전국 박물관의 유물을 검색할 수 있는 사이버 박물관 ‘이뮤지엄’에는 이 작품의 제목이 ‘어주도’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고기잡이배가 보이지 않으니 ‘어부도’나 ‘조어도’로 바꾸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우리는 현재 낚시하는 사람을 일괄적으로 뭉뚱그려 강태공이라고 부른다. 꼭 강씨가 아닌 ‘이모씨’ ‘김모씨’ ‘박모씨’도 모두 강태공이 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살짝 걱정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 많은 낚시꾼 중에서 어떻게 하면 진짜 강태공을 찾아낼 것인가. 물론 아무런 표식이 없어도 유명한 사람은 알아주게 되어 있다. 진짜 유명한 맛집은 간판이 없어도 어떻게들 알고 찾아가듯이 말이다. 낚시꾼을 그린 그림도 보는 순간 바로 강태공임을 알 수 있다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작자미상. ‘화조고사도(花鳥故事圖) 8폭병풍’ 중 ‘강태공’. 종이에 연한 색. 국립민속박물관
작자미상. ‘화조고사도(花鳥故事圖) 8폭병풍’ 중 ‘강태공’. 종이에 연한 색. 국립민속박물관

때가 되면 나아가 뜻을 펼친다

이런 생각을 했던 자상한 조선시대 화가가 있었다. 민화 ‘화조고사도(花鳥故事圖) 8폭병풍’에 들어 있는 ‘강태공’의 화가가 그렇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무명의 화가는 정선의 ‘어주도’가 점잖은 가어옹을 그린 점에서는 성공했지만 강태공의 정체성을 드러낸 데는 실패했다고 단언했다. 그래서 문왕과 강태공이 위수에서 만난 스토리를 구체적으로 채워 넣었다. 화면은 중간의 산을 경계로 상하로 나뉜다. 하단에는 버드나무 아래 앉아 낚시하는 강태공이 그려졌다. 강태공이 드리운 낚싯줄을 따라 강물을 들여다보면 씨알 굵은 물고기들이 여러 마리 보인다. 잡기만 하면 월척이라고 소리쳐도 좋을 만큼 큰 물고기들이다. 그런데 물고기들은 강태공의 낚싯줄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인다. 미끼가 물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그림의 진짜 매력은 상단의 문왕 일행에 있다. 문왕은 붉은 옷을 입고 홀을 든 채, 의장기를 든 신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다. 그는 지금 뜻밖에 발견한 강태공을 보고 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차 주나라를 세울 두 거인의 만남이 임박했는데 강태공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으니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은 애가 탄다. 생각 같아서는 강태공을 소리쳐 불러 뒤를 돌아보라고 하고 싶다. 이런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는 것이 화가의 능력이다. 그림을 잘 그렸다는 말이 아니다. 인물에 비해 배경으로 깔린 산수는 우스울 정도로 작다. 화가는 이 장소가 위수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지 비례나 예술성 같은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감상자도 마찬가지다. 일단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되는 것이 먼저이지 고급스러운 치장은 관심 밖이다. 예술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 그것만이 민화가 추구하는 세계다.

강태공이 단순한 낚시꾼이기를 거부한 이유

그렇다면 민화 작가는 왜 이렇게 강태공의 신분을 드러내는 데 집착했을까. 낚시꾼이라고 전부 다 같은 낚시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강태공의 출사(出仕)의 의미를 지적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가 인생을 정리해야 할 늦은 나이에 ‘삼천육백조’를 감수하면서까지 문왕을 기다렸던 것은 벼슬에 대한 욕심이 과해서가 아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다. 그의 사명감을, 한번 권력에 맛을 들이면 어떻게든지 그 자리를 지키거나 되찾고자 하는 추한 정치인들의 노욕과 혼동하지 말라. 화가는 그렇게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화가의 강변이 아니더라도 강태공은 상나라의 폭정에서 백성들을 구하고자 눈에 불을 켜고 주군을 찾고 있었다. 명(明)나라 팽대익(彭大翼)이 지은 유서(類書)인 ‘산당사고(山堂肆考)’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강태공이 반계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옥조각(玉璜)을 건져 올렸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희씨(姬氏·문왕)가 천명을 받고 여씨가 보좌한다.’ 강태공과 문왕의 만남이 하늘의 뜻이었다는 내용이다. 명나라 허중림(許仲琳)이 지은 장편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에서는 강태공이 아예 원시천존의 명을 받고 주나라를 구하기 위해 하산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원시천존은 도교의 최고신이다.

아무튼 강태공에게는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강한 사명감이 있었기에 문왕을 만나기 전에 이미 새 나라를 건국할 준비를 끝냈다. 그는 낚시꾼이라는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그렇지 알고 보면 용병술과 병법에 조예가 깊었다. 문왕과 무왕이 주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강태공의 권모와 계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경’의 ‘대아’ 대명(大明)에는 “태사인 태공망이 마치 송골매가 날듯 무왕을 도와 상나라를 정벌하니, 싸움에 나간 그 아침은 맑고 밝았네”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공망이 송골매가 날아가듯 상나라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병법(兵法)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터득한 병법을 정리해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지었다. ‘태공병법’은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장수라면 누구든 탐독하는 필독서였다. 한(漢)나라의 장량(張良)이 항우에게 밀리던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하게 만든 비결도 그가 황석공(黃石公)에게 얻은 ‘태공병법’ 덕분이었다. 이 내용은 다음 기회에 살펴보겠다. 강태공의 병법은 워낙 유명해서 신화적으로 각색되어 전해지기도 한다. 한나라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의 ‘여상’ 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여상은 200년이 지나 죽었는데, 어려움이 있어 장사를 치르지 못하였다. 그 뒤 그의 아들 여급(呂及)이 장례를 치르려고 관을 열어보니, 시체는 없고 ‘옥검(玉鈐)’ 6편만 있었다.” ‘옥검’은 강태공이 쓴 병서이다.

강태공처럼 되고 싶은 사람은

우리는 매일 꿈을 꾼다. 그러나 꿈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꿈이 아니다. 꿈은 절실한 기도가 이어져 무의식 상태까지 연장되는 현상이다. 꿈은 이루어져야 의미가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꿈을 실천하려는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 뒷받침이 없이 그저 잠들 때마다 꾸는 꿈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은 물에 빠진 달을 잡으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꿈은 개꿈에 불과하다.

강태공의 인기가 대대손손 식을 줄 모르고 인구에 회자되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그의 이야기는 그림과 시와 판소리와 연극에 단골메뉴로 등장했다. 그 이유가 단지 고목에 꽃이 피듯 늦은 나이에 발탁되어 재주를 펼쳤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강태공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70년이란 세월을 준비했다. 그 내공이 일을 시작하자 발휘된 것이다. 문왕의 아들 무왕은 상나라를 평정한 뒤 강태공을 제(齊)나라의 영구(營丘)에 봉했다. 오늘날 산둥반도 일대가 과거의 제나라 땅이다. 제나라는 한반도 쪽으로 뿔처럼 튀어나와 있어 영토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형세다. 국세의 강약에 따라 확장될 때도 있고 축소될 때도 있었지만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물론 제나라가 처음부터 부유했던 것은 아니다. 강태공이 부임했을 때 그곳 땅은 소금기 많고 백성들이 적은 궁벽한 오지였다. 거저 줘도 받지 않을 봉토였다. 그런 곳을 강태공은 가장 잘살고 호화롭고 개방적인 나라로 바꿔놓았다. 부녀자들에게 길쌈을 장려하여 기술을 높였고 전국 각지로 생선과 소금을 유통시켜 사람들이 몰려들게 했다. 결국 너무 사치스럽게 살다가 진시황에게 무너지긴 했지만 그것은 강태공 때가 아니라 한참 후대의 일이다.

이렇게 강태공처럼 철저하게 준비된 사람이라면 늙어서도 정계 진출을 고려해볼 만하다. 반대로 그 정도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냥 하던 낚시질이나 계속하는 것이 낫다. 괜히 정치판에 기웃거리다 물고기도 못 잡고 물만 흐리다 내려오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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