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9월 8일 자 황성신문. ‘여권통문’에 대한 기사를 ‘별보’로 실었다.
1898년 9월 8일 자 황성신문. ‘여권통문’에 대한 기사를 ‘별보’로 실었다.

매달 달력을 보면 온갖 기념일이 다 있다. 흙의 날, 수산인의 날, 자전거의 날, 희귀질환 극복의 날, 노인학대 예방의 날 등 다양하다. 국경일과 별도로 국가적으로 기념하는 법정기념일이다. 여기에 올해는 하나가 더 추가됐다. 9월 1일 ‘여권통문(通文)의 날’이다. ‘여권통문’이 선언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9월 1일을 여권통문의 날로 지정하자는 ‘양성평등기본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2019년 10월 국회를 통과하면서 법정기념일로 제정됐다.

‘여권통문’은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의 두 여성인 김소사, 이소사의 이름으로 발표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문으로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외침이었다. 여기서 소사는 기혼여성들을 지칭한 말이다. 이름도 없이 ‘소사’로 통칭되던 시절이었으니 인습의 벽을 깨고 나온 ‘여권통문’은 세상을 발칵 뒤집을 만한 일이었다.

1898년 9월 8일 자 황성신문은 논설 대신 이례적으로 ‘별보(別報)’를 실었다. ‘하도 놀랍고 신기한 일’이라는 설명과 함께 ‘여권통문’을 소개하고 글의 전문을 실었다. 그 글(현대어판)의 일부이다.

‘구습은 영영 버리고 각각 개명한 신식을 좇아 행할세 사사이 취서되어 일신우일신함은 영영한 소아라도 저마다 아는 바이어늘 어찌하여 우리 여인들은 일양 귀먹고 눈 어두운 병신 모양으로 구규(舊閨)만 지키고 있는지 모를 일이로다. 혹자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여 병신 모양 사나히의 벌어주는 것만 먹고 평생을 심규에 처하여 그 절제만 받으리오. (중략) 우리도 혁구종신하여 타국과 같이 여학교를 설립하고 각각 여아들을 보내어 재주와 규칙과 행세하는 도리를 배워 장차 남녀가 일반 사람이 되게 할 차 여학교를 설립하오니 유지한 우리 동포 형제 여러 부녀 중 영웅호걸님네들은 각각 분발한 마음을 내어 우리 학교 회원에 가입하라고 하면 즉시 서명하시기를 바라옵나이다. -대한 광무 2년 9월 1일 통문고표인(通文告表人) 이소사, 김소사.’

여성도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교육권, 경제활동은 독립된 인격의 확립이라는 직업권, 변화하는 시대에 여성들도 개화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참정권이 주된 내용이었다. 여권통문의 원래 명칭은 ‘여학교설시통문(여학교통문)’이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권통문’은 특히 여성들이 직업을 통한 사회진출과 경제적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촌의 양반 여성들을 중심으로 발표된 ‘여권통문’은 당시 서울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황성신문뿐 아니라 독립신문 9월 9일 자에도 전문이 발표되고 정부에 여성교육비 편성을 요구하기도 했다.

‘여권통문’은 서민, 기생 할 것 없이 호응을 받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로 이어졌다. 찬양회는 고종에게 여학교 설립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실제 고종의 찬성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유림의 반대 등 현실적 여건은 만만치 않았다. 차일피일 설립이 미뤄지자 찬양회는 1899년 2월 회비를 기금으로 해 소학교 과정인 순성학교를 개교했다.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학교보다는 늦었지만 우리나라 여성들의 손으로 만든 최초의 여학교였다.

<strong></div>01</strong> 최구자 ‘자연-공존(Nature-Coexistence)’. 2016<br/><strong>02</strong> 원문자 ‘사유공간’. 한지에 채색. 2018<br/><strong>03</strong> 유명애 ‘5월’. 수채. 2019
01 최구자 ‘자연-공존(Nature-Coexistence)’. 2016
02 원문자 ‘사유공간’. 한지에 채색. 2018
03 유명애 ‘5월’. 수채. 2019

서울 승동에 세워진 순성학교는 결국 관립학교로 전환되지 못하고 재정적인 문제로 2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여학교 운영을 이어가진 못했어도 그들의 외침은 유교적 가부장제에 갇혀 있던 여성들을 깨웠다. 1908년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고 외치며 뉴욕의 루트커스광장으로 몰려나왔던 때보다 10년 앞선 일이다. 이날을 기념해 만든 ‘여성의 날’(3월 8일)보다 우리에게는 ‘여권통문의 날’이 훨씬 의미 있다. 그들의 유산은 현재도 유효하다.

첫 번째 ‘여권통문의 날’ 법정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해 여류작가들의 전시회가 열린다. 90대부터 50대까지 52명의 여류작가들이 122년 전 여성들의 당당한 목소리에 그림으로 화답하고 나섰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토포하우스’의 오현금 대표도 팔을 걷어붙였다. 갤러리 한 층을 9월 2~14일까지 2주일간 비우고 이들을 불러 모았다. 여류작가들은 시대에 앞서 ‘여권통문’의 정신을 실천했던 이들이다. 1세대 여류작가인 이경순(93) 작가는 1950년 이화여대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1953년 2회 국전부터 작품을 출품해왔고 여성 첫 추천작가로도 활동했다. 지난해에도 전시를 여는 등 평생 현역으로 살아온 이경순 작가는 모녀 작가로도 유명하다. 엄마의 작업을 보고 자란 딸도 화가가 됐다. 시멘트를 재료로 사용하는 조기주 작가이다. 이번 전시에도 모녀가 나란히 참가했다. 이경순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의 딸을 그린 작품 ‘기주’를 선보인다.

이 밖에도 프랑스 국립미술원 회원인 최구자(79), 국전 대통령상(1976)을 받고 파리의 살롱 도톤느에 참여하는 등 한국화를 추상회화로 표현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원문자(78), 미국 유학 1세대로 이화여대 명예교수인 곽연(77), 수채화 대표 작가인 유명애(75) 등 화단을 이끌어온 대표 여성 작가들이 ‘여권통문’의 뜻을 함께했다.

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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