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41년이 되는 날이다. 이만한 시간이 흘렀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논쟁적이다. 아예 평가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다. 이는 그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방증이다. 왜 그가 아직도 영면에 들지 못하고 있을까.

그동안 보수는 갱신을 외면한 채 오로지 박 전 대통령에게 의지하여, 무조건 권력을 연장하려고만 했다. 이런 천박함이 오늘날 그들을 까마득한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현재 집권 중인 진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사상의 진화를 멈춘 채 오로지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공격하는 데서 존재 이유를 찾고 있다. 지금도 적폐청산, 반일 캠페인 등에 힘을 쏟는다.

현 집권세력의 중추는 386(현재는 586) 주사파다. 말 그대로 주체사상을 통해 민족해방을 달성하는 것이 한때 그들의 비전이었다. 아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그 이후로 어떤 사상적 성찰을 거쳐, 지금은 무슨 생각과 비전을 가지고 국가를 이끌고 있느냐다. 이것은 전향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성찰이다. 그런 진지한 성찰의 결과를 공표한 386은 적어도 정치인 중에는 없다. 그저 민주화 인사로 행세를 할 뿐이다.

이런 척박한 풍토 속에서도 도도한 시대 변화에 맞춰 자신의 사상을 새롭게 갱신하려는 어느 386의 진지한 몸부림이 눈길을 끈다. 바로 김대호의 ‘한 386의 사상혁명’(2004)이다. 부제는 ‘신(新)전환시대의 논리’다. 이는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에 빗댄 것이다. 저자는 1982년에 대학에 들어갔다가 무기정학을 당하고 징역, 공장생활 등을 겪은 전형적인 386이다. 졸업 후에도 오랫동안 구로지역 노동현장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1990년대 중반 김우중 회장은 대우그룹에 운동권 출신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그때 저자는 대우자동차에 들어가 동유럽, 남미 등을 돌아보고 경영 일선에서 땀을 흘렸다. 하지만 곧 외환위기로 대우 해체 과정을 현장에서 경험했다. 당시 대우 처리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목격하고 ‘대우자동차 하나 못 살리는 나라’(2001)라는 보고서를 펴내기도 했다. 이어서 지난 20년을 돌아보며 자신의 사상적 지향을 새롭게 가다듬어 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386의 민주화 노력, 사회적 연대 존중, 자기희생 정신 등을 높이 평가한다. 문제는 시대착오성이다. 즉 세계가 빠르게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386은 1980년대 식의 사회 인식에 머물러 있다. 만약 이런 시대착오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386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한강의 기적에 도취되어 자신의 천민성을 제대로 성찰하지 못하는 수구보수와 다를 바가 없다.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386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미국 제국주의, 중국 및 북한 사회주의, 정권의 예속성 및 자본 편향성, 오욕과 굴절의 한국사 등을 제대로 이해하여,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반공보수적 우상을 깨려고 했다. 그의 주장은 일정 정도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강렬한 대결적 자세로 인해 기본적으로 도그마적 성격이 강했다.

저자는 그것을 충실히 계승한 운동권적 세계관도 마찬가지라고 진단한다. “자유시장 경제와 미국에 대해 지나치게 불신하고 그 그늘만 보았고, 국가계획에 대해서는 과신하고, 인간의 뿌리 깊은 반사회적인 기회주의 속성을 기존 사회주의나 복지국가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반자본주의, 반자유주의, 반미주의, 반독점주의 등의 테제는 오늘날 거의 유효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86이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면서 ‘전환시대의 논리’나 운동권적 세계관은 시대의 변화를 외면한 채 과거에 갇혀 버렸다. 실제로 저자도 회사원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실물 경험이 따로 놀고 있다는 점을 통감했다. 문명사적 전환기에는 무엇보다 과학성, 즉 ‘바른 앎’이 중요하다. 그런데도 386은 여전히 ‘전환시대의 논리’나 1980년대 저항담론에 갇혀 ‘바른 앎’을 외면하고 편협한 당파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날은 첨단 기술의 발달로 인해 시간과 거리의 장벽이 사라지고 정보 탐색 비용이 획기적으로 낮아진 정보화·지식화 시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불가피하게 닥쳐온 문명사적 물결이다. 그런데도 상당수 386은 그것이 오로지 미국과 초국적 자본의 인위적 음모라고 강변한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시대착오적 아집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한국은 일찍이 외국 자본, 외국 기술을 활용한 수출주도 정책으로 성공한 나라다. 어느 나라보다 자유무역과 세계화로부터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경험이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는 빈부격차 등 부작용도 크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완충방법을 찾아야 한다. 만약 그런 부작용을 이유로 통째로 외면하면 우리는 물질적, 문화적 발전 기회 자체를 잃게 된다.

미국은 386에게 ‘만악의 근원’이다. 특히 미국은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만 좇는다고 비난받는다. 그러나 이익을 좇지 않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우리의 이익과 어떻게 조응하느냐가 문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통해 미국은 막대한 이익을 본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커다란 혜택을 보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우리가 유연하게 활용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또한 저자는 자동차회사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재벌경제 및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는다. 자동차는 부품부터 완성차까지 무수한 가치사슬이 연결된 산업이다. 하지만 그중 일부인 완성차 회사 및 그 노동자들이 이익을 과도하게 차지한다. 따라서 자본 대 노동의 관계뿐만 아니라, 가치사슬 간의 공정한 관계 설정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역설한다.

‘전환시대의 논리’나 운동권적 세계관은 오늘날 새로운 세계사적 조류에 적합하지 않다. 저자가 보기에 이제 그것들은 ‘구(舊)전환시대의 논리’가 되었다. 따라서 진보에는 민주화, 연대, 희생정신 등의 가치는 살리되 시대 변화를 있는 그대로 수용, 활용하는 새로운 논리가 필요하다. 그것이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신전환시대의 논리’라고 부른 이유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진보 전반에서 그런 새로운 움직임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 최근에는 도리어 반대로 가고 있지 않나 싶다. 현 집권세력은 적폐청산, 반일 캠페인, 친중반미, 북한 감싸기 등 운동권적 세계관을 더욱 뚜렷이 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보수도 우상을 앞세우는 수구세력이 여전히 득세하고 있다. 서로가 적대적 공생을 은근히 향유하고 있다.

저자는 진보가 사회적 연대 등의 가치를 살리며 시대착오성을 극복한다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저자는 진보에 대한 소망을 접고 이 책을 낸 지 거의 20년이 흐른 지난 총선에서 보수 야당 후보로 출마했다. 아쉽게도 혼탁한 선거 와중에 엉뚱한 설화(舌禍)로 그만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이런 사람들의 공간이 도리어 자꾸 줄어들고 있다.

거의 20년 전에 이처럼 치열한 사상적 성찰을 모색한 전형적인 386 인사가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 우상을 앞세운 적대적·소모적 충돌은 여전하다. 그런 과오는 보수나 진보나 똑같다. 저자의 염원대로 우상을 파괴하고 논리와 합리성으로 경쟁하는 세상을 고대해 본다. 그것이 박정희 시대를 넘어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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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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