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미상. ‘맹모삼천도(孟母三遷圖)’. 종이에 채색. 112.4×52.4㎝. 국립중앙박물관
필자미상. ‘맹모삼천도(孟母三遷圖)’. 종이에 채색. 112.4×52.4㎝. 국립중앙박물관

얼마 전 한 산모가 중고물품 애플리케이션 마켓에 올린 글이 논란을 불렀다. 36주 된 아이를 20만원에 입양 보내고 싶다는 글이었다. 그녀는 글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아이의 사진 2장도 첨부했다. 글과 사진을 보면서 사람들은 말이 입양이지 돈을 받고 아이를 팔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고 해석했다. 이 사건을 취재한 기자는 ‘해당 게시물이 이용자들의 공분을 샀고, 캡처 사진이 도내 온라인 커뮤니티와 맘카페 등으로 퍼지며 삽시간에 화제가 됐다’고 덧붙였다. 문제가 되자 경찰은 그녀의 IP를 추적한 끝에 여성과 아이의 소재를 파악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를 상대로 ‘어떤 목적으로 게시물을 올렸는지 조사하고, 법 위반 사실이 있다면 처벌을 위한 법률 적용도 검토한다’는 계획을 밝혔다고 전한다.

그 기사를 보면서 필자는 사람들과 경찰의 반응이 선후가 뒤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낳은 지 36주밖에 되지 않은 산모가 도대체 어떤 상황에 처했으면 자신의 핏덩이를 입양 보낼 생각을 했을까에 대한 사태 파악이 먼저라는 얘기다. 공분을 하고 위법 행위를 조사하는 것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다. 그리고 도대체 누가, 무슨 자격으로 막다른 골목에 선 그녀를 향해 공분할 수 있으며, 경찰은 무슨 명목으로 그녀를 처벌하겠다는 것인가. 자식을 책임져야 할 엄마가 감히 그 의무를 저버렸다고 해서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겨우 20만원이라는 헐값에 아이를 넘기겠다고 해서 아동매매 미수 혐의로 처벌하겠다는 것인가?

이 모든 사태의 밑바탕에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려는 오래된 관습이 깔려 있다. 또한 여자는 정숙해야 한다는 오래된 정절 관념이 뿌리박혀 있다. 누구든지 아이를 낳아 당당하게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대신 육아를 오로지 여성에게만 강요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서 손가락질하며 훈수나 두겠다는 식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아기 돌보는 일 같은 귀찮고 힘든 일은 하기 싫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성을 핑계로 육아를 엄마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이유다. 한 명의 생명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 가족과 이웃, 지역사회와 국가가 전부 나서서 도와줘야 한다. 더구나 미혼모에게는 더더욱 도움이 절실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미혼모는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사회적 편견과 손가락질까지 감내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좋은 출산지원정책과 출산장려정책이 있어도 백약이 무효다. 아이 엄마를 도와주지 않고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출산율은 곤두박질치다 못해 박살이 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의 저변에는 여성을 단지 자식 기르고 남편 내조하는 존재로만 규정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현모양처 이데올로기 중에서 맹자(孟子·BC 371경~BC 289경)의 어머니는 자식 교육의 일인자로 정평이 나 있다.

맹모삼천지교의 전설

맹자라는 인물을 언급할 때면 맹자의 업적보다 그 어머니가 먼저 떠오르게 된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란 단어와 함께 말이다. ‘맹모삼천’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준말이다. 맹자의 어머니인 맹모가 자식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겼다는 뜻이다. 맹자는 이름이 가(軻)로 산둥성 추현(鄒縣) 출신이다. 추현은 공자가 태어난 곡부(曲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맹자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 손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맹모는 자식 교육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다. 그녀의 이야기는 한(漢)나라 때 유향(劉向·BC 77~BC 6)이 쓴 ‘열녀전(列女傳)’의 ‘모의전(母儀傳)’에 ‘맹자의 어머니(鄒孟軻母)’라는 제목으로 처음 등장한다. ‘모의전’ 자체가 어머니의 전범이 될 만한 여성들의 전기를 기록했다. 맹모가 자식 교육에 ‘올인’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처음에는 집이 묘지 근처에 있었다. 맹자가 어려서 즐기는 놀이란 묘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죽음을 슬퍼하며 발을 구르는 의식과 시체를 매장하는 일을 흉내 냈다. 맹모는 ‘여기는 우리 자식이 있을 만한 곳이 못 되는구나’ 하고는 시장 근처로 이사를 갔다. 그랬더니 거기에서 맹자는 물건 파는 상인들의 일을 흉내 내며 놀았다. 맹모는 ‘이곳 역시 우리 자식을 키울 만한 곳이 못 된다’고 하고서 학교 근처로 다시 이사 갔다. 그곳에서 맹자는 제기(祭器)를 배열하고 예를 갖추어 나아가고 물러나는 의식을 흉내 내며 놀았다. 맹모는 ‘여기야말로 우리 아들을 키울 만한 곳이구나’ 하고 그곳에 눌러살았다. 맹자는 성장하여 군자가 갖춰야 할 육예(六藝)를 익혀 마침내 대학자의 영예를 얻었다.”

필자 미상의 ‘맹모삼천도(孟母三遷圖)’는 맹모가 맹자를 위해 이사 가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 속의 이사 장면이 첫 번째 이사인지 혹은 두 번째 이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림은 나무가 뻗어 나온 가파른 절벽을 배경으로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중앙에는 어린 맹자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서 있다. 향좌측에는 맹자의 어머니가 왼손으로 아들의 손을 잡고 오른손에는 베틀 바디를 들고 있다. 맹자와 맹모는 향우측의 노파를 바라보는데 그녀의 신분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노파가 어깨에 멘 짐꾸러미에 맹자의 책과 맹모의 베틀 재료가 담겨 있어서 짐꾼으로 추정된다. 좌측 상단에는 ‘삼천지교’라는 제목이 적혀 있는데 글자의 윗부분이 지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는 ‘맹모삼천지교’라고 적혀 있었을 것이다.

‘맹모삼천도’는 필자가 아는 한 현존하는 맹자 그림 중 유일한 작품이다. 처음에 이 작품을 봤을 때는 중국 그림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맹모삼천도’의 모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을 중국 왕충려(王充閭)의 책 ‘국수(国粹)-인문전승서(人文傳承書)’(북경대학출판사·2017)에서 찾아 비교한 결과 조선 그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왕충려의 책에서는 ‘맹모택린(孟母擇隣)’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그 책의 그림 역시 과거의 그림을 모본으로 그렸을 것이다. ‘맹모택린’은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이웃을 선택했다는 뜻이니 맹모삼천과 같은 말이다.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중국 그림은 배경 없이 인물만 그린 것이 특징이다. ‘맹모삼천도’에 등장하는 검은 강아지는 조선 그림의 특징이다. 김홍도의 ‘새참’에서도 들밥을 먹는 사람들 곁에 강아지가 보인다.

맹자는 전국시대가 끝나갈 무렵에 활동했던 철학자다. 장자보다는 조금 나이가 많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다. 맹자와 장자는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존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노선이 달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서로의 존재를 몰랐을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아무튼 맹자는 공자의 유학을 계승 발전시켜 공자 다음가는 아성(亞聖)으로 불린다. 그는 공자와 사성(四聖), 십철(十哲), 송조(宋朝) 육현(六賢)의 위패를 봉안한 성균관 대성전에 사성으로 배향되었다. 사성은 유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공자의 제자들, 즉 안회, 증자, 자사, 맹자를 일컫는다. 안회와 증자는 공자의 수제자들이고 자사는 공자의 손자다. 맹자는 자사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소수서원에 봉안된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와 유학자 83명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거기에도 역시 맹자는 공자 바로 아래에 안회, 증자, 자사 등과 함께 배치되어 있다. 유가에서는 유학의 도통이 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맹자-주자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맹자는 요순으로부터 시작된 도통을 정립해 후대로 전해준 사람으로 축구에서 보면 경기장 중앙에서 플레이하는 ‘미드필더’라 할 수 있다.

맹자의 인생역정은 공자를 많이 닮았다. 그 또한 공자처럼 여러 나라를 주유하며 왕도(王道)정치를 유세했지만 패도(覇道)정치를 지향하던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맹자에 따르면 “무력으로 인(仁)을 표방하는 것이 패도이고, 덕으로 인을 행하는 것이 왕도”라고 했다. 그가 살던 전국시대 말기는 인을 가장한 패도가 난무했다. 무력으로 이웃 나라를 정복해 더 넓은 영토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제후들에게 맹자의 왕도정치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였을 뿐이다. 더구나 맹자는, 왕이 부덕하여 민심을 잃으면 다른 사람이 새로운 왕조를 세워도 좋다는 역성혁명을 주장했으니 제후들의 환영을 받을 리 만무했다. 조선에서 맹자의 성선설이나 사단론은 인용하면서도 맹자와 관련된 그림을 제작하지 않은 이유도 그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한다. 이 글에서 맹자의 사상 대신 맹모의 자식 교육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림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맹모삼천지교’는 ‘맹모택린’ 외에도 ‘맹모교자(孟母敎子)’ ‘맹모지교(孟母之敎)’ ‘삼천지교(三遷之敎)’ 등등의 용어로 불린다. 그런데 맹자와 관련해 제작된 그림은 ‘맹모삼천지교’ 외에도 또 한 점이 있다. 그 그림 역시 맹모의 교육과 관련되어 있다.

구영(仇英). ‘추맹가모(鄒孟軻母)’. ‘열녀전(列女傳)’에 수록
구영(仇英). ‘추맹가모(鄒孟軻母)’. ‘열녀전(列女傳)’에 수록

맹자가 학업을 중단하자 짜던 베를 잘라버린 맹모

유향의 ‘열녀전’에는 ‘맹모삼천지교’ 외에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 맹자가 젊은 시절에 집을 떠나 다른 곳에 가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배움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베를 짜고 있던 맹모가 물었다. “학문은 다 끝마쳤느냐?” 맹자는 “아직 마치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들의 말을 들은 맹모는 고생해서 짜고 있던 베를 칼로 잘라버렸다. 깜짝 놀란 맹자가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맹모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네가 학문을 그만둔 것은 바로 내가 이 베를 중간에서 잘라버린 것과 다를 바 없다. 군자란 배워서 바른 이름을 세우고, 물어서 지식을 넓혀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편안하고 또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피해를 멀리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학문을 그만둔다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고 환란에서 떨어질 수 없다. 베 짜는 일을 그만둔다면 어찌 남편과 자식을 입히고 오래도록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느냐? 여자가 생업을 포기하고, 남자가 덕 닦기를 게을리한다면, 도둑이 되지 않으면 남의 심부름을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맹자는 아침저녁으로 학문에 매진해 천하에서 이름난 학자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맹모가 베를 잘랐다고 해서 ‘맹모단기(孟母斷機)’ 또는 ‘단기지계(斷機之戒)’ ‘단기지교(斷機之敎)’ 등으로 부른다.

명나라의 화가 구영(仇英·1494~ 1552)이 그린 ‘추맹가모(鄒孟軻母)’는 유향의 ‘열녀전’ 중 ‘모의전’에 들어 있는 ‘맹모단기’의 삽화다. ‘추맹가모’가 ‘추나라 맹가의 어머니’라는 뜻이니 역시 맹모의 교훈이 주된 내용이다. 그림 속에서 맹모는 손을 높이 쳐든 채 아들을 보고 있다. 맹모 옆에는 방금 전까지 그녀가 고생해서 베를 짠 베틀이 놓여 있는데 금세라도 손에 든 칼을 내려칠 기세다.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이까짓 베는 수십 벌이라도 다시 짤 수 있다. 그러나 배움은 때를 놓치면 그만이다. 그녀의 자세 속에는 그런 단호함이 서려 있다. 맹자는 그런 어머니의 기세에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이다. ‘추맹가모’는 비록 명나라의 구영이 그린 삽화지만 ‘열녀전’ 자체가 조선시대에 여성의 수신서로 가장 많이 보급되었던 사실을 생각하면 그 영향이 매우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맹모단기도’는 유향의 ‘열녀전’에 삽화로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출처는 유향보다 앞선 시기에 살았던 한영(韓嬰·?~BC 158)의 ‘한시외전(韓詩外傳)’에서 가져왔다. 다만 유향의 ‘열녀전’에는 삽화라는 시각이미지를 넣어 독자들의 이해를 높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한시외전’에는 ‘맹모단기’는 들어 있지만 ‘맹모삼천지교’는 들어 있지 않다. 대신 돼지고기와 관련된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맹자가 어렸을 때였다. 이웃집에서 돼지를 잡았다. 이것을 본 맹자가 어머니에게 여쭈었다. “동쪽집에서 돼지를 잡던데 무엇에 쓰려는 것입니까?” 맹모는 무심결에 이렇게 말했다. “너에게 주려는 것이지.” 그 말을 내뱉은 맹모는 아차 싶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한 자신이 후회스러웠지만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가졌을 때 바른 자리가 아니면 앉지 않았고, 바르게 썰지 않은 것은 먹지도 않으면서 태교를 하였다. 그런데 지금 번연히 알면서도 너를 속였으니 이는 불신을 가르친 셈이 되었구나.”

그러면서 이웃집 돼지를 사다가 먹여 주었다. 이것은 속이지 않았음을 밝힌 셈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맹자의 에피소드에는 맹자 대신 맹자 어머니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맹모가 주인공으로 설정된 이유는 간단하다. 여성의 태교와 육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맹자가 아성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맹자가 잘나서가 아니라 ‘맹모삼천지교’와 ‘맹모단기지교’와 같은 교육의 결과라는 뜻이다. 그러니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모든 여성은 맹모 따라하기를 실천하라는 것이 ‘열녀전’ 출판의 배경이다.

열녀 이데올로기에 피멍이 든 여성들

‘열녀전’의 보급을 통해 ‘맹모삼천지교’와 ‘맹모단기지교’를 실천하게 만들려는 ‘현명한 어머니 되기 프로젝트’는 조선시대를 풍미했다. 원래 ‘열녀전’의 ‘열녀(列女)’는 ‘많은 여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가부장제가 심화하는 과정 속에서 ‘열녀(列女)’는 정절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열녀(烈女)’로 축소되었다. 정절은 신분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반상의 구분과 같이 가부장제적인 양반 지배층의 논리 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다. 천한 사람은 귀한 사람의 지배를 받고, 여자는 남편에게 종속되어야 가부장제적인 질서는 흔들림이 없다.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를 비롯한 행실도류의 서적은 모두 반상과 존비의 구별을 세뇌시키기 위한 대표적인 수신서였다. 행실도류의 책이 일반 남녀 백성들을 대상으로 했다면 ‘열녀전’은 여성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문제는 오랜 세뇌교육과 학습 덕분에 여성들 스스로가 주입된 이데올로기의 전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지배층에서 지속적으로 정절 이데올로기를 세뇌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부작용이 속출했다. 세뇌의 희생양은 주로 사회적 약자와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여성은 그 두 가지 조건을 전부 충족한 ‘주 타깃’이었다. 여성들은 오랜 세뇌교육과 학습의 결과 자발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전사가 되었다. 가족과 남편을 위해서라면 격렬한 신체훼손도 마다하지 않았고, 자발적인 죽음도 감행했다. 스스로를 가부장제적인 희생물로 바친 열녀들을 보고 나라에서는 포상까지 하고 열녀문을 세워 자살을 방조하거나 조장했다. 그러다 보니 조선 후기에는 남편을 따라 죽는 여성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그럴수록 남성의 권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것이 조선시대에 ‘맹모삼천지교’와 ‘맹모단기지교’를 빙자한 ‘열녀전’의 대표적인 여성 잔혹사의 실제였다.

그러나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다. 여성도 남성처럼 사회생활을 하고 일을 한다. 이렇게 시대는 변하는데 과거의 고리타분한 관념에 사로잡혀 미혼모의 도덕성을 탓하거나 손가락질을 해서는 안 된다. 미국처럼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에서도 해리스가 부통령이 되어 ‘유색인 여성도 최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대다. 그러니 “미혼모보다는 돌싱이 낫다”고 하는 철없는 소리로 자신의 의식 수준의 바닥을 드러내는 대신 그녀들이 씩씩하게 아이를 기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주자.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하며 도망가버린 아이 아빠에 비하면 자기 아이를 낳고 기르겠다는 미혼모는 훨씬 책임감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기 아이를 입양 보내겠다고 글을 올린 사건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맹모가 들었더라도 땅을 치고 통곡했을 일이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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