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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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크로아티아에서 생활한다고 했을 때 많은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우려섞인 걱정을 했다. “유럽에서 아시아인 인종차별이 심하다던데 괜찮아?”

크로아티아에서 한인들이 겪은 인종차별 경험담도 많이 들었다. 자그레브 시내 트램을 탔는데 동양인인 지인의 곁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사람 많은 카페에 들어섰는데 현지인이 코를 막는 시늉을 했다 등의 이야기는 크로아티아로 가기 전부터 나를 많이 위축시켰다. 특히 코로나19 초기, 이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지며 관련 뉴스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을 땐, 아시아인에 대한 유럽인들의 경계심이 높아졌기 때문에 스스로를 위험한 상황에 두지 않기 위해 조심했던 기억이다. 당시엔 현지 교민들 또한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눈총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며 외출을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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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생활 초창기 때의 일이었다. 자그레브 버스터미널에 위치한 카페에 들렀는데, 유난히 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카페에서 주문을 기다리다 크게 손을 흔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돌아다니며 손님들의 주문을 받던 직원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더니 끝끝내 내 자리에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테이블에 나와 같은 아시아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주문은 받으면서 내 테이블은 고의로 무시하며 주문을 받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나는 음료를 주문하지 못한 채 버스시간이 다가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당시엔 매우 불쾌하고 당황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크로아티아의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직원을 소리내어 부른다거나 손짓으로 부르는건 크게 실례되는 일이었다. 일종의 ‘크로아티아 에티켓’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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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같은 카페에 갈 일이 생겼다. 카페엔 예전과 같은 여자 직원이 있었다. 이번엔 크로아티아 에티켓을 잊지 않고, 종업원과 눈을 마주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 지었다. 이곳 생활이 몸에 익으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기분 좋게 주문하는 방법이다. 그 직원은 이번에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친절하게 내게 다가와 유쾌한 인사와 함께 주문을 받고 커피를 내어 주었다.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했지만 몰랐다면 인종차별로 남았을 기억이다.

다행히 나는 지금까지 타지 생활을 하면서 크게 인종차별을 당한 경험이 없다. 코로나19 발발 초기에 크로아티아 시장에서 나이 많은 할머니가 나와 나의 동양인 일행을 가리키며 “노 코로나”라고 해서 속상해했던 적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내가 아시아인이라고 해서 행동이 달라진다거나 심하게 행동하는 경우는 없었다.

되려 현지인들의 따뜻한 챙김에 크게 위로를 받곤 했었다. 집 근처 카페나 마트에서 자주 만나는 어르신들은 코로나19 시국에도 평소와 같은 환한 미소와 함께 친근하게 맞아주곤 했다. 내가 잠시 한국으로 가기 위해 자그레브를 떠났을 때, 단골 카페의 아주머니가 나보고 “건강 조심하라”며 덕담을 건네고 꼬옥 끌어안아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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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초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할 무렵 한국에 잠시 다녀왔다. 지인과의 약속을 위해 마스크를 착용하고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갔다. 평소에는 인파가 많기로 유명하지만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로 눈에 띄게 한산해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한눈에도 중국인임을 짐작하게 하는 한무리의 중국인 관광객이 모여들었다. 순간 내 주변 벤치에 앉아있던 한국 사람들이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순식간에 여기저기로 사라졌다. 당시 코로나19가 우한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며 공포감이 증대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나 역시 마스크를 착용했음에도 혹시 모를 불안감이 스쳐 살짝 숨을 참으며 자리를 피했다. 순간 그 외국인 무리의 표정에서 당황함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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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인종차별일까 아닐까? 차별이란 생각을 하기 전에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 내 몸을 지켜야한다’는 불안감의 발로였지만, 어쨌든 내가 무의식적으로 해버린 행동이라고 해도 상대방이 차별이라고 느꼈다면 그것은 ‘차별’이 되고 만다.

인종차별은 매우 불쾌한 경험이다. 합리적 이유 없이 ‘나’라는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기분이다. 한 나라에서 좋았던 경험이 아흔 아홉개가 있어도 인종차별로 인한 나쁜 기억 하나가 생긴다면 그 기억이 좋았던 훨씬 많은 순간들을 압도하고 마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저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마음으로 넘겨버리고 마는 것이 좋지만, 정작 당사자가 되면 쉽지 않다. 이방인의 삶은 여러모로 고되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경민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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