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아무 증거도 없이 선거 부정을 외치다가 급기야 지지자들의 의회 폭동을 선동하기까지 했다. 그는 사실 여부에 무관심한 것일까,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일까, 자기기만에 빠진 것일까. 어느 경우든 진실은 아예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만다. 더구나 문제는 그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조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상 현상을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탈진실)’라는 개념으로 포착하여, 날카로운 분석의 잣대를 들이댄 인상적인 문제작이 있다. 바로 리 매킨타이어의 ‘포스트 트루스’(Post-truth·2018)다. 포스트 트루스란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인 사실보다 개인적인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여기서 포스트(post)는 시간 순서상 ‘이후’라는 뜻이 아니라, 진실이 무의미할 정도로 ‘퇴색’되었다는 의미다.

특히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와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터무니없는 주장들이 난무했다. 그 바람에 ‘포스트 트루스’는 그해 영미권에서 ‘올해의 낱말’로 선정되기도 했다. 심지어 선거 캠페인 중 트럼프 발언의 70%가 거짓말이었다는 통계도 있다. 또한 유권자의 3분의 2가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여론조사 결과까지 있다. 그럼에도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진실이 위협받는 위기는 과거에도 늘 존재했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지면 위기는 대부분 해소되었다. 반면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이 거리낌없이 현실을 왜곡해 자기 생각에 끼워 맞추려고 한다. 이런 탈진실 현상은 단순히 진실을 위협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사실이든 마음대로 선별, 수정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이어져 정치 전략으로 악용되고 있다.

일찍이 해리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ft·2005)를 펴내면서, 탈진실 현상을 경고한 바 있다. 개소리란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하고, 그렇다고 액면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말도 안 되는, 하지만 단순한 헛소리와 달리 화자의 교묘한 의도가 숨겨진 말’이다. 거짓은 진실로 바로잡을 수 있지만, 아예 진실을 ‘퇴색’시킨 개소리는 바로잡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프랭크퍼트는 개소리가 거짓말보다 더 해롭다고 말한다.

최근의 흐름을 관찰해 보면, 이런 탈진실은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기보다 ‘진실이 개인의 정치적 입장에 종속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에 입각하여 정치적 입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에 입각하여 사실을 바꾸려고 한다. 실제로 미국 공화당 전략가였던 칼 로브는 “우리는 행동을 통해 스스로의 현실을 만들어낸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에게 사실은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탈진실 현상을 극복하려면, 우선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더듬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최근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과학 부인주의(science denialism)’다. 즉 널리 인정받는 과학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과학적 연구방식의 정당성을 문제 삼는 태도다. 그것은 특히 담배판매업자와 기후변화 반대세력이 사용한 방법이다. 그들은 ‘공인된’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며 교묘하게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둘째로, 인간 심리에 내재된 ‘인지편향’이다. 그동안 심리학은 인지부조화 이론, 집단동조 이론, 확증편향 이론 등을 실증적으로 밝혀냈다. 과거에는 타인들과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인지편향이 어느 정도 조정되었다. 반면 오늘날에는 상호작용이 늘어났지만,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뉴스 사일로(news silo)’에 갇히기 쉽다. 그래서 상호작용이 인지편향을 완화하기보다 도리어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로, 전통적 미디어의 쇠퇴다. 처음에 공정 보도를 표방하던 미디어들이 점차 당파적 뉴스의 상업성에 눈길을 돌렸다. 트럼프도 그의 책 ‘거래의 기술’에서 “미디어는 진실보다 논란을 더 좋아한다”고 갈파한 바 있다. 이런 추세에 따라 전통적 미디어와 대안적(즉 당파적) 미디어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그 결과, 전통적 미디어는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넷째로, 소셜미디어의 등장이다. 이제는 누구나 뉴스를 만들고 뉴스를 골라볼 수 있다. 특히 정치적 의도와 상업적 의도가 뒤섞여 출처가 불분명한 가짜뉴스가 쏟아져 나온다. 또한 미디어를 통하지 않고도 자신의 견해를 직접 발신할 수 있다. 트럼프의 트윗 정치가 대표적이다. 이처럼 소셜미디어의 발전은 전통적 미디어를 크게 약화시킨다.

다섯째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의심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철학적·문화적 사조를 가리킨다. 이에 따르면, 어디에도 ‘정답’은 없으며 각자의 ‘이야기’만 존재할 뿐이다. 달리 말해, 관점만 존재할 뿐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탈진실의 직접적 원인은 아닐지라도 상당한 배경적 논거를 제공한다.

이처럼 다양한 뿌리가 한데 얽히면서 탈진실 현상이 급속도로 심화하고 있다. 하지만 원인을 제대로 알면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우리는 과학이 주장이 아니라 실증에 의해 성립한다는 점을 상기하고, 인지편향이라는 인간의 심리적 약점을 직시해야 한다. 전통적 미디어나 소셜미디어의 장단점을 바르게 이해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공공영역으로 무절제하게 침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런 이해와 성찰이 다양한 대안 마련을 위한 토대가 된다.

무엇보다 탈진실 시대에는 누구든 의도적 합리화에 빠지기 쉽다. 이런 풍토에서 거짓말은 결코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거짓말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 아울러 진실을 반복적으로 말해야 한다. 진실에도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효과가 있다. 또한 도표 형태로 제시되는 정보가 이야기 형태 정보보다 효과적이라는 점도 적극 활용할 만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진실에 맞추기보다 신념을 감정에 맞추려고 한다. 특히 소셜미디어의 발달은 사람들을 자신만의 뉴스 사일로에 가둬 탈진실 현상을 가속화시킨다. 이런 정치 환경에서는 실질적으로 효과적인 정책이 외면당하고, ‘사람들 기분만 좋게 만드는’ 정책이 득세한다. 그래서 탈진실 현상은 포퓰리즘을 부추기는 비옥한 토양이기도 하다.

탈진실 현상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기기만과 망상에 빠져 진실이 아닌 말을 진심으로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경우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중의 반응이 ‘실제로’ 사실 여부를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미국 대통령선거에 부정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지층을 선동하며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고 기도했다.

이 책은 주로 미국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도, 특히 조국 전 장관 사태 이후로 정치 영역에서 사실 여부는 거의 무의미해졌다. 그저 자신의 주장과 망상만 앞세운 ‘개소리’들이 난무한다.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들이 비난받기는커녕 지지층을 동원하는 정치 전략으로 버젓이 악용되고 있다. 이런 행태가 저급한 팬덤정치와 포퓰리즘을 낳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정치의 민낯이다.

키워드

#지금 이 책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