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미트라스 신 부조. 고깔모자를 쓴 미트라스 신이 칼로 소의 목을 찌르고 있다. ⓒphoto 위키피디아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미트라스 신 부조. 고깔모자를 쓴 미트라스 신이 칼로 소의 목을 찌르고 있다. ⓒphoto 위키피디아

‘화약, 인쇄술, 종이, 나침반.’

중국인이 자랑하는 ‘메이드 인 차이나’ 4대 발명품이다. 한국인에게는 익숙한 상식으로 통하겠지만, 전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이 상식은 틀렸다. 중국에서 발명되기 전 이미 다른 곳에서 사용된 역사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한순간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없다. 몇몇 천재에 의한 비약은 있을 수 있겠지만, 기본은 개선·진화·발전의 결과다. 종이를 보자. 2세기 채륜이 만들었다는 것이 중국의 주장이다. 많은 사람이 수긍할 듯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채륜의 종이는 이미 4000년 전 이집트에서 등장한 파피루스의 아류작에 불과하다. 사실 파피루스는 영어 페이퍼(paper)의 원류에 해당하는 말이다.

7년 전 이탈리아 시칠리아 시라쿠사(Siracusa)에서 파피루스 장인을 만난 적이 있다. 집에까지 따라가서 파피루스 만드는 법을 배웠다. 불과 1시간 동안 배운 결과, 파피루스가 종이의 원류라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됐다. 두 개가 전혀 무관한,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란 걸 말이다. 파피루스의 원료는 나일강은 물론 멀리 시칠리아에서도 볼 수 있는 지중해 특산 식물이다. ‘사이페루스 파피루스(Cyperus Papyrus)’란 이름의 식물로, 한국인이 보면 갈대 사촌 격으로 느껴질 것이다. 두께 5㎝ 정도에, 높이 2~3m까지 자란다. 이집트 파피루스는 바깥쪽부터 얇은 결을 내면서 길게 자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가로·세로 50㎝ 크기로, 빈틈없이 얽어맨 뒤 평평한 돌로 파피루스를 누른다. 하루 정도 지나면 내부에서 나오는 끈끈한 액체와 함께 종이 역할을 할 수 있는 파피루스가 탄생한다. 현재 사용하는 종이보다는 두껍지만, 워낙 강도가 강하기 때문에 둘둘 말아 사용할 수 있다. 숯으로 글씨를 썼어도 물에 씻어 재활용할 수 있다.

수메르 전설이 원류인 노아의 홍수

이집트인이 본다면 중국이 자랑하는 발명품 종이는 피라미드 시대보다 2000여년 뒤에 나타난 파피루스 짝퉁에 불과하다. 재료가 풍부하고 무게도 가벼운 진화된 제품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 발명품은 아니다. 파피루스가 흑백TV라면 컬러TV 시대에 들어선 것이 종이의 위상이다. 인구 급증과 함께 필기 노트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인류의 노력도 더해지면서 나타난 진화물인 셈이다. 파피루스는 4000년 전 기록을 인류에게 전해주고 있다. 중국 발명품 종이가 남긴 책이나 문서는 파피루스보다 무려 2500년 뒤에나 나타났다.

개선·진화·발전은 종이와 같은 물건이나 형이하학적 물질에 한정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세계, 특히 종교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신으로서 또는 신의 메신저나 선지자가 던지는 종교적 복음, 나아가 종교의식이나 종교의 궁극적 목적 그 자체도 개선·진화·발전으로 설명될 수 있다. 세계 모든 종교가 “하늘의 뜻에 따라 세상에 등장한 유일무이한 신앙체계”라 말하지만, 조금만 파보면 개선·진화·발전으로서의 종교란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에덴동산 얘기를 보자. 그리스·인도·에티오피아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지만, 원류는 인류 최초로 문자를 가진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의 전설에 있다. 이집트의 파피루스가 중국의 종이로 진화된 것처럼, 약 5000년 전 수메르의 전설이 2000여년 뒤 유대인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진화·발전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노아의 홍수는 어느날 갑자기 유대인의 머리에서 탄생한 인류 창조기가 아니다.

얘기를 기독교로 좁혀 예수의 행적과 메시지가 투영된 신약성경으로 옮겨 보자. 과거의 종교를 기반으로 한 개선·진화·발전으로서의 신약성경, 나아가 예수에 관한 부분이다. 흑백TV에서 컬러TV로, 파피루스에서 종이로 발전된 것과 같은 궤적이 신약성경이나 예수의 메시지 속에 남아 있을까? 기독교 신자들이 본다면 신성모독이라 비난할 듯하지만, 과거의 종교를 통한 개선·진화·발전으로서의 흔적은 신약성경 속 기독교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수 탄생 직후의 초기 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고대 로마의 종교, 미트라스(Mithras)가 주인공이다.

초기 기독교와 경쟁관계에 있던 로마의 신흥종교가 미트라스였기 때문이다. 세상사가 그러하듯, 경쟁 당사자들은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단점을 배격하는 식으로 진화해나간다. 놀랍게도 초기 기독교를 보면 미트라스와 닮은 부분이 너무도 많다. 한국인에게 미트라스는 전혀 낯선 별세계 컬트로 비칠 듯하다. 그러나 이탈리아 로마나 유럽의 고고학 박물관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알게 모르게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듯한 종교가 미트라스다. 한 번이라도 보면 잊을 수 없는, 기묘한 석상 조각이 미트라스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망토 차림의 남성과 소가 주인공이다.

로마 시절 지하교회였던 카타콤. 초기 미트라스교도의 활동 공간이 카타콤이었다. ⓒphoto 유민호
로마 시절 지하교회였던 카타콤. 초기 미트라스교도의 활동 공간이 카타콤이었다. ⓒphoto 유민호

망토 차림의 남성과 소

남성은 칼을 든 오른손으로 소의 목을 찌르고 있다. 그러나 얼굴은 소가 아닌 반대편을 지켜본다. 울부짖는 듯한 소를 중심으로 한 좌우 양끝에는 태양 신과 달 신이 새겨져 있다. 태양 신의 얼굴은 뉴욕 맨해튼 입구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 모습과 똑같다. 뱀, 새, 개 같은 동물들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석상은 서기 1세기부터 로마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신비주의 종교인 미트라스의 종교적 화신이다. 기독교로 치자면 십자가와 같은 의미를 갖는, 제단 중앙을 지키는 미트라스의 상징에 해당한다.

미트라스를 처음 만났던 것은 20여년도 넘는 20세기 말 때다. 유럽 박물관 여기저기에서 수없이 접했기 때문에 정확히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기억에 남는 가장 큰 미트라스는 로마 한복판 카피톨리니(Capitoline) 박물관 지하 1층의 대리석 조각이다. 가로·세로 2m 정도로, 로마 당시의 다른 비석들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주인공인 미트라스를 보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모자다. 벨기에를 대표하는 만화의 주인공 스머프가 쓴 것과 똑같은 고깔모자다. 이른바 ‘프리지안 모자(Phrygian Cap)’로, 유럽에서는 자유의 상징으로 통하는 모자다. 고대 로마 당시 노예를 자유인으로 허락할 때 준 모자가 프리지안 모자라고 한다.

고깔모자가 위력을 발휘한 것은 프랑스혁명 때다. 프리지안 모자가 자유 시민의 상징으로 정착됐기 때문이다. 왕정에 반대하는 시민이라면 일단 고깔모자를 쓴다. 당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유럽 전역으로 이어지고 있다. 테러 방지에 나선, 로마 중심을 지키는 이탈리아 무장 군인을 자세히 보기 바란다. 빨간색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산타클로스용 모자로 착각하기 쉽지만, 자유의 상징으로서의 프리지안 모자다. 압제가 아닌 자유를 지키는 군인이란 의미다. 미트라스 주인공이 프리지안 모자를 쓰고 있다는 것은 바로 자유로서의 종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미트라스의 머리 모양 등은 아폴로신을 모방했다. ⓒphoto 유민호
미트라스의 머리 모양 등은 아폴로신을 모방했다. ⓒphoto 유민호

안티오코스1세와 악수하는 미트라스

개선·진화·발전으로서의 종교는 미트라스 그 자체에도 적용된다. 미트라스는 1세기 급성장하기 전부터 로마의 동쪽 변경 지방을 석권하고 있었다. 페르시아와 인도 중 어디가 미트라스교의 탄생지인지는 지금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로마에 입식되기 전의 미트라스 흔적이 페르시아와 인도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미트라스는 로마군의 영토 확장과 더불어, 바다와 육지를 통해 서쪽의 이탈리아와 유럽 전체로 확산한다. 언제부턴가 체득한 ‘신기한 우연’이지만 뭔가 깊이 생각하면 구체적인 현상이나 상황이 눈앞에 나타난다. 기억 속에 새겨진 영화를 다시 꺼내 보면, 며칠 뒤 봤던 영화에 관한 특집 프로그램이 신문에 등장하는 식이다.

터키 메소포타미아 지방 한복판의 고대 도시인 ‘가지안테프(Gaziantep)’에서 만난 미트라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9월 현지 박물관에 들렀다가 미트라스를 만났다. 로마에서 봤던 미트라스 조각이 머릿속에 맴돌던 중 ‘매우 우연히 접한’ 페르시아판 조형물이다. 처음에는 미트라스인지도 몰랐다. 로마와 달리 똑바로 선 상태에다 소도 없었기 때문이다. 태양을 상징하는 빛 형상을 배경으로, 기원전 1세기 당시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방을 지배했던 안티오코스 1세(Antiochos I)와 악수를 하고 있다. 로마 미트라스와 달리 헤라클레스 스타일의 근육형 인물로, 설명문에는 ‘아폴로 미트라스 헤르메스’란 긴 이름을 달고 있다. 단독 신이 아니라, 여러 신의 장점을 하나로 모은 종합 신의 모습이다.

종합 신은 유일신으로 나아가기 직전의 종교체계다. 지방의 작은 가게들이 도시의 큰 백화점으로 흡수되는 식이다. 석상에서 안티오코스 1세는 ‘감히’ 종합 신과 대등하게 서서 악수를 하고 있다. 생전에 이미 신으로 추앙된 안티오코스 1세가 미트라스에 준하는 인물이란 것을 과시하려는 프로파간다 조형물이라 볼 수 있다. 석상이 만들어진 기원전 1세기는 로마에서 미트라스가 인기를 끌기 100여년 전의 시기다. 종합 신으로서의 미트라스가 왕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0여년이 지난 뒤 로마로 가면 왕만이 아니라 시민은 물론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다가선 자유의 신으로 변해간다.

터키 고대도시 가지안테프 석상 속의 미트라스(오른쪽). 안티오코스 1세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photo 유민호
터키 고대도시 가지안테프 석상 속의 미트라스(오른쪽). 안티오코스 1세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photo 유민호

미트라스교와 기독교가 닮은 4가지

로마의 미트라스가 예수의 기독교와 비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기 신흥종교로 부상했던 시기가 예수 탄생 이후의 초기 기독교 역사와 겹치기 때문이다. 미트라스의 흥망사는 서기 1세기부터 4세기, 약 300여년에 그친다. 폭발적으로 교세를 넓혀가지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채택된 392년 이후 한순간에 사라지게 된다. 역사종교학자들은 급작스러운 몰락의 배경에 기독교가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가 국교로 채택된 순간 미트라스 파괴가 조직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미트라스가 어떤 종교인지, 왜 예수의 기독교와 경쟁관계였는지 살펴보자. 미트라스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구체적 인물이 없다. 신약성경을 통해 살아 있는 메시지를 남긴 예수와는 전혀 다른 종교다. 특별한 경전이 없다는 의미다. 신화 속 인물인 미트라스가 주인공이지만, 구체적인 행적이 전혀 없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흔적을 보면, 미트라스와 예수와의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처녀 탄생이다. 예수가 성처녀 마리아를 통해 탄생했듯이, 미트라스의 삶도 처녀 탄생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몸이 아니라 바위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미트라스 신앙의 출발점이다. 인간의 피를 통한 출생이 아닌, 초인간적인 신비 그 자체로서의 탄생이다. 사실과 다르지만, 로마 공화정 말기 종신 독재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제왕절개를 통해 탄생했다고 한다. 제왕절개(Cesarean section)라는 말 자체가 카이사르 이름에서 유래했지만, 당시 제왕절개는 처녀 탄생에 해당하는 신의 출생 과정으로 풀이됐다고 한다. 피로 범벅이 된 여성의 자궁이 아닌, 깨끗하고 신비스럽게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처녀 탄생으로 풀이됐다. 미트라스의 바위 탄생도 마찬가지다.

둘째 유사점은 12월 25일이다. 미트라스의 탄생일로 알려진 날로, 예수의 생일과 똑같다. 시기적으로 미트라스는 예수의 기독교보다 일찍 알려진 종교다. 기독교는 예수 사후 천천히 명맥을 이어가다가, 3세기 들어 로마가 하락세로 들어서면서부터 급성장한다. 1~2세기 때는 미트라스의 파워가 기독교보다 월등히 높다. 따라서 역사종교학자들 중에는 예수가 미트라스 탄생일을 흉내 낸 것이 아니냐라는 가설을 편다. 이미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성스러운 날을 예수 탄생일에 입식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다.

셋째는 의식에 관한 부분이다. 미트라스는 먹고 마시는 의식을 중시 여긴 최초의 종교다. 가톨릭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성찬식인 셈이다. 신관과 신자가 하나로 연결된 채, 먹고 마시는 의식을 함께 거행한다. 미트라스 이전까지만 해도 신관의 활동이나 공간은 일반 신자들과 철저히 유리됐다. 신관은 신자를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군림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안티오코스1세에서 보듯, 최고 상위의 신관이자 살아 있는 신이 바로 왕이었다. 미트라스는 의식 도중에 신관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신앙심을 공유하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종교였다. 신관을 가깝게 접한다는 것은 신에게 가까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권력층과 일부에 그친 금수저용 종교를, 노예까지 포함한 흙수저 무대로 옮긴 주인공이 바로 미트라스다. 기독교 성찬식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살과 피로서의 빵과 와인이란 발상이 미트라스 의식과 비슷하다.

넷째는 지하공간 활용이다. 미트라스는 종교의 활동공간을 지하에 뒀다. 모든 의식은 어두운 지하에서 촛불을 켠 채 진행됐다. 지하에서의 종교활동을 통해 밝은 지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일종의 부활의식이 미트라스 종교관에 배어 있다. 초기 기독교가 집회공간으로도 활용했던 ‘카타콤(Catacombs)’ 발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카타콤은 집회 이전에, 기독교도의 무덤으로도 활용됐다. 로마인과 달리 기독교도들은 화장이 아닌 토장을 한다. 미트라스도 집회공간을 토장용 무덤으로도 활용한다. 승자 독식의 논리겠지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지정된 뒤 미트라스의 지하공간 대부분은 기독교용 교회나 무덤으로 변해간다.

이기면 관군, 지면 반군이라 했던가? 가설이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미트라스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로마의 국교로 채택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21세기에 박물관에서 접하는 미트라스의 이미지는 컬트, 즉 사이비 냄새가 풍기는 원시 종교에 불과하다. 그러나 개선·진화·발전을 2000여년간 지속할 경우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없다.

유민호 퍽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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