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鬼滅の刃)’이 ‘지브리’를 베었다. 만화가 고토게 고요하루(吾峠呼世晴)가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한 만화이자 동명의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얘기다.

지난해 10월 16일 개봉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劇場版 鬼滅の刃 無限列車編)’은 TV 애니메이션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다. 이 작품은 지브리스튜디오가 제작하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연출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세운 일본 내 흥행 기록 316억엔을 20년 만에 갈아치우며 역대 1위 자리(1월 기준 361억엔)를 꿰찼다. 극장을 찾은 관객수는 2644만명에 달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흥행 수입 300억엔이란 대기록을 달성하는 데 253일이 걸렸지만 ‘귀멸의 칼날’은 불과 73일 만에 고지를 밟았다.

73일 만에 역대 흥행 기록 세워

박스오피스 ‘모조’가 집계한 지난해 전 세계 영화 수익에서는 할리우드 영화들을 제치고 5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더 놀라운 점은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달성한 기록이란 점이다.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일본 관방장관은 지난해 10월 정례 기자회견에서 이 작품의 흥행에 대해 “신종 코로나19 바이러스 재난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영화산업에 대단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야기는 일본 다이쇼(大正) 시대(1912~1926), 주인공 가마도 단지로가 도깨비(원작에서는 오니)에게 일가족을 잃으며 시작한다. 무참한 살육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동생 네즈코마저 도깨비로 변해버리지만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단지로가 네즈코를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도깨비와 싸우며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일본 언론에서는 이 작품의 이례적인 인기를 사회현상으로 진단하고, 현상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내놨다. 작품 외적인 이유로는 코로나19로 인한 ‘집콕’이 꼽힌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접근하기 쉬운 만화나 애니메이션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고, 화제성을 독점하던 ‘귀멸의 칼날’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됐다는 얘기다. 할리우드 대작의 개봉이 줄줄이 연기된 것도 호재가 됐다.

가족애와 동료애를 중시하고 노력과 성장으로 난관을 극복한다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건드리고 있는 부분은 콘텐츠 자체의 강점이다. 악귀를 퇴치한다는 단순 명쾌한 스토리 역시 일본인들에게 낯익은 모모타로(桃太郎) 설화를 닮아 진입장벽을 낮췄다. 우정·노력·승리라는 일본 소년만화의 정통적인 가치를 계승하면서도 원대한 목표가 아닌 여동생을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한 여정에 집중한다. 또 원래는 인간이었지만 괴물이 되어버린 도깨비들의 사연과 감정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지점도 차별화된다. 아이들이 몰입하기 쉬운 이야기에 어른들도 공감할 수 있는 매력을 더한 셈이다. 도카지 아키히코(戸梶亜紀彦) 도요대학 교수는 “코로나19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등장한 작품”이라며 “전 세대를 아울러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많았던 것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플랫폼 넘나들며 인지도 높여

인기의 핵심 요인은 플랫폼을 넘나들며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 콘텐츠 전략이다. ‘귀멸의 칼날’ 열풍은 2019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방영된 애니메이션이 훌륭한 영상미와 작화, 3D를 활용한 화려한 액션, 원작의 성긴 부분을 채운 스토리텔링으로 크게 흥행하며 원작 만화도 적당한 인기작에서 전무후무한 히트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일본의 콘텐츠 소비가 TV에서 OTT로 넘어오는 시점에 ‘귀멸의 칼날’을 거의 모든 스트리밍 서비스에 공급하며 접점을 늘린 것도 주효했다. 성공적인 애니메이션화에 맞물려 원작 역시 완결을 향해 진격하면서 신규 팬이 대거 유입됐다.

신문과 잡지 기사를 통해 여러 차례 언급되면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 것도 폭발적인 흥행을 견인했다. 거기에 더해 TV애니메이션의 후일담이자 원작의 중반부 이야기를 극장판으로 내놓으면서 특별판 형태로 완결된 기존 극장용 애니메이션과 궤를 달리했다. TV와 OTT로만 감상했던 콘텐츠를 극장에서 모두 함께 즐기는 이벤트로 기획한 것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원작 만화와 TV애니메이션, 그리고 극장판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스토리텔링을 이어나가고, 새롭게 유입된 팬들을 다른 플랫폼으로 끌어들이는 선순환의 고리가 완성됐다. 결국 원작 만화는 누적 발행부수 1억2000만부를 돌파하며 ‘드래곤볼’ ‘슬램덩크’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등 일본 만화계를 대표하는 작품들만 이름을 올린 1억부 클럽의 멤버가 됐다. 이 중 8000만부는 2020년 한 해에만 달성한 기록임을 상기해보면 그 기세를 짐작할 수 있다.

기념품, 완구, 편의점, 외식, 패션, 관광, 유통 등 거의 모든 업종에서 협업을 진행한 것도 흥행에 불을 붙였다. 지난해 다이도(Dydo)에서 발매한 ‘귀멸의 칼날’ 캔커피는 출시 3주 만에 5000만개가 팔리며 회사 매출을 끌어올리기도 했다.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第一相互生命保險)는 ‘귀멸의 칼날’ 콘텐츠로 인한 경제효과를 2700억엔 이상으로 추산했다.

이처럼 ‘귀멸의 칼날’은 코로나19라는 외부 요인과 전 연령대의 공감을 얻은 콘텐츠의 매력, 플랫폼 간 시너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전략의 삼박자가 만들어낸 히트작인 셈이다.

‘귀멸의 칼날’은 연재 5년 만인 지난해 총 22권으로 이야기를 끝냈다. 일본 연재만화 시스템을 고려해보면 역대급 흥행작을 이처럼 깔끔하게 마무리하기란 작가로서도 잡지사 편집부로서도 어려운 결정이다. 문화산업 전 분야에 영향을 끼치는 작품으로 덩치가 커졌다면 더더욱 그렇다. ‘드래곤볼’의 연재 당시, 완결을 우려한 일본 문부성 차관이 작가 도리야마 아키라(鳥山明)를 직접 찾아 연재를 계속해 줄 것을 당부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인기작들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캐시카우를 조금이라도 길게 유지하기 위해 더 강한 적이 등장하고 이야기가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진다. 장르가 아예 바뀌기도 하고 그 사이 작품의 매력이 퇴색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귀멸의 칼날’은 종래의 모델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을 확립했다.

‘귀멸의 칼날’은 ‘이야기가 끝나도 비즈니스는 계속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원작의 힘에만 기대어 가는 시대는 지나갔다. 플랫폼 전략에 따라 콘텐츠는 끊임없이 생명력을 얻고 영역을 넓힌다. ‘귀멸의 칼날’은 일본 만화계의 공식을 베었다.

홍성윤 매일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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