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절벽 사이에 있는 대둔산 석천암.
가파른 절벽 사이에 있는 대둔산 석천암.

머리가 좋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능력이 있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솔루션을 내놓는 능력이 아닌가 싶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진짜 머리 좋은 사람이다. 솔루션, 해결책이라는 부분을 압축하면 결국 예측 능력이다. 앞일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를 미리 예측하는 능력이다. 특히 상황이 혼돈일 때가 더 그렇다. 여러 가지 변수가 총체적으로 엉켜 있어서 도저히 앞을 내다보기가 힘들 때 ‘어디로 가야 한다’라는 이정표를 제시하는 사람이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이고 지도자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 예측 능력을 갖추기가 어렵다. 아무나 갖는 능력이 아니다.

주역의 대가였던 야산(也山) 이달(李達·1889~1958) 선생을 떠올릴 때마다 ‘이 양반이야말로 혼돈 상황일 때 어디로 가야 살 수 있는가를 제시해준 선생님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전염병이라는 병겁(病劫)이 닥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니 야산 선생이 더욱 그리워진다. 이 전염병이 거대한 사회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 변화의 귀결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답답함이다. 세계적 석학들이 내놓는 변화예측을 들어봐도 시원찮다. 추상적인 이야기이다. 별로 와닿지가 않는다. 그런 이야기는 나도 할 수 있겠다 싶다.

한국 현대사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었던 대목은 어디일까? 일제 36년이 끝나고 맞았던 해방정국이다. ‘식민지 상황은 과연 끝날 것인가’도 큰 의문이었다. 8·15광복을 맞기 하루 전날인 8월 14일. 야산 이달은 제자들을 이끌고 여행을 갔다. 문경군 문경읍 문경리의 어느 시골 동네였다고 전해진다. 문경(聞慶)이라! 지명이 범상치 않은 동네이다.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 문경이라는 단어가 3개나 겹치는 동네로 제자들을 이끌고 갔다. 이 동네에서 14일 저녁에 야산은 제자들로 하여금 닭춤을 추게 했다. 닭춤이란 ‘꼬끼오!’ 소리를 내면서 추는 춤이었다. “꼬끼오를 더 크게 외치거라” 하는 야산의 주문이 계속되었다. ‘왜 우리 선생님은 느닷없이 우리들로 하여금 꼬끼오를 외치도록 한단 말인가?’ 다음 날 날이 밝자 광복이 되었다.

8·15광복은 축복이었지만 축복이 아니었다. 엄청난 혼돈으로 진입하는 게이트였다. 그동안 짓눌려 있었던 온갖 사회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라 폭발하는 상황으로 들어간 셈이다. 좌우익의 폭력과 테러…. 광복이 되고 나서 혼돈으로 들어가는 조짐이 보이자 야산은 다시 제자들을 이끌고 대둔산 석천암(石泉庵)으로 들어갔다. 충남 논산시 벌곡면 수락리이다. 해발 878m의 대둔산 바위 자락의 중간쯤에 자리 잡은 조그만 암자. 아주 가파른 바위 절벽 사이에 있는 옹색한 암자이다. 그야말로 네댓 명이나 생활할 수 있는 좁은 공간이다. 주역의 대가였던 야산은 왜 이런 궁벽진 산속의 암자를 거처로 정했는가? 광복이 되었으니 활동을 시작해야지 왜 산속으로 숨는단 말인가?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사람이 설레고 있을 때 야산은 대둔산으로 왔다. 이는 은둔하기 위해서였다. 광복 이후의 상황을 주역의 64괘 중 하나인 천산둔(天山遯) 괘로 해석했던 것이다. 천산둔 괘는 후퇴하고 물러나고 숨는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그렇다면 어디로 숨는단 말인가? 이 판단도 어려운 부분이다. 숨어야 한다는 것도 어려운 판단이지만, 그다음에 어디로 숨어야 하는지도 고도의 판단이다. 야산은 대둔산의 석천암을 선택하였다. 그렇다면 대둔산(大芚山)이 어떤 산인가? 풀 초(艸)를 떼어내면 둔(屯)이 된다. 둔(屯)은 군대가 창검을 들고 진을 치고 있는 형국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창과 칼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모습과 비슷한 산이라는 이야기이다. 산세가 그만큼 날카롭다. 전북 완주군과 충남 논산에 걸쳐 있는 대둔산은 칼과 창처럼 뾰쪽한 바위 봉우리들이 솟아 있는 모습이다. 근처에 있는 계룡산과 높이도 비슷하고 온통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날카로운 암봉의 모습에 있어서는 계룡산보다 훨씬 더 칼날처럼 보인다.

위태로운 암벽에서 세상을 내려보면

야산 선생은 해방정국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 석천암에서 은둔하며 보냈다. 은둔이라고는 하지만 제자들도 출입하는 은둔이었다. 제자들이 선생 계신 곳에 와서 주역 공부도 하고 경전도 보고, 인생사 어려운 부분을 물어보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던 시절인 30대 초중반에 틈만 나면 대둔산에 갔다. ‘이 보따리 장사를 언제까지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올라오면 대둔산에 올랐다. 이 산에 오면 이상하게도 걱정이 줄어들었다. 김제의 모악산 품에서 청소년이 재롱을 떨다가 힘을 길러서 이제는 골산의 기가 강한 대둔산으로 옮겨왔던 셈이다.

전북 완주군 쪽에서 접근하면 대둔산 약사암이 나온다. 약사암 뒤로 올라가면 그야말로 창검이 겹겹이 서 있는 듯한 암벽들이 나온다. 나는 이 위태로운 암벽에 올라가서 저 아래 세상의 마을 지붕들을 내려다보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좀 나고 의욕이 생기면 대둔산 주 능선을 넘어가는 등산을 하였다. 서너 시간 험한 바위 암봉들을 손으로 잡고 발을 조심스럽게 디디면서 넘어가면 골짜기의 튀어나온 바위 널빤지 같은 지점에 석천암이 보이기 시작한다. ‘둔’은 은둔한다는 둔(遯)으로도 읽힌다. 세상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30대 초반의 필자가 은둔했던 산이 대둔산인데, 석천암은 그 대둔산 가운데서도 아주 깊숙한 지점에 숨겨져 있는 암자로 다가왔다. 서너 시간 땀을 흘리며 암산을 타고 올라간 필자를 반겨준 것은 시원한 물맛이었다. 돌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일품이었다. 그야말로 석천(石泉)이었다. 샘물 옆 바위에는 ‘침석(枕石)’과 ‘수천(漱泉)’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돌을 베개 삼고 샘물로 양치질한다’는 뜻이다. 은둔자의 생활철학임을 알 수 있다. 돌 속에서 나오는 샘물 말고는 뭐가 있겠는가. 그러니 돌을 베개 삼는다. 돌베개를 베고 누워 있는 사람의 심정은 무엇이겠는가. 완벽한 무소유가 아니겠는가. 가진 것은 돌베개뿐이다.

장준하가 일본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는 과정을 그린 책의 제목이 ‘돌베개’이다. 돌베개를 베고 자야 하는 인생은 완벽한 낭인의 상태이다. 완벽한 백수라야만 돌베개를 벨 수 있다. 이 배고픈 바위산에서 무슨 먹을 것이 있다고 양치질은 한단 말인가.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곯고 사는 인생이 양치는 왜 하는가. 그럼에도 샘물로 양치질한다고 새겨 놓았다. 침석과 수천이라는 글자는 인적이 없고 산새 소리만 들리고 흰 구름만 보이는 이 첩첩산중에서 밥 굶고 사는 단독자의 생활을 보여주는 글씨이다. 해방정국의 혼돈 상황에서 야산 이달이 은둔하며 제자들을 양성했던 석천암. 내가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낙담하던 시절에 나를 달래주던 대둔산과 석천암이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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