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폼페이우스 장군의 해적 소탕을 기념해 만들어진 고대 도시 폼페이오폴리스의  유적. ⓒphoto 유민호
로마 폼페이우스 장군의 해적 소탕을 기념해 만들어진 고대 도시 폼페이오폴리스의 유적. ⓒphoto 유민호

어릴 때 읽었던 ‘수호지’를 최근 만화로 다시 봤다. 간단한 얘기지만 워낙 많은 등장인물 때문에 도중에 읽다가 포기했다. 눈앞에서 인사를 하며 명함을 나눈 사람의 이름조차도 1분 만에 잊어버릴 나이다. 그러나 어릴 때 읽었을 때와 다른 관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수호지’ 주인공인 양산박 108성(百八星)이다. 대의를 내걸고 관의 부정부패에 맞서 싸우는 108명의 영웅호걸이다.

새삼 주목한 것은 108성의 배경이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양산박에 모이기 전에 어떤 일을 했던 인물들인가 하는 점이다. 바로 산적이 답이다. 다른 배경도 있지만 산적이 양산박 108성 호걸들의 주류다.

산적이란 키워드는 중국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해석하기에 달렸겠지만 불의에 맞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의인이라는 의미가 산적이란 단어 속에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의문이 떠오른다. ‘왜 해적이 아니라 산적인가’라는 점이다. 산적만이 아니라 해적도 고독하게 살아가는 의인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수호지에서 보듯, 해적 출신 영웅호걸은 거의 없다. 다른 시기 중국 역사를 뒤져봐도 해적 얘기는 드물다. 사실 중국에 해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은 해적 출몰 지역을 자국의 영토라 생각하지 않았다. 황하 이남지역을 남만(南蠻)이라 부르면서 야만인의 땅 정도로 무시해왔다. 몽골의 원(元)을 제외한 한족의 중국은 ‘바다=야만인들인 남만의 주거지’로 해석했다. 지금이야 해양 실크로드를 외치는 중국이지만, 과거 역사에서는 바다에 무관심한 때가 많았다.

로마를 괴롭힌 해적들의 출현

산적과 해적은 육군과 해군이란 영역으로 풀어 설명할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은 육군, 영국과 미국은 해군 나아가 해병대를 중심으로 편성된 군제였다. 인류 역사상 산적과 해적, 즉 육군과 해군을 전부 석권한 첫 번째 대제국은 어디일까?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고대 로마를 가장 먼저 떠올릴 듯하다. 로마의 역사는 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 반도를 기반으로 한 육군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로마가 뻗어나가는 과정에서 지중해와 에게해를 기반으로 한 해군 역사가 탄생한다. 기원전 264년부터 시작해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 멸망 때까지 이뤄진,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전쟁(Punic Wars)은 해상강국 로마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당연하지만 육지만이 아닌 바다에서의 파워도 대제국의 기본요건이다. 통상 산적이 어느 날 갑자기 해적으로 변신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로마는 해낸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로마만큼 ‘줏대가 없는 대제국’도 없을 듯하다. 문명·전통·역사를 앞세우다가도 보다 우수한 것이 나타나는 순간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린다. 남의 것이라도 기능·효용·가치를 이해한 순간 로마로 수입해 곧바로 채택한다. 육군 중심의 나라였지만 해군 증강에 필요한 모든 지식과 정보를 고대 그리스와 지중해 변방에서 끌어모은다. 로마는 경영자일 뿐 구체적인 물건은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현지인에게 전부 맡기는 식이었다. 어제의 영광과 과거에 집착한 카르타고는 외부에서 해결점을 찾은 수입대국 로마에 의해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한니발을 앞세운 해양대국 카르타고가 사라진 지중해는 로마의 앞마당으로 변신한다. 그리스 최후의 저항세력 코린트(Corinth)도 카르타고와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바다의 로마를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경쟁자 제로 시대에 접어든다. 로마는 육지보다 바다를 먼저 장악한 대제국이다. 로마에 앞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육지에서의 파워에만 주목한 인물이다. 상상컨대 알렉산더는 배멀미를 한 최초이자 최후의 대제국 창설자였을지 모르겠다. 기병으로 유럽과 아시아 전역을 돌아다녔을 뿐 배를 탄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지중해가 로마 수중에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넓고 넓은 바다를 100% 통제할 수는 없었다. 호랑이가 사라지자 하이에나가 등장한다. 해적의 출몰이다. 로마에 정복당한, 카르타고와 그리스 출신 패잔병들이 해적으로 변한 것이다.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해적과 해군은 천양지차일 듯하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로 돌아가면 다르다. 그리스나 로마 시대 군인들의 가장 큰 관심은 전리품 획득에 있었다. 애국이나 국가에 관한 개념이 없던 시대다. 이기면 적의 금은보화만이 아니라 땅, 여자, 노예는 물론 심지어 신전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름을 남긴 장군의 척도는 전승 여부에 국한되지 않았다. 적으로부터 획득한 다양한 전리품을 얼마나 후하게 나눠 주는냐에도 달려 있었다.

카르타고와 그리스 군인 출신이라면 그 같은 전리품 맛에 익숙했을 것이다. 나라도 망한 상태에서 로마에 굴복하고 살기보다, 독자적인 소규모 해적을 조직해 바다와 육지를 무대로 약탈 활동에 나서는 길을 택했다. 해적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는 카르타고 멸망 이후인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다. 장소는 현재의 지중해 키프로스(Cyprus)를 중심으로 동쪽의 시리아·이스라엘을 잇는 레반트(Levant) 지역과 북쪽의 아나톨리아 실리시아(Cilicia) 주변 바다다. 가까이는 이집트·시리아·이스라엘, 멀리는 페르시아에서부터 인도와 중국에서 수출된 물건들이 통과하는 무역루트다.

로마 폼페이우스 장군 두상. ⓒphoto 위키피디아
로마 폼페이우스 장군 두상. ⓒphoto 위키피디아

일방적 승리로 끝난 해적소탕작전

트럼프 대통령 퇴임과 함께 사라진 인물로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방장관이 인상 깊다. 이유는 이름에 있다. 폼페이오는 21세기 대제국 미국의 외교수장인 동시에,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최고 실력자 장군의 이름이기도 하다. 기원전 106년에 태어난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Pompeius Magnus Gnaeus)가 주인공이다. 추측건대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평생을 2000년 전 로마 장군을 의식하면서 살아왔을 듯하다. 육군사관학교, 하원의원 출신으로 CIA 수장을 거쳐 국무부 장관에 올랐다는 점에서 살아온 이력 역시 비슷하다. 그러나 2000년 전 폼페이우스 장군과 달리 21세기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이란·북한·중국 문제와 같은 자국의 외교 현안을 해결하지 못한 채 퇴임했다.

기원전 1세기 폼페이우스 장군은 당시 로마의 최대 골칫덩어리를 단숨에 해결한 영웅이다. 바로 해적 퇴치다. 지중해 동쪽 레반트 지역과 실리시아에서 악명을 떨친 해적들을 기원전 67년 군사작전을 통해 완전 소탕한다. 보병 12만명과 전함 500척을 동원한 대규모 작전으로 불과 3개월 만에 해적소탕작전을 대성공으로 끝낸다. 해적으로부터 획득한 전함이 400척, 격추 전함 1300척, 사살된 해적 1만명, 생포한 해적이 2만명에 달하는 일방적 승리였다. 폼페이우스 장군 덕분에 이후 지중해의 평화와 번영은 약 300년간 지속된다.

너무도 로마스럽다고나 할까? 혁혁한 전과를 올린 장군의 이름을 딴 신도시 하나가 탄생한다. 터키 실리시아 지방의 폼페이오폴리스(Pompeiopolis)다.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2000여년 전 대승리의 흔적이다. 원래 해적이 들끓던 곳으로 퇴치 후 원로원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세워진 해안도시다. 로마 시민의 절대적 박수와 지지가 기반이 된 것은 물론이다. 당대 로마 최고의 영웅이 바로 폼페이우스였다.

최근 현장에 가서 둘러봤지만 폼페이오폴리스의 초대형 대리석 기둥 수십 개가 지금도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전부 지중해로 곧바로 연결되면서 해안가에 바로 붙어 있다. 주변에 보호용 철책이 세워져 있어 안에서 살펴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기둥 주변에 각종 신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기원전 1세기 로마는 다신교 전성시대였다. 기둥의 경우 지금 남아 있는 것만 봐도 상당한 크기와 규모다. 그리스·로마 역사를 이해하는 기본이지만, 도시의 크기나 인구는 기념물의 기둥 크기나 양적 규모만으로도 가늠할 수 있다. 크고 굵고 많을수록 대도시 번영을 상징한다. 큰 대리석을 세울 만한 금전적 풍요가 뒷받침됐다는 의미다. 황제나 왕이 사는 궁궐보다 작은 집을 지어야만 하는 것이 중국식 아시아적 규범이다. 그리스·로마는 다르다. 상황이 허락된다면 크기·재료·장소를 구애받지 않는다. 아무리 크고 고급스럽게 세운다고 해도 황제가 나서 막지 않는다. 남을 규제하면서 호령하기보다 능력이 된다면 자기 스스로 최상·최고를 탈취하자는 세계관이다. 폼페이오폴리스에 있는 기둥 하나의 지름이 1m, 높이가 15m 규모란 점을 감안하면 기원전 1세기 아나톨리아의 뉴욕에 해당하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나톨리아의 뉴욕 같았던 대규모 도시

화무백일홍(花無百日紅)이라 했던가? 영웅 폼페이우스의 영광은 이후 19년간 지속되다 끝난다. 로마 공화정을 끝낸 종신 독재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주범이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넘어 로마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폼페이우스가 공화정의 수호신으로 추앙된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로마에 입성하기 직전 그리스 지역으로 피신해 전력을 가다듬는다. 기원전 48년 8월 폼페이우스는 그리스 평원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와 만난다. 병력 면에서 폼페이우스가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결론은 대패다. 역사가들은 패전의 가장 큰 이유를 ‘폼페이우스=정치군인’이란 측면에서 분석한다. 원로원의 응원·지지와 함께, 정치가 개개인이 폼페이우스의 군사작전에까지 개입한다. 당초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 공격에 대비한 지구전을 준비했다. 원로원은 빨리 공격해 로마로 돌아가자고 재촉한다. 그 과정에서 폼페이우스가 지구전을 포기하고 성급히 나서서 전쟁에 패했다고 역사가들은 분석한다. 군사적 판단이 아닌 정치가에게 지휘봉을 넘겨준 결과가 폼페이우스의 대패였다는 것이다. 이후 폼페이우스는 재기를 위해 이집트로 도망간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의 배다른 남동생이자 남편인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배신으로 살해당한다. 기원전 48년 9월 29일로, 정확히 58세 생일에 세상을 뜬다.

세계사 시간에 배웠겠지만,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와 더불어 제1차 로마 삼두정치의 주역들이다. 로마 공화정 통치체제가 무기력해지면서 3명의 장군이 합의한, 일종의 신사협정이 삼두정치였다. 기원전 59년에 이뤄진 것으로, 당시 카이사르의 위상은 폼페이우스의 상대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다. 그러나 10년 만에 크라수스에 이어 해적 소탕의 영웅 폼페이우스도 저세상으로 간다. 로마 역사에 빠지게 되는 이유 중 하나지만 암살·배신·음모는 어디에 가도 접할 수 있는 공통분모이자 흥밋거리다. 로마는 피를 통해 성장한 대제국이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종신 독재자에 올라선 카이사르도 저세상으로 간다. 가장 믿었던 브루투스를 비롯한 원로원의 정치인들이 사주한 암살의 결과다. 칼에 의한 상처가 무려 23군데에 달했다고 한다. 폼페이우스의 저주라고나 할까? 흥미롭게도 카이사르가 암살된 장소는 로마의 폼페이우스 극장이다. 기원전 55년 폼페이우스 승전을 기념해 건설된 극장이다. 당시 원로원 회의장은 폼페이우스 극장 무대 뒤에 들어서 있었다. 극장을 통해 회의장으로 들어가려던 중 암살된 것이다. 폼페이우스가 이집트 나일강 하류에서 살해된 지 4년6개월 만에 벌어진, 로마의 수많은 비극 중 하나다. 두 영웅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사라진 로마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제정로마로 진화한다. 암살·자살·배신으로 이어지는 황제 잔혹사도 등장한다. 마틴 루터 킹이 말했던가? “오직 피만이 역사의 바퀴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로마는 유럽·아시아·아프리카 육지는 물론 지중해 바다를 자기 집 앞마당으로 여긴 대제국이다. 영웅과 황제가 흘린 엄청난 피야말로 그 같은 인류 초유 역사 창출의 근본적 동인이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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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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