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나이 든 할머니가 마치 집 밥 내오듯 툭툭 내어주는 요리가 ‘인생 요리’로 등극한 경험. 누구나 한번쯤 있을 법한 이런 경험을 영국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아나스타샤 미아리 역시 2016년 겪었다. 친구와 함께 그리스 코르푸섬으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그곳에는 그녀와 이름이 같은 친할머니 아나스타샤가 살고 있었다. 할머니 아나스타샤는 손녀 일행에 자신만의 레시피로 만든 그리스식 도미 샐러드를 대접했는데, 이 요리는 젊은 아나스타샤가 잊지 못 할 최고의 요리였다.

이 날 이후 젊은 아나스타샤는 매년 할머니를 방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빵을 만드는 할머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전 세계의 나이든 여성 요리사들에 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좋지 않을까?’

이렇게 나온 것이 바로 책 ‘그랜드 디시즈(Grand Dishes)’다. 미국, 이탈리아, 폴란드, 영국 등 10개국 3개 대륙에 걸친 전 세계 61명의 여성 요리사들의 레시피가 담겼다. 이 여정엔 미아리의 오랜 친구이자 음식 전문 감독 이스카 럽톤과 사진작가 엘라 루이스 설리반이 함께 했다. 지난 3월 25일 첫 출판된 이 책의 출판 비용은 언바운드 출판사의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마련됐다. 출판 수익의 10%는 현대인의 외로움과 고립감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국의 자선단체 ‘외로움 끝내기 위한 캠페인’(Campaign to End Loneliness)에 기부할 예정이다.

“모든 음식은 음식을 만든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이들이 만든 음식은 항상 현지에서 조달한 신선한 재료에서 나온 제철 요리였다.”

책을 만든 미아리와 럽톤은 자신들의 홈페이지(https://www.granddishes.com)에서 전 세계 할머니들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레시피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족을 위해 자신만의 비법으로 “직관적으로” 음식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럽톤은 “할머니들은 계량기를 사용하거나 요리책을 보지 않았다. 모든 음식은 눈과 감으로 이뤄졌다. 말 그대로 ‘손맛’이었다”라고 말했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여성들이 가진 레시피를 공유하는 과정은 이들이 살아온 역사와 이들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배경을 담는 여정이기도 했다. 모든 할머니들의 음식엔 고향의 음식문화가 짙게 담겨 있었다. 30년 가까이 미국 브루클린에서 살아온 한 아제르바이잔 태생의 할머니는 자신의 부엌에 늘 박하 등 허브를 가득 담은 항아리를 두고 있었다. 박하는 아제르바이잔 요리에 자주 쓰이는 향신료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을 쓰는 여정은 제작자인 미아리와 럽튼 둘 모두에게 자신의 ‘뿌리’를 찾는 기회가 되었다. 독일에서 태어나 9살 때 영국으로 이주해 80년 이상 산 럽튼의 할머니를 만났을 때 럽튼은 자신의 가족사를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럽튼은 “평소 할머니는 자신의 이야기, 특히 독일 출신이란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손녀를 위해 아주 오랜 만에 독일요리 슈니첼을 만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내 안에 독일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이 매우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이 책에 엄청나게 감동받았다.”

미아리 역시 11살까지 코르푸섬에서 살았고 매년 아테네에 머물고 있지만, 그녀 역시 책을 만들면서 자신의 뿌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했다.

※주간조선 온라인 뉴스입니다.

김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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