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팔랑치
지리산 팔랑치

지난 4월 7일 강화도 고려산(436m) 입구에 들어섰다. 하지만 ‘4월 5일부터 등산로 전면폐쇄’라는 안내판을 보고 차를 돌려야 했다. 10일부터 입산통제한다는 공고를 보고 갔는데 이럴 수가, 당초 예상보다 진달래 개화(開花)가 빨라져 통제를 앞당겼다고 한다. 고려산은 작년에 이어 진달래 축제는 물론 입산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루 전인 4월 6일, 경남 창원의 진달래 명소인 천주산(638m)은 평일인데도 입구 쪽 천주암 주차장이 만석이었다. 좁은 경사길에 겨우 주차했다. 정상석인 용지봉에서 인증샷을 찍는데 마스크를 낀 채 10분 정도 줄을 서야 했다. 천주산은 이원수 선생이 쓴 국민동요 ‘고향의 봄’의 배경이 된 곳으로, 연분홍과 진분홍이 어우러져 가히 몽환적인 꽃대궐을 연출했다.

지난 4월 1일 방문했던 전남 여수 영취산(510m)도 끝물 분위기였지만, 정상 부근을 휘감은 진달래 군락지의 블링블링 색상은 쉽게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평일인데도 여수석유화학단지와 붙어 있는 주차장이 꽉 찼다. 경기도 과천에서 온 최경석(59)씨는 “절정보다는 약간 늦어 아쉽지만, 진달래와 바다와 어우러진 산세가 일품”이라고 말했다.

구례 산수유마을
구례 산수유마을

명암 엇갈린 진달래 명산지

같은 진달래 명산지이지만 코로나19로 이렇게 명암은 엇갈린다. 입산금지 여부는 봄꽃 군락지에 대한 접근성과도 관계 있다. 고려산은 비교적 나지막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경기 군포시 철쭉동산도 접근이 쉬워 매년 봄이면 50만명이 찾았으나 올해는 4월 15일부터 폐쇄되었다. 군포시 전역에는 철쭉 100만그루가 식재돼 장관을 연출하곤 했다.

반면 천주산이나 영취산은 다소 깐깐한 등산로가 있어 접근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탁 트인 높은 산에서는 2m 거리두기가 상대적으로 쉬워 보인다.

사실 “백신 수급이 어려워 여전히 코로나19가 엄중한데 굳이 꽃을 보러 가나”라는 질책의 이면에 “1년 넘게 코로나19 스트레스로 괴로운데 야외에서 봄꽃마저 못 보게 하면 어떡하나”라는 항변도 만만찮다. 다행인지 주요 등산로나 봄꽃 관광지가 원인이 되어 코로나19가 확산되었다는 소식은 드물다. 우려했던 ‘꽃놀이 대란’은 없었지만, 늘 조심할 일이다. 어쨌든 코로나19 2년 차인 올해에는 작년보다 상춘객(賞春客)이 늘었다고 봐야 한다.

‘봄’이란 단어는 ‘보다’에서 나왔고, 생명력 넘치는 봄꽃을 본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이해인 수녀는 ‘꽃 이름 외우듯이’란 시에서 “우리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이라고 적었다.

올해 봄꽃은 급하다. 지구온난화로 봄이 사라지고 곧장 여름이 닥친다는 징조일까. 겨울 추위를 가장 먼저 이겨 낸 ‘봄의 전령사’ 매화를 필두로 벚꽃,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등이 일찍 피고 일찍 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 벚꽃도 지난 3월 24일 개화했는데, 1922년 관측을 시작한 이래 99년 만에 가장 빨랐다고 한다.

하동 십리벚꽃길
하동 십리벚꽃길

홍매화가 선사한 몰아지경

실제 전국에서 봄꽃이 가장 먼저 피는 곳은 섬진강을 끼고 있는 하동, 구례, 광양 일대다. 지난 3월 10일 방문한 전남 광양시 다압면 매화마을은 강변 대형 주차장을 폐쇄한다고 했다가 밀려드는 차량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주차를 허용했다. 홍쌍리매실농원에서 흰색 매화는 물론 분홍 물감에 적셔 놓은 듯한 홍매화를 보면 몰아지경(沒我之境)에 빠진다고 관람객들은 입을 모았다.

지난 3월 24일에는 경남 하동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십리벚꽃길을 찾았다. 벚나무 1200여그루가 도로 양쪽에 자리 잡아 전국 제일의 벚꽃 풍광을 자랑했다. 교통체증을 뚫고 6㎞의 길을 지나면서 입이 연방 벌어졌다.

하지만 지난 3월 30일 다시 방문했을 때는 벚꽃이 지기 시작했다. 화생무상(花生無常)이 따로 없고, 재즈가수 말로의 ‘벚꽃 지다’란 노래가 제격이었다. “바람 손잡고 꽃잎 날리네 눈부신 슬픔들이 지네”라는 가사가 가슴을 여미었다. 하지만 차량 행렬과 인파는 크게 줄지 않았다.

물론 봄꽃을 보기 위해 지방까지 내려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 성동구 한강변에 있는 응봉산(95m)은 전국 최고의 개나리 군락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조선시대 임금이 사냥할 때 이곳에서 매를 놓아 꿩을 잡았다고 해서 매봉우리, 즉 응봉(鷹峰)이라고 이름 지었다. 응봉산은 동네 뒷산 규모이지만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전체가 노랗게 물들면서 장관을 이룬다. 응봉산은 암반층 지질인데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개나리의 본산으로 변했다.

이제 봄꽃은 벚꽃, 진달래 등이 쓸쓸히 퇴장하고 또 다른 에이스인 철쭉이 무대 위로 올라선다. 곳곳에서 철쭉제는 열리지 않지만, 철쭉 군락지 인기는 여전할 전망이다.

철쭉은 얼핏 보면 진달래와 헷갈린다. 실제 철쭉과 산철쭉과 진달래와 영산홍을 정확하게 구별할 실력이라면 꽃에 대한 전문가라고 봐도 무방하다. 생물학적 분류를 보아도 철쭉은 진달래속(屬), 진달래과(科)에 들어간다. 다만 진달래는 철쭉보다 먼저 핀다. 4월에 피는 진달래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는 5월이 되면 철쭉이 모습을 드러낸다. 또 진달래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지만, 철쭉은 잎과 꽃이 함께 핀다. 잎 모양도 진달래는 둥글지만 철쭉은 진달래에 비해 뾰족하다. 꽃 색깔은 진달래가 조금 더 선명하고 진하다.

산청 황매산
산청 황매산

철쭉 3대 명산지

우리 조상들은 진달래를 따서 전을 부쳐 먹거나 술을 담그기도 했는데 먹을 수 없는 철쭉은 ‘개꽃’, 먹을 수 있는 진달래는 ‘참꽃’이라고 했다. 4월 중순 대구 비슬산(1084m) 정상의 100만㎡(30만평) 분지에서 벌어지는 진달래 축제는 ‘참꽃 축제’로 불려왔다.

국내에서 철쭉은 3대 명산지가 있다. 지리산 바래봉, 경남 황매산, 그리고 소백산 연화봉이 바로 그곳이다. 지리산 바래봉(1167m)은 전국 제일의 철쭉 군락지로 유명하다. 바래봉이란 발산(鉢山)이라고도 하는데, 봉우리 모양이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 놓은 모습과 닮아 그렇게 붙여졌다고 한다.

1970년대 초반 농가소득 프로젝트의 하나로 바래봉 일대에 방목한 호주산 면양들이 독성 있는 철쭉만 남기고 잡목과 풀을 모두 먹어 자연스레 철쭉만 남아 군락지가 형성됐다고 한다. 철쭉에는 살충력이 있고 재채기를 유발하는 그라야노톡신이라는 독성물질이 들어 있어 면양들이 이를 기피했다는 것.

바래봉에 올라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정령치 등에서 종주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보통 전북 남원 용산마을 주차장에서 임도를 따라 4.8㎞ 정도 올라가는 방법을 택한다. 등산 경험이 적다면 다소 힘겹고 지루하겠지만 아래부터 피는 철쭉을 바라보며 쉬엄쉬엄 올라가면 된다.

뱀사골 쪽에 자리 잡은 팔랑마을에서 오르는 방법도 있다. 2㎞의 완만한 숲길을 오르면 팔랑치에 도착하고, 다시 1.5㎞의 환상적인 철쭉 능선 길을 지나면 바래봉에 도착한다. 팔랑마을의 인기는 매년 치솟아 최근 진입도로도 정비했고 주자창도 새로 단장했다. 팔랑치를 기준으로 바래봉과 반대 방향인 부운치 쪽으로도 1㎞ 정도 철쭉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팔랑치를 방문했던 정하규 AC닐슨 전무는 “상쾌한 봄바람 속에 내게 달려와 온몸으로 안기던 핑크빛 철쭉을 잊을 수 없다”면서 “새색시 발그레한 뺨처럼 수줍은 미소로 반겨 주었다”고 기억했다.

지리산 바래봉은 산의 하단부, 중간부 구릉지대, 정상부가 4월 하순부터 단계적으로 만개한다. 가장 화려한 정상부는 5월 10~20일에 만개했는데, 올해는 다소 앞당겨질 전망이다.

경남 합천과 산청을 함께 품고 있는 황매산(1113m)은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억새 명소로 각광받는다. 규모와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아직 군립(郡立)공원이다.

철쭉 시즌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정상 부근 주차장까지 차를 타고 올라온다. 합천 쪽이든 산청 쪽이든 주차장에서 내려 황매평전에 펼쳐지는 제1군락지, 제2군락지 순으로 철쭉을 감상할 수 있다. 황매산 철쭉 군락지는 해발 700~900m에 집중 형성되어 있는데 무려 100㏊로 축구장 140개 크기라고 한다. 2012년에는 미국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봐야 할 50선’에 들어가기도 했다.

황매산 역시 대규모 철쭉 군락지가 형성된 배경은 바래봉과 비슷하다. 본래 이곳은 소 떼의 방목장이었는데, 소들이 독성 있는 철쭉만 남겨놓고 모두 먹어 치우면서 지금의 장관이 연출됐다는 것이다. 황매산 철쭉은 5월 5~15일에 만개했는데, 올해는 다소 앞당겨질 전망이다.

바래봉이나 황매산에 비해 소백산 쪽은 가장 늦게 피는 편이다.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 사이 길게 뻗은 소백산 능선을 따라 5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피는데 해발 1300m가 넘는 연화봉 일대가 하이라이트다. 보통 소백산 희방사에서 출발하여 0.8㎞의 깔딱고개를 올라가 연화봉에 도착하는(편도 4㎞) 등산로를 택한다. 땀 흘리며 올라가는 숲길 곳곳에서 연분홍빛 철쭉을 만날 때 느끼는 상쾌함은 그만이다. 아니면 죽령주차장에서 7㎞의 임도를 묵묵히 올라가 천문대에 도착하고 거기에서 연화봉까지 이어지는 철쭉 군락지를 즐길 수 있다.

위의 3곳 정도는 아니지만 경기도 가평과 남양주에 있는 연인산과 서리산도 철쭉 명소로 꼽힌다. 다만 등산로가 쉽지는 않다. 연인산(1068m)의 경우 예쁜 이름과는 달리 경사도가 만만찮아 ‘연인끼리 왔다가 싸우고 간다’는 속설까지 있다. 백둔리 시설지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소망능선을 타고 올라가는 등산로가 최단 코스이다. 5월 20일 전후로 절정을 이루는데 유달리 화사한 산철쭉의 자태가 돋보인다는 평가다.

서리산(832m)은 보통 축령산과 연계 산행을 많이 한다. 5월 시즌에는 철쭉동산에 등산객 반, 꽃 반이라고 할 정도다. 서리산의 철쭉 터널을 잊을 수 없다는 등산객이 많다.

이밖에 전남 장흥군 제암산(807m)은 진분홍 자생철쭉이 많아 사진작가들이 특히 좋아하고 인근의 보성군 일림산(667m)도 330여㎡(100만여평)에 달하는 철쭉 군락지로 인기를 모으는 곳이다.

이렇게 마지막 봄꽃인 철쭉이 부르고 있지만, 코로나19의 위세는 여전하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방역수칙을 잘 지켜야 안전하고 감동적인 철쭉 기행이 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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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섭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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