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재보궐선거의 화제는 단연 ‘이남자’였다. 대통령선거 레이스에서도 여야는 청년층 포섭에 사활을 걸 기세다. 벌써 각종 청년 공약이 난무한다. 정치권뿐만이 아니다. 요즘은 어디서나 청년 담론이 요란하다. 과연 이런 현상이 실제로 청년 문제 해결로 이어질까.

이 물음에 주저없이 “노!”를 외치는 도발적인 문제작이 있다. 바로 김선기의 ‘청년팔이 사회’(2019)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요즘 난무하는 청년 담론은 청년을 위하기보다 오히려 ‘청년을 팔아’ 각자 자신들의 잇속이나 챙기려고 한다. 이제 청년 담론도 이런 구태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처럼 근시안적으로 ‘청년’에만 매달리지 말고, 사회 전체 맥락 속에서 청년 문제를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는 이야기의 역사는 유구하다. 이런 초보적 세대 담론은 출생 순서에 따라 사람들의 기질을 단순하게 범주화한 것이다. 또한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세대 담론이 주로 소수의 사회 지도층에게만 적용되었다. 특히 엘리트들이 스스로를 청년이나 신세대로 규정하며 자부심을 고취했다. 이런 담론들은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청년 담론은 그 양상이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청년 담론은 특정한 연령층의 인구 전체를 지칭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더구나 그것은 당사자 스스로가 아니라, 언론·기업·광고회사·전문가 등이 주도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입장과 필요에 따라 N(Net)세대, 88만원 세대, G(Global)세대, 3포 세대 등을 양산해냈다.

특히 88만원 세대 담론이 출연한 이후 쏟아진 수많은 세대 담론은 대부분 청년 세대를 기성 세대에 비해 경제적 약자의 위치에 놓았다. 세대 간 불평등도 심각하지만, 세대 내 불평등이 더욱 심각하다는 객관적 사실은 아예 무시되었다. 애초부터 이런 담론들은 과학적이기보다 정치적인 성격이 강하다. 다양한 캠페인을 통해 88만원 세대에서 시작되어 N포 세대로 이어진 ‘불쌍한’ 청년상은 오늘날까지 우리 의식 속에 확고하게 정형화되었다.

하지만 이를 놓고도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은 청년들에게 전혀 다른 주문을 한다. 진보 진영은 “투표를 통해 노인과 보수에 대응하라”고 요구한다. 반면 보수 진영은 “너 자신의 무지와 386의 억압을 깨달아라”라고 촉구한다. 이처럼 청년 담론은 어떻게 그들을 자신의 진영으로 포섭할지를 두고 다투는 투쟁의 장이 되고 말았다. 그런 담론은 담론 생산자들의 정치적 입장이 투영된 청년상에 근거할 뿐, 정작 객관적 실체는 모호한 실정이다.

이처럼 오늘날 청년은 외부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해석되는 존재로 전락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타자화·객체화되어, 더 이상 중장년층과 동등한 사회적 위치를 지닌 주체가 아니다. 단지 미성숙한 존재, 보호나 위로를 받아야 할 존재, 계도되어야 할 존재, ‘경험치가 적은’(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발언) 존재일 따름이다. 이런 ‘애들’은 정치권의 좋은 먹잇감이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20대의 투표율은 초미의 관심사다. 그들의 실제적 처지는 외면당한 채 오로지 그들의 투표율만 중요하게 여겨진다. 투표율이 높으면 진보 진영이 웃고, 낮으면 보수 진영이 웃곤 했다. 그런데 지난 4·7 재보궐선거에서 그 공식이 깨졌다. 이를 통해 그동안 정치가 상상해 온 청년상이 얼마나 취약한지 드러났다. 그들은 결코 정형화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도그마에 사로잡힌 다른 세대와 달리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을 할 뿐이다.

요즘은 청년 세대를 놓고 마치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이 ‘3포 세대론’이다. 정작 청년들은 이 말에 불편함 내지 불쾌감을 느낀다. 자신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데도, 또는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는데도, 모든 상태나 행위를 일방적으로 포기로 규정당한다. 이런 와중에 3포 세대론은 급기야 N포 세대론으로 끝없이 확장되었다.

이런 담론의 가장 큰 맹점은 그것이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을 다니는 중산층 가정의 남성을 모델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해당하지 않는 청년들은 아예 시야에서 제거된다. 특히 비대졸자 빈곤층 청년이 그렇다. 또한 여성도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 특히 열악한 처지의 여성은 오히려 결혼과 출산을 통해 전업주부가 되는 길을 적극적으로 도모하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N포 세대론은 청년이라는 주체에게 특정한 행동 양식이나 생애주기적인 의무들을 부과하며 그것을 절대화한다. 그런 특수한 정상성 규범을 바탕으로 젊은 주체들을 사회제도와 구조로 재통합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연애, 결혼, 출산 등을 거부하며 규범에 저항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제거된다. 당연히 다양한 대안가족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대부분의 청년 담론은 청년을 새로운 문화를 개척해 나가는 능동적 존재가 아니라, 기존 규범을 수용해야 하는 수동적 존재로 상정한다. 그것은 기존 규범의 정상성을 해체하기보다 그것을 획득하지 못하는 청년들을 연민함으로써 오히려 청년들에게 규범을 강하게 강제한다. 나아가 이를 통해 연애·결혼·출산 그리고 ‘내 집 마련’ 등과 관련한 위계를 재생산한다.

이처럼 오늘날 청년 담론은 대부분 성인 외부자들에 의해 크든 적든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다. 그들의 눈에 청년은 보살핌이나 관리나 계도의 대상일 뿐이다. 그들이 주체 행세를 하며, 정작 청년들은 객체로 전락하고 만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최근에 청년 세대가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담론 생산에 나서려는 움직임을 보여 주목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청년 일반이 아니라 극히 일부 청년을 대표하는 데 불과하다는 성찰과 겸손이 필요하다. 또한 그들이 청년이라고 해서 청년 문제에만 매달려서도 곤란하다. 그것은 마치 여성은 여성 문제에만 진력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담론 생산자들은 사회 전반의 문제를 폭넓게 바라보고, 그런 전체 맥락 속에서 청년 문제를 재정립해야 한다.

최근 어느 대학 본교 학생들이 분교 학생들을 차별한다는 논란이 벌어졌다. 이를 두고 ‘요즘 애들’은 학벌주의에 찌들었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그러나 ‘요즘 애들’뿐만 아니라 ‘요즘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헬조선’은 청년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요즘은 누구나 살기 힘들다. 이처럼 시대적인 문제들을 세대적인 문제로 접근하면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청년 담론은 내부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무시하고, 또한 다른 세대와의 공통성과 연대성을 외면한다. 그래서 무턱대고 청년층 일반의 빈곤만 강조하다 보면, 사회 전반의 빈곤 문제나 청년층 내의 불평등 문제는 도리어 축소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세대 담론에만 함몰되지 말고 문제의식을 좀 더 확장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제는 청년 담론도 ‘탈청년’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도발적 주장이다.

지난 4·7 재보궐선거에서 드러났듯이 정치권이 ‘청년을 팔아’ 손쉽게 이득을 보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청년을 ‘애들’이 아니라 사회적 주체로 대하고, 청년 문제를 사회 전체의 맥락 속에서 접근해야 한다. 특히 그들은 이념적으로 정형화된 존재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존재다. 이런 점을 먼저 깨닫고 실천하는 진영이 청년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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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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