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5월 21일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이번에 바이든 정부의 한반도 정책이 어떻게 윤곽을 드러낼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그러나 한반도 정책도 미국의 세계 전략과 떼어놓고는 제대로 살펴보기 어렵다. 특히 “미국이 돌아왔다”는 바이든 선언은 모든 면에서 미국이 전형적인 입장으로 회귀하겠다는 신호다. 그것이 세계 전략 측면에서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마침 이에 관한 미국의 속내를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낸 문제작이 있다. 바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1997)이다. 이 책은 유라시아 대륙을 거대한 체스판에 비유해, 미국의 입장에서 그것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치밀하게 검토한다. 저자는 카터 대통령 시절에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바 있는 미국 조야의 원로다.

그는 미국이 패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대 제국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속방 간의 결탁을 방지하고 안보적 의존성을 유지시키며, 조공국들을 계속 순응적인 피보호국으로 남아 있게 만들고 야만족들이 하나가 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고 설파한다. 이렇듯 저자의 분석은 불쾌할 정도로 노골적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미국의 깊은 속내를 엿볼 수 있다.

오늘날 미국은 군사·경제·기술·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적인 힘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분야가 결합된 영향력이 미국을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과거 어떠한 제국도 전 세계에 걸쳐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만한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헤게모니가 도전받지 않고 계속 유지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근대 이래로 세계 정세를 좌우하는 지정학적 중추는 단연 유라시아다. 따라서 비(非)유라시아 국가인 미국이 유라시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 유지에 관건이다. 저자는 유라시아 대륙을 지역별로 분석한다. 우선 유럽은 미국과 종교적 전통이나 민주적 가치를 공유한다. 따라서 그곳은 유라시아에 대한 미국의 핵심적 교두보다. 그중에 영국은 이미 유럽에서 영향력을 상당히 상실했다.(최근에는 EU에서 탈퇴하기까지 했다.)

프랑스는 자존심이 강하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거 아프리카 식민지에는 결정적 영향을 미칠 정도이지만, 유럽 전체에 독자적으로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 독일은 유럽의 주도적 국가로 성장했지만, 주변국들의 경계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독일 역시 지역 정세를 독자적으로 좌우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미국의 목표는 독일·프랑스 연대에 기초한 유럽, 미국과 연결고리를 유지하는 유럽, 협력적 민주체제를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장하는 유럽이다. 미국은 유럽을 교두보로 삼아 동유럽은 물론, 새로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범대서양적 질서로 끌어들여야 한다. 나아가 장기적으로 러시아까지 그런 질서로 포섭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소련의 해체로 인해 러시아의 정체성과 미래가 불투명한 상태다. 러시아에는 서구와의 성숙한 전략적 파트너십 구축, 주변국들의 재규합, 세계적 반미동맹 구축 등의 선택지가 있지만, 당장은 어느 것 하나 마땅치 않다. 그럼에도 러시아의 종국적 선택은 유럽일 것이다. 다만 무조건적인 유럽이 아니라, EU 등을 확대한 범대서양적 유럽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러시아는 파트너로서는 너무 약하고, 돌봐줄 환자로서는 너무 강하다. 따라서 미국은 러시아가 범대서양적 유럽과 유기적 관계를 증대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동시에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등이 유럽을 향하게 해야 한다. 유럽과 미국은 팽창적이지 않고 민주적인 러시아와 적대적일 필요가 없다.

오늘날 유라시아에서 가장 불안정한 곳은 유럽의 동남쪽과 중앙아시아, 남아시아의 일부와 페르시아만 그리고 중동 등을 포괄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인종적·정치적·종교적으로 복잡하고 불안정하다. 한마디로 유라시아의 발칸이다. 러시아, 터키, 이란 등도 이 지역을 지배하기에는 정치적으로 약하고, 배타적으로 개발하기에는 경제적으로 빈곤하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지배적이 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개입하지 않기에는 너무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모든 역내 국가는 그들의 생존을 위해 미국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미국의 일차적 이해관계는 단일국가가 이 공간을 통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나라도 배제하지 않지만, 또한 어떤 나라의 독점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유라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효율적이기 위해서는 미국이 극동지역에 닻을 내리고 있어야 한다. 중국이 바로 극동의 닻이다. 중국은 지역적 강국으로 성장하겠지만, 세계적인 국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이것이 그동안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통적인 평가였다.) 따라서 미국은 중국을 지역적 강국으로 인정하면서 파트너십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전쟁책임론, 미국과의 특수한 안보관계 등으로 인해 경제대국이지만 역내의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하다. 향후 미·중 또는 미·일 관계의 변화에 따라 일본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투명하고 불안정하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이 계속적으로 미국의 특별한 동반자가 되어 미국의 세계적 사명에 함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역내 안정 달성을 위해 미국의 세계적 힘, 중국의 지역적 우월성, 일본의 국제적 지도력을 잘 조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최근에 시진핑의 중국은 중국몽(中國夢)이나 일대일로(一帶一路) 등을 앞세워 지역적 강국을 넘어 세계적 제국을 지향하고 있다. 소련 붕괴 이후 30년 만에 바야흐로 미국과 어깨를 겨누려는 국가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와 차별화에 나서는 바이든도 중국에 대한 정책 기조만은 계승하고 있다. 과연 중국이 미국의 견제와 포위를 뚫고 발전을 지속할지, 아니면 한계에 부딪힐지가 향후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가를 분수령이 될 것이다.

우리야말로 이처럼 심각한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 갈등이 고조될수록 양국은 남북화해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중국은 통일한국이 미국으로 경도될 것을 우려한다. 반면 미국은 통일한국이 중국으로 경도될 것을 우려한다. 특히 한·일 갈등은 미국의 우려를 부채질한다. 저자는 “극동의 조그만 반도 반쪽이 미국의 힘이 내려앉을 수 있는 횃대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그만큼 한국은 미국에 중요하다. 중국에 북한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고립주의와 개입주의가 대립하고 있다. 그중에 저자는 적극적 개입론자다. 그에게 미국 없는 세계는 무질서일 뿐이다. ‘거대한 체스판’을 통해 그는 미국의 적극적 개입을 역설한다. 후속작인 ‘선택’(The Choice·2004)에서는 그런 개입이 일방적 지배가 아니라, 모범적 리더십을 통해 행사되어야 한다고 부연한다.(주간조선 제2646호 본란 참조)

거대한 체스판이 앞으로도 미국의 뜻대로 관리될지 두고 볼 일이다. 오늘날 격화하고 있는 미·중 갈등이 일차적 관건이다. 그것이 우리의 안보와 경제까지 뒤흔들고 있다. 이런 격랑 속에서 애오라지 남북대화에만 목을 매는 것은 공허하다. 지금은 넓은 시야로 차분하게 국가적 생존을 도모할 때다. 그것이 아마 이번 정상회담에 임하는 우리 측의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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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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