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금산사의 미륵전.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

전라도는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대이다. 논밭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특히 쌀농사를 짓는 데에는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전라도에는 고대부터 저수지가 축조됐다.

대표적으로 세 곳의 대규모 저수지가 있다. 익산의 미륵사지 앞에는 둘레 70리(27㎞) 크기의 저수지 황등제가 있었고, 김제 금산사 옆에는 벽골제가 있다. 또 고창 선운사 옆에는 눌제가 있었다. ‘제(堤)’는 물을 가두는 제방(堤防)을 가리킨다. 이 세 곳의 ‘제’ 옆에는 공통적으로 미륵사찰이 있었다. 쌀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믿는 불교신앙이 미륵신앙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쌀 수확을 마치고 미륵불 앞에 추수감사제를 올렸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제방 3곳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이 바로 벽골제이다. 벽골제라는 이름은 ‘볏골제’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금산사 일대는 벼가 많이 자라는 ‘벼의 골’, 즉 ‘볏골’이었다. 전라도 최대의 쌀을 생산하는 고장의 중심 사찰이 바로 금산사였고, 금산사 미륵불이 전라도 농민이 믿고 의지하는 부처님이었다. 미륵전 터는 원래 용이 살던 늪지대였는데, 진표율사 당대에 숯으로 터를 메우고 법당을 만들었다. 경주 황룡사, 양산 통도사, 익산 미륵사, 그리고 금산사 미륵전도 용이 살던 터였다. 고대에는 용이 살던 터에 법당을 짓는 관습이 있었다. 용을 대체한 것이 미륵불이다.

금산사에는 구룡토수(九龍吐水)의 전설이 전해진다. 이 터에 살던 9마리의 용이 물을 토하면서 미륵불을 지키는 호위신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전설이다. 백제가 망한 뒤에 백제 유민들이 금산사 미륵불을 더욱 의지하지 않았을까 싶다. 갈 곳 없는 망국 백성이 의지할 데는 종교, 신앙일 수밖에 없었다. 미래에 미륵불이 출현하면 좋은 세상 오리라! 탄압에서 벗어나고 모두가 잘 사는 좋은 세상. 양반, 상놈 없어지는 평등 세상. 그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인물이 진표율사이고, 희망의 본산이 금산사 미륵전이었다. 당연히 그 미륵불은 크게 조성할 수밖에 없다.

백제 유민들의 천년 기도

미륵전의 미륵삼존은 지금 보기에도 엄청난 크기이다. 진표율사 당대인 8세기 후반에는 더욱 크게 보였을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늘나라 천당이 한 층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는 하늘나라가 33층이다. 33천(天)이 있다고 믿는다. 하늘나라 가운데가 미륵불이 계시는 도솔천(天)이다. 도솔천에 사는 천인(天人)들은 모두 키가 크다고 한다. 4~5m 크기이다. 불교 신자들이 꿈에 보는 미륵불이나 도솔천의 천인들은 모두 큰 사이즈로 나온다. 미륵불을 조성하는 석공들은 그러한 꿈을 직접 꾸거나 아니면 체험담을 듣고 불상을 조성한다. 자기 맘대로 조성하는 게 아니다. 불교의 불상을 조성하는 장인들도 계율을 지키면서 나름대로 수도생활을 해야만 불상을 제대로 조성할 수 있다. 영험한 꿈이라도 꾸어야 한다. 삼겹살에 소주나 먹고 사는 게 아니다. 아무튼 망국의 백성, 백제 유민들의 메시아가 바로 금산사 미륵불이었고, 이 미륵불이 나타나기를 백제 유민들은 천년이 넘게 기도하였다. 전라도민의 정신이 모아진 곳이 바로 금산사 미륵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제에서 전라도로 이어지는 이곳 민초들의 정신이 농축액처럼 모여 있던 금산사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정유재란은 전라도를 타격하는 데에 목표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곡창지대인 전라도가 보전되는 바람에 전쟁을 못 이겼다고 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특별히 전라도를 초토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금산사 출신 승병장이 뇌묵처영(雷黙處英)이다. 승군 총대장이 서산대사라면 왼팔은 사명대사이고, 오른팔은 뇌묵처영이었다. 서산대사는 당시 노인이었으므로 전쟁터에 나가지는 못했고, 사명과 뇌묵처영이 실전을 진두지휘하였다. 그러나 뇌묵처영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거의 묻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뇌묵(雷黙)은 뇌성벽력 같은 용맹함을 지녔지만 그의 행적은 침묵 속에 묻혀 있다. 그는 정유재란 때 왜군이 진입해 오던 구례 석주관 전투, 남원성 전투, 그리고 금산사 일대 전투, 전주에서 진안 넘어가는 곰티재 전투, 행주산성 전투를 지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 근처의 행주산성전투만 하더라도 산성 입구에서 왜군과 직접 육박전을 벌인 부대는 뇌묵처영이 지휘하던 승군들이었다. 권율은 후방에 있었다. 가장 치열한 최전방에는 승군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승군 지휘를 뇌묵처영이 하였다.

왜군들은 뇌묵처영에게 복수하기 위해 뇌묵처영의 출가 본산지인 금산사로 쳐들어와서 철저하게 불을 지르며 초토화시켰다. 금산사는 넓은 평지에 자리 잡은 절이라서 건물이 수백 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 수백 칸이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 버렸다. 금산사 인근의 사찰들, 예를 들면 귀신사(歸信寺)도 이때 불탔다. 불에 타고 남은 것은 미륵전의 쇠로 만든 좌대(座臺)였다. 미륵불 발밑을 받쳐주는 밥솥 형태이다. 말하자면 쇠솥 형태이다. 지금도 미륵전의 반지하에는 이 좌대가 남아 있다. 인근 전라도 사람들은 좌대를 손으로 만지면 재수가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필자도 초등학교 다닐 때 미륵전에 오면 어른들 따라서 이 좌대를 만지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진표율사 당대에 만들었던 좌대이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좌대 위에 다시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조선 중기 때 환성지안(喚醒志安·1664~1729) 법사가 금산사에서 대중 법회를 열었다. 이때 참석한 인원이 1500명 정도 되었다. 전화가 없고, 자동차도 없었던 당시로는 엄청난 인력 동원이었다. 메시아 출현의 신앙이 어려 있는 금산사에서 대규모 불교도가 모였다는 소문은 한양 정부를 긴장시켰다. ‘이러다가 혹시 반란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 다른 사찰도 아니고 하필 금산사에서 벌어진 집회였기 때문에 정권이 긴장하였다고 보인다.

한양 정권에서는 환성지안을 제주도로 유배를 보낸 다음에 장살했다. 금산사 집회를 정치 집회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환성지안을 장살했다고 해서 금산사의 미륵불 기운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구한말에도 금산사는 후천개벽의 성지로 믿어졌다.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금산사 일대에서 출현한다는 천년이 넘는 믿음이 다시 작동한 셈이다. 강증산과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이 금산사와 인연이 깊다. 강증산은 호가 시루 증(甑) 자를 써서 증산(甑山)이다. 시루는 무엇인가? 떡을 찔 때 솥 위에 올려 놓는 것이 시루이다. 강증산이 자신의 호를 떡시루의 의미가 들어 있는 증산으로 정한 데에는 민중들에게 떡을 주겠다는 의도가 있다. 시루는 밑바탕에 솥이 반드시 필요하다.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불 좌대를 바로 그 ‘솥’으로 여겼다. 자신이 미륵불이라는 이야기이다. ‘내가 죽은 후에는 미륵전의 미륵불로 다시 오리라’라고 하는 게 증산의 예언이기도 하였다.

금산사 미륵전 앞에 있는 석연대는 정유재란 때 불에 타지 않고 살아남았다.
금산사 미륵전 앞에 있는 석연대는 정유재란 때 불에 타지 않고 살아남았다.

경상도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강증산이 여러 가지 신통, 이적을 보여주자 금산사 일대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왜정 때 특히 그랬다. 경상도에서도 일본 놈 물러가고 좋은 세상이 오면 금산사 용화동 일대가 제일 첫 번째 해방구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왜정 때 경상도 사람들이 집 팔고 논 팔아서 이곳 금산사 밑으로 모여들었다. 1970~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금산사 밑의 용화동 일대에는 경상도 말씨를 쓰는 노인들이 많았다. 왜정 때 이주한 경상도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나라는 일본에 망했고, 성질 과격한 극소수는 만주에 가서 총 들고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성질이 좀 덜 과격하고 일본 놈 밑에서 살기는 싫었던 사람들은 금산사 일대로 이주하여 신흥 종교를 믿었다. 미륵불 메시아가 불교라는 울타리를 넘어 민초들의 신종교를 떠받쳐 주는 신앙으로 확대된 것이다.

정읍 입암리에 본부를 두고 있었던 보천교가 왜정 때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보천교의 창시자 차경석도 금산사와 강증산 신봉자였다. 탄허스님의 아버지 김홍규가 바로 차경석의 핵심 참모였다. 보천교 목방주(木方主)를 맡았다. 목방주는 동쪽 방향의 주인이라는 의미인데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 입암리의 보천교 본부 건물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탄허스님도 출신 배경에는 금산사 미륵신앙이 깔려 있는 셈이다.

원불교의 소태산도 젊었을 때 금산사의 송대(松臺)라는 건물에 와서 머물렀다. 방등계단 밑의 오른쪽에 있는 집이다. 그래서 원불교 사람들도 금산사 ‘송대’는 특별한 감정으로 대한다. 익산에 있는 원불교 총본부 내에도 소나무 숲이 우거진 ‘송대’라는 이름을 가진 공간이 있다. 금산사 송대와 연관이 있다. ‘彌勒(미륵)’을 파자하면 ‘이(爾) 활(弓)로 힘(力)을 키워서 혁명(革)하자’라는 뜻이 나온다. 이 해석은 전북 부안 출신으로 고려 공산당 초대 당수를 지냈던 김철수(金綴洙·1893~1986)로부터 필자가 1980년대 초반에 직접 들었던 이야기이다.

마상혈, 일명 벼슬봉이 정면에

금산사 터를 보려면 방등계단 위에서 보아야 한다. 정면으로 산봉우리를 바라보면 나지막한 봉우리 형태가 마상혈(馬上穴)로 보인다. 풍수가에서는 일명 ‘벼슬봉’ 또는 ‘마체(馬體)’라고 부르기도 한다. 둥그스름한 봉우리 두 개가 연이어 붙어 있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약간 작은 봉우리가 나란히 포진한 모습이다. 이 모습이 말안장의 모습과 같다. 그래서 이름에 마(馬)가 들어간다. 이 마상혈이 집터나 동네 앞에 있으면 그 터에서 높은 벼슬을 하는 인물이 나온다고 믿는다. 벼슬은 말을 타고 온다. 이렇게 놓고 보니까 금산사에서 조계종단의 책임자인 총무원장도 두 명이나 배출되었다. 같은 사찰에서 총무원장 2명이 나온 것도 기록이다. 월주 스님과 원행(圓行) 스님이다. 월주의 제자가 원행이다. 사제지간에 총무원장을 배출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문중이 금산사 문중이다.

미륵전 터는 오공혈(蜈蚣穴)로 알려져 있다. 모악산에서 내려온 산줄기의 모습이 지네(蜈蚣) 형태이다. 지네는 앞에 닭 봉우리가 있어야 격에 맞다. 지네와 닭은 서로 마주 보아야 힘을 받는다. 그런데 금산사 미륵전 앞에 닭 봉우리가 있다. 미륵전 앞에서 바라보이는 봉우리 이름은 계룡봉(鷄龍峰)이다. 계룡산도 있지만 금산사 앞에는 계룡봉이 있다. 계룡봉 아래 쪽으로 내려가면 용화동이 있다. 왜정 때 후천개벽의 성지로 믿었던 공간이다. 금산사는 진표율사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백제에서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압박당하던 민초들의 성지이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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