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nerd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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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명한 필름 누아르(Film Noir) 전문가 에디 멀러(62)를 영상 인터뷰했다. 멀러는 최근 필름 누아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저서 ‘다크 시티: 로스트 월드 오브 필름 누아르(Dark City: Lost world of Film Noir)’의 개정 증보판을 출간했다. 그는 ‘필름 누아르 파운데이션’의 창설자로서 영화의 복원과 보존사업에 매진해 왔다. 아울러 매주 토요일 밤 고전영화 전문 케이블 TV인 ‘터너 클래식 무비스’의 인기 프로 ‘누아르 앨리’의 소개자로도 활약하고 있다.

필름 누아르는 ‘어두운 영화’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프랑스 비평가들이 전후 미국에서 만들어진 범죄영화에 붙여준 이름이다.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염세적이고 운명적이다. 주인공 남자는 냉소적이며 여자는 이런 남자를 유혹해 범죄를 저지르게 하면서 함께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이런 여자를 팜므 파탈(femme fatale·프랑스어로 운명적 여자라는 뜻)이라 부른다. 멀러는 인터뷰에서 해박한 지식으로 길지만 군더더기 없는 답변을 했다. 그는 명랑한 사람으로 말재주가 대단했다. 멀러는 샌프란시스코 인근 섬인 알라메다의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 최근 출판한 책이 1998년에 나온 초본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처음에 책을 썼을 때 다 못 쓴 세 편의 챕터를 이번에 추가했다. 과거 출판사 측에서 그 챕터들을 다 쓰면 책이 너무 길어진다고 거절한 내용이다. 1998년에만 해도 난 지금처럼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출판사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땐 그냥 필름 누아르에 관한 책을 쓰는 한 사람에 불과했었다. 그때 못 쓴 세 편의 챕터 중 첫째 것은 신문사와 다른 뉴스 매체 종사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누아르이고, 둘째 것은 교도소를 무대로 한 내용과 함께 교도소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 것은 연예산업과 관련된 누아르다. 이와 함께 책의 초판이 나온 다음에 새로 본 영화들이 많아 그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을 추가로 썼다. 그런데 1998년 이후 내가 본 영화들 중 몇 편은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가 기부한 돈으로 복원한 것들이다.”

- 당신의 필름 누아르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왜 그런 장르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필름 누아르를 사랑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그런 영화들이 나온 시대인 전후 미국 역사를 내가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로 이 영화들을 좋아하게 된 까닭은 내 아버지에 대해 갖고 있던 연결 고리 탓이다. 나를 늦게 본 아버지는 샌프란시스코 신문사의 유명 기자였다. 나는 아버지가 대기자라는 것을 신문기사와 사진을 통해 알았다. 필름 누아르 영화들을 볼 때면 늘 아버지의 가정생활을 찍은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주로 권투기사를 썼는데 권투야말로 가장 누아르적인 스포츠다. 그래서 그런 영화들을 볼 때면 ‘와, 이것이 내 아버지가 산 삶이로구나’ 하며 경탄했었다.”

버트 랭커스터(오른쪽)와 애바 가드너가 출연한 필름 누아르 ‘킬러스’의 한 장면.
버트 랭커스터(오른쪽)와 애바 가드너가 출연한 필름 누아르 ‘킬러스’의 한 장면.

- 필름 누아르가 나오던 시대적 배경은 어떠한 것이었나. “20세기 중반은 미국이 모든 면에서 정점에 이른 때였다. 그때는 건축이나 패션 등 모든 면에서 스타일이 멋질 대로 멋졌던 때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갑작스레 순수의 상실이 닥쳐왔다. 이로 인해 모든 것이 거의 하룻밤 사이에 변화했다. 필름 누아르는 이런 정점에 이른 스타일과 이의 급작스러운 붕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이 영화들을 좋아하는 까닭 중 하나는 향수에 젖지 않고도 과거 정점에 이르렀던 모든 것의 스타일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필름 누아르는 결코 향수에 젖게 만드는 영화는 아니다. 그것은 사정없이 거칠고 냉소적이며, 또 순수의 상실을 예고하고 있다. 나를 비롯해 사람들이 이런 영화들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스타일과 함께 섹시하기 때문이다. ‘킬러스’<사진>에서 공연한 버트 랭커스터와 애바 가드너 등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멋있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필름 누아르는 그런 멋진 문화의 어두운 앞날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 필름 누아르라는 이름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2차 대전 중 나치의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 사람들은 미국 영화를 볼 수가 없었다. 프랑스 사람들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영화 팬들이다. 그러다가 2차 대전이 끝나자 그동안 못 보던 미국 영화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를 본 프랑스 비평가들은 전후 만들어진 이들 영화의 분위기와 성질이 무언가 과거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을 만든 감독들 중 여러 명이 나치를 피해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파리의 한 극장에서 1년간 프랑스 사람들이 과거 4년 반 동안 못 본 미국 영화 회고전이 열렸는데 이를 본 비평가 니노 프랑크가 이들 영화에 대해 필름 누아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들이 과거 영화들에 비해 분위기만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미술과 촬영 면에서도 어두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의 변화는 반드시 범죄영화뿐만이 아니라 다른 영화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에디 멀러는 “필름 누아르는 이렇게 유럽의 어두운 시각적 감각과 함께 1930년대 미국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던 대중잡지에 연재된 범죄소설이 지닌 미국 고유의 이야기 스타일이 접합돼 탄생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1930년대 대중잡지에 연재되면서 크게 인기를 모았던 범죄소설 작가들인 대실 해밋과 제임스 M 케인 및 코넬 울리치 등의 소설은 당초 1930년대에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는 잘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았다”며 “하지만 전후에 어두운 분위기와 암담한 시각적 감각이 주어지면서 그런 얘기들을 영화로 제대로 살릴 수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에디 멀러는 고전영화 전문 케이블TV인 ‘터너 클래식 무비스’의 인기프로 ‘누아르 앨리’도 진행하고있다. ⓒphoto 유튜브
에디 멀러는 고전영화 전문 케이블TV인 ‘터너 클래식 무비스’의 인기프로 ‘누아르 앨리’도 진행하고있다. ⓒphoto 유튜브

- 할리우드 영화의 흐름이 어떻게 변했다고 보는가. “그 흐름의 변화를 필름 누아르의 시각으로 보고 있다. 한 가지 매력적인 변화는 요즘은 영화들이 많은 여성 영화인에 의해 만들어질 뿐 아니라 영화의 주인공도 여자가 많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초기 누아르 시절에는 영화학자들이 여자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면 ‘여성영화’라고 무시했었다. 당시 슈퍼스타였던 바버라 스탠윅이 나온 ‘소리 렁 넘버’와 조안 크로포드가 나온 ‘댐드 돈 크라이’ 등이 다 그렇게 불렸다. 관객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여자가 주연을 해도 극장을 찾았으나 유독 학자들만이 이런 영화들을 ‘여성영화’로 부르면서 무시한 것이다. 그들은 필름 누아르를 남성 위주의 영화로 생각했는데 이는 틀린 생각이다. 여자가 주인공인 필름 누아르들도 있었지만 극장 주인들도 이들을 다 ‘여성영화’나 ‘소프 오페라(여성용 멜로드라마)’라고 불렀다. 1946년작 ‘마사 아이버즈의 이상한 사랑’에 나온 바버라 스탠윅은 영화에서 혹독하고 지배적인 사업가로 나온다. 그런데도 ‘소프 오페라’라고 무시당했다. 그런 영화는 학자들이 필름 누아르 범주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다.”

- 요즘 할리우드가 과거의 누아르 필름으로부터 뭘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간결하게 쓰는 방법이다. 과거에는 극장에서 2편의 영화를 동시 상영했기 때문에 상영시간 90분짜리도 길다고 생각했었다. 110분짜리야말로 대하서사극이었다. 따라서 A영화에 이어 상영되는 B영화인 필름 누아르들은 대부분 80분 미만이었다. 저명한 각본가 달튼 트럼보(후에 ‘스파르타쿠스’ 각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1930년대 워너브라더스사에 일하러 갔을 때 제작자들이 한 말로 이야기를 처음부터 쓰기 시작할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시작해 끝을 맺어라.’ 그런데 요즘은 영화와 TV 작품들은 길이가 너무 길다. TV시리즈 같은 것은 8회나 10회까지 계속되는 것이 흔해 그런 것들을 보다가 지친다. ‘여기서 언제 빠져나오지’ 하고 자문할 때가 많다.”

박흥진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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