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블 영화에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 화려한 볼거리와 공들여 구축한 세계, 그리고 그곳을 누비는 믿음직하고 친숙한 영웅들. 한 편 한 편 개봉할 때마다 충직한 팬들을 확보해 온 마블의 시리즈물은 어느덧 2000년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로 자리 잡았다. 나 역시 마블의 신작이 개봉할 때마다 극장을 찾았던 것 같은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팬이 되지는 못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남성 캐릭터의 독주였을 것이다. ‘어벤져스’는 사실상 남성 캐릭터로만 이루어진 세계여서 내가 이입할 여지가 크지 않았다. 여성 영웅이 있긴 하지만 대상화를 벗어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고, 성 역할을 타파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 스칼렛 조핸슨은 ‘아이언맨2’에서 자신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성적으로 그려져 씁쓸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창작자의 철학이 드러나지 않는 데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철학이 없는 히어로는 사람을 구하는 기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벤져스’는 이제껏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명확하게 보여준 적이 없다. 반면 악당들의 철학은 때때로 명쾌하게 드러났다.

어떤 악당은 현실세계의 문제를 아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는데, (가령 타노스는 인류가 지구에 가하는 폭력을 문제시했다) 악당이라는 이유로 그 문제의식마저 가볍게 짓밟혀야 했다. 나는 영화가 현실의 어떤 문제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그래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인지 구체적으로 대답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블랙 위도우’를 본 후, 이제야 그에 대한 대답을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나타샤’(스칼렛 조핸슨 분)의 가려져 있던 과거사를 공개하며 마블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는데, 동시에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는 데도 성공했다. 지금껏 배제되어 온 블랙 위도우의 서사를 입체적으로 세우면서 감독의 철학도 분명하게 드러낸 셈이다.

‘블랙 위도우’는 나타샤 로마노프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타샤는 엄마와 아빠, 여동생 ‘옐레나’(플로렌스 퓨 분)와 함께 살고 있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들은 그러나 악당인 ‘드레이코프’가 주축이 되는 세계, ‘레드룸’에 의해 꾸려진 위장 가족이다. 어느 저녁 네 식구는 ‘임무 수행’을 위해 뿔뿔이 흩어지고, 나타샤와 옐레나는 레드룸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위도우’(세뇌당한 킬러)로 길러지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둘 역시 헤어진다.

그로부터 21년 뒤, 나타샤와 옐레나는 재회한다. 둘은 만나자마자 격한 싸움을 벌이는데, 옐레나는 나타샤가 자신을 레드룸에 버려두고 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드레이코프를 죽였다고 굳게 믿고 있던 나타샤는, 동생이 여전히 위도우로 살며 고통받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자매는 레드룸을 찾아내 해체시킬 계획을 세운다.

드레이코프는 버려진 여자아이들을 납치해 암살자로 길러내는 극악무도한 악당이다. 훈련 과정에서 약한 아이들은 죽이고, 전체의 5%만을 선별해 살인 병기로 만든다. 선발된 위도우들은 자궁 적출 수술을 받게 되며, 이후 정신적·화학적 세뇌를 당한다. 드레이코프의 페로몬 냄새를 맡은 위도우들은 그를 공격할 수 없게 되는 식이다. 세뇌당한 상태였던 옐레나는 우연히 다른 위도우로부터 해독제를 받고 각성에 성공했는데, 관건은 이 해독제를 지키는 일이다. 해독제를 써서 갇혀 있는 다른 위도우들을 구출하고 각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현실 보여줘

세뇌, 그리고 각성과 구원. 어딘가 익숙한 단어들 아닌가. ‘블랙 위도우’는 마블이 작정하고 만든 여성 영화에 가깝다. 상기한 단어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나타샤와 옐레나의 지나간 시간은 지금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대다수 여성들은 여성을 틀 지우고 규정하는 명제들 속에 자기 자신을 지우며 살아왔다. 때때로 다른 여성들을 적으로 여기고 상처 내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은 그 세계가 너무 익숙했던 나머지 머리 위 닫힌 천장을 의심조차 못했다. 그러나 운 좋게도 먼저 그 세계에 균열을 내고 밖으로 빠져나간 여성들은 이제 페미니즘이라는 도구를 통해 다른 여성들을 각성시키고 있다.

내게 ‘블랙 위도우’가 말하는 해독제는 인식론으로서의 페미니즘으로 보였다. 과거 히어로 영화에서 구원의 대상으로 묘사돼 온 여성들은 더 이상 남성 영웅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위도우들은 그들만의 힘으로 연대해 위기에서 탈출하며, 탈출한 뒤에는 또 다른 이들이 그곳을 벗어나도록 돕는다.(이들은 생김새도, 피부색도 모두 다르다. 나타샤와 옐레나 역시 혈연으로 엮인 자매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감독 ‘케이트 쇼트랜드’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오직 각성과 연대만이 여성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영화 곳곳에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도 가볍게 섞여 있다. 오랜만에 만난 중년의 아빠 ‘알렉세이’가 두 딸에게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과거 이야기를 묻기는커녕, ‘캡틴아메리카’가 자신의 싸움 실력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느냐며 비대한 자아를 과시할 때는 쿡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온다.(듣다 못한 나타샤는 오랜만에 만나서 한다는 말이 그것뿐이냐며 한마디 한다.) 생리에 대한 조롱조 농담에 옐레나가 목소리를 높일 때는 어쩐지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과는 달리 영화 ‘블랙 위도우’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조금 갈리는 것 같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있어 보이콧할 거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본래 어벤져스의 임무인 ‘악당과 싸워 세상을 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세상의 절반을 깨우는 이야기가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가 아니면 무엇이냐고. 남성 영웅의 이야기가 모든 미디어를 장식해 온 지난 몇십 년간은 왜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냐고.

더욱이 ‘블랙 위도우’는 영화 바깥에서도 뚜렷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성 감독 케이트 쇼트랜드, 그리고 여성 배우들이 중심이 되는 이 영화는 분명 시장의 질서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나타샤가 터뜨린 해독제가 객석의 어디까지 닿을지.

개봉 2021년

감독 케이트 쇼트랜드

주연 스칼렛 조핸슨, 플로렌스 퓨, 레이첼 와이즈, 데이비드 하버

조연 레이 윈스턴, 윌리엄 허트, O.T 패그벤늘, 미셸 리

등급 12세 관람가

장르 액션, 모험, SF

국가 미국

러닝타임 134분

박수영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