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기. ‘송하독서도’. 103.8×49.5㎝. 삼성리움미술관
이명기. ‘송하독서도’. 103.8×49.5㎝. 삼성리움미술관

나이 60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52년 동안 다니던 학교를 드디어 졸업했다. 박사과정에 입학한 지 23년 만이다. 그 긴 세월 동안 논문을 쓰지 못했으니 거의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포기에 대한 변명은 여러 가지를 갖다 붙일 수 있었다. “내 나이가 몇인데”부터 시작해 “박사학위 받아서 무엇에 쓰려고” 등등 많았다. “나 혼자 알고 있으면 됐지 굳이 학위라는 형식이 필요한가”도 그럴듯한 핑계였다. 어떤 이유든 결론적으로는 “귀찮아서 쓰기 싫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 나이에 특별히 어디 써먹을 것도 아닌데 생산적이지 않은 일에 몰두하고 싶지도 않았다. 강의와 글 연재도 중요한 핑곗거리였다. “이번 글만 끝나면”과 “이번 강의만 끝나면”이란 말을 되풀이하는 동안 20년이 흘렀다. 이대로 내 인생에 박사학위는 없다 생각했다.

이상한 의욕

의외의 변수가 생겼다. 코로나19의 발생이었다. 처음에는 전대미문의 재난이 금세 가라앉을 줄 알았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비슷했던 것 같다. 작년 봄에 예정되었던 강의가 여름으로 미뤄졌다. 여름 강의는 가을로 미뤄졌고 가을이 오자 취소되었다. 올해도 상황은 비슷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연재와 강의로 되풀이되던 생활이 일시에 멈췄다. 거의 20년 만이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놀 때 제대로 놀아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자유인이 되었다. 그러나 자유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놀기 시작한 지 몇 달도 되지 않아 자유인의 또 다른 의미는 실업자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밥벌이를 위해 슬슬 뭔가를 해야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기 싫은 강의와 연재를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충전이 필요했다. 강의도 그렇지만 연재는 큰 주제 아래 매번 다른 내용을 써야 하기 때문에 압박감이 상당하다. 그런 짧은 글 말고 긴 호흡의 글을 쓰고 싶었다. 문득 논문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여년에 걸쳐 각 항목별로 내용을 정리해 두었으니 풀어쓰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혼자 하던 공부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참이라 누군가의 지도와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그럼 이참에 한번 써 봐? 이렇게 마음을 먹자 갑자기 의욕이 솟구쳤다. 나도 모르고 있던 이상한 의욕이었다. 큰 용기를 내어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나이 든 제자를 귀찮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큰 용기와 격려로 북돋아주었다. 그렇게 한 학기 동안 논문 쓰기가 시작되었다. 자발적 휴가가 아니라 강제적인 유폐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강제된 휴가와 자발적 은거

논문을 쓰면서 가장 큰 난관은 역시 저질 체력이었다. 처음에는 열의가 넘쳐 하루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욕심 같아서는 날밤을 새면서라도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안 따라 주었다. 과도한 욕심을 부렸더니 바로 후유증이 왔다. 몸살감기로 일주일을 누워서 끙끙 앓았다. 이러다가 오래 못 가지 싶었다. 규칙적인 생활이 필요했다. 오전에 서너 시간 집중해서 글을 쓰고 점심을 먹고 산책한 후 오후에 다시 글을 쓰고 저녁에는 무조건 쉬었다. 산책은 머릿속으로 논문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어 매우 유익했다. 논문은 연재와 달리 한 가지 주제만 깊이 있게 파고드는 맛이 있었다. 연재 글이 단편소설이라면 논문은 대하소설이라고나 할까.

논문 쓰기를 빨리 해치워야 할 지긋지긋한 일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살아오는 동안 “이것만 끝내고 나면”이라는 생각으로 후딱 지나가버리기를 바랐던 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논문 쓰는 기간도 나에게는 소중한 인생의 한 부분이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학위논문이 아닌가. 지쳐서 자꾸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괴질의 유행으로 느닷없이 쓰게 된 논문이지만 강제된 유폐를 자발적인 은거(隱居)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다산 정약용도, 추사 김정희도 유배를 당했기 때문에 불후의 역작을 남겼다. 물론 그들처럼 유명한 존재는 아니지만 강제된 지금의 유폐가 스스로에게 큰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게 자기세뇌를 거듭했다. 지금 이 나이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오히려 위로를 삼았다.

그러나 자기최면과도 같은 위로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런 추상적인 자기 확신 말고 복잡한 머리를 식힐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필요했다. 좋아하는 꽃나무를 사다 길렀다. 새로 사온 꽃나무는 분갈이를 하고, 웃자란 나무는 잘라서 물꽂이를 했다. 물꽂이 한 나무가 뿌리를 내리면 화분에 심은 후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나무 한 그루에서 여러 개의 화분이 나왔다. 분갈이를 하고 거름을 주고 물을 뿌려 싱싱하게 자란 나무를 보면서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면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나의 손을 통해 새롭게 피어나는 무수히 많은 꽃나무를 보면서 논문에 대한 부담감과 압박감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가 왜 이 논문을 쓰는지, 나의 논문이 학계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그 생각이, 논문이 안 풀려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나를 이끌어주는 힘이 되었다.

때로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화단의 풀을 뽑기도 했다. 봄비가 내릴 때쯤에는 화단의 빈터에 비비추를 옮겨 심었다. 화단 경계선에 심은 나무가 죽어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곳에는 사철나무를 꺾어다 삽목해 울타리를 만들었다. 몇 해 전, 한 장소에 심어 두었던 꽃무릇은 뿌리를 나누어서 아파트 곳곳에 심었다. 아파트 단지를 붉게 물들일 9월의 풍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그때는 논문도 이미 끝냈을 테니 편안한 마음으로 풍경을 감상할 것이 아닌가. 단지 내에 팔각정이 있으니 시원한 그늘에 앉아 있으면 굳이 힘들여서 선운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꽃무릇 축제에 참석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강세황. ‘청공도’. 비단에 연한 색. 23.3×39.5㎝, 선문대박물관
강세황. ‘청공도’. 비단에 연한 색. 23.3×39.5㎝, 선문대박물관

오래된 로망 실현하기

얼마 전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대전에 사는 그녀는 다음 주에 경주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올 계획이라고 했다. 리뉴얼된 경주박물관을 관람한 후 불국사에 가서 저녁 북소리를 들으며 명상을 하고 싶단다. 저녁에는 시원한 호텔에서 다리 뻗고 음악 들으면서 소설책을 읽을 예정이란다. 그 생각만으로도 벌써부터 행복하다고 했다. 학회나 일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여행이기 때문에 그만큼 편안하고 기대된다고 했다. 그동안 잘 살아 준 자신에 대한 포상휴가나 다름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들떠 있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조선 후기에는 산수유람의 풍조가 유행했었다. 그 결과 산천을 유람하면서 지은 유람기가 상당수 제작되었다. 속세를 떠나 자연에 은거하면서 청빈낙도를 추구하는 삶에 대한 동경도 상당히 높았다. 이런 삶은 한가롭고 아취가 있다 하여 ‘한아(閒雅)’하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한아한 삶을 동경한다고 해서 누구나 산천 유람을 떠나거나 자연 속에 은거할 수는 없는 법이다. 조선 후기 문인들이 고상한 삶을 위해 필독서로 간주했던 명대 문진형(文震亨)의 ‘장물지(長物志)’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산수에서 거처하는 것이 으뜸이고, 시골에서 거처하는 것이 그다음이며 교외에서 거처하는 것이 또 그다음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산속 동굴이나 계곡에 머무르며 은자(隱者)의 자취만을 좇을 수는 없는 법이다. 대신 자신이 살고 있는 속세에서 산수간에 은거하는 듯한 운치를 엿볼 수는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속의 번잡함과 시끄러움에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예스럽고 소박하고 검소한 것으로 운치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삶을 위해 집안 건물은 맑고 깨끗해야 하며 서재와 누각은 그윽한 운치가 있어야 한다. 정원에는 아름다운 나무와 기이한 대나무를 심어 바깥세상의 시간이 완전히 멈춘 듯한 원림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행위들이 장물(長物)이다. 장물은 ‘추워도 입지 못하고 배고파도 먹지 못하는 그릇’이나 다름없으니 경제성으로 따지면 세상 쓸모없는 행위나 같다고 했다. 그러나 그 쓸모없음이야말로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법이다. 장물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소비문화와 물질문화가 발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장물을 위해 명대 후기와 조선 후기에는 명승지로의 여행과 선유 놀이가 유행했고 정원과 별서(別墅)를 축조했다. 고동서화를 수집하고 감상하는 법에 탐닉했으며 분재와 화훼 취미에 몰두했다. 또한 서재에 필요한 분재, 서적, 벼루, 필통, 붓, 연적, 종이 등의 문방구에 특별한 관심을 쏟고 즐겼으며 그런 취미를 자랑하거나 과시하기까지 하는 풍조가 유행했다. 조선 후기의 강세황(姜世晃)이 그린 ‘청공도(淸供圖)’는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청공’은 ‘맑음을 갖추었다’는 뜻으로 문방구를 의미한다. ‘청공도’는 아무런 배경 없이 서안 위에 놓인 문방구와 화분과 지팡이만 그렸다. 그냥 보면 이렇게 심심한 그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겠지만 당시 사람들이 봤다면 담백하고 고상한 문인의 서재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쉽게 공감했을 것이다.

이명기(李命基)의 ‘송하독서도’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 선비가 초당 안에서 책을 읽고 있다. 선비의 독서는 끝날 줄을 모른다. 얼마나 오랫동안 읽었던지 처마 밑에서 찻물을 끓이던 아이가 기다리다 지쳐 졸고 있다. ‘여러 해 동안 책을 읽었더니 어린 소나무가 모두 늙은 용의 비늘이 되었네’라고 적힌 화산관(華山館·이명기)의 제시(題詩)와도 잘 어울린다. 세속의 번잡함과 화려함을 뒤로하고 소박하면서 아담한 서재에 앉아 책을 읽는 은거자의 삶은 그 실행 여부를 차치하고서라도 모든 문인의 로망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로망을 실현하면서 살기는 힘들다. 힘들다 하여 포기하는 것은 또 너무 팍팍하다. 뭔가 대안이 필요하다.

천지는 만물이 쉬어가는 여관

화단의 풀을 뽑고 비비추와 사철나무와 꽃무릇을 옮겨 심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논문뿐만이 아니라 역병 때문에 멀리 유람을 갈 수 없으니 내가 있는 곳에서 만족하자는 뜻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을 로망이 깃든 장소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원주택에서 혹은 정원 넓은 집이나 옥상정원이 있는 집에서 기화요초를 심고 감상하면서 살고 싶지만 현실 속의 나의 공간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지금 이곳을 그와 비슷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명승지를 유람하는 대신 ‘승경도(勝景圖)’를 벽에 걸고, 개인 정원을 축조하는 대신 아파트 화단에 꽃과 나무를 심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 같았다. 옛 그림을 감상하고 고전을 읽는 이유는 현재의 남루한 나의 삶터를 비관하는 대신 좀 더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닐까. 내게 지금 부족한 것을 탓하지 말고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을 충분히 누리고 즐기기로 했다. 언젠가는 누리고 싶어도 누릴 수 없는 특권이 아닌가. 한 친구는 부모님의 병간호 때문에 그 좋아하는 책 한 번을 읽지 못하고 있다. 또 절친한 지인은 병원에 누워 있느라 산책은커녕 걷는 것조차 힘들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특권도 영원한 것이 아닐 것이다. 지금이 아니고서는 누릴 수 없는 특권일 것이다.

지도교수를 찾아가던 1월에 눈이 내리는가 싶더니 봄이 되었다. 꽃이 피는가 싶더니 금세 후덥지근해졌다. 진달래가 지고 철쭉이 지고 매실이 익더니 장맛비가 쏟아졌다. 시간은 줄기차게 흘러 뜨거운 태양이 도로 위를 달구기 시작할 때쯤, 끝날 것 같지 않던 논문의 마침표를 찍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 학기만 더하면 정말 완성도 높은 논문이 될 것 같다는 미련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부족한 부분은 차후 소논문으로 발표하기로 하고 마침내 원고를 인쇄소에 넘겼다. 지난 6개월은 내 인생에서 흔치 않았던 뿌듯한 휴가였다. 그 어느 때보다 화분의 꽃을 많이 키우고, 아파트 화단을 더욱 풍성하게 가꾸고, 산책도 많이 했던 특별한 휴가였다. 이태백은 ‘천지는 만물이 쉬어가는 여관이요, 시간은 긴 세월을 지나가는 나그네’라고 했다. 우리도 천지라는 여관에서 시간이라는 나그네와 함께 살아간다. 가끔은 그 여정에서 한 번쯤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자기가 원하는 일에 푹 빠져서 사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추워도 입지 못하고 배고파도 먹지 못하는’ 장물에 빠져서 말이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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