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리아가 최후를 맞은 도시 터키 카르카미스 유적지 건너편으로 시리아가 보인다.
아시리아가 최후를 맞은 도시 터키 카르카미스 유적지 건너편으로 시리아가 보인다.

이공간(異空間)으로의 이동이 여행이다. 물리적 의미지만, 집에서 떠나 생소한 곳으로 가는 것이 여행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여행이 일반화된 것은 언제일까?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략 기원전 3200년 전후가 아닐까 싶다.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의 설형문자가 인류 최초로 등장한 시기다. 중국 최초의 문자인 기원전 15세기의 갑골문자보다 무려 1700년 앞선, 인류 최초의 문자다. 문자가 탄생한 가장 큰 이유는 농산물과 가축의 관리에 있었다고 한다. 양이 몇 마리인지, 밀과 목재를 어디에 얼마나 팔고 샀는지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설형문자가 활용되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내 1차산업 비즈니스가 수메르 문자 탄생의 배경인 셈이다.

여행은 문자 탄생과 함께 시작된다. 당연하지만, 고대 비즈니스는 현장에서 이뤄지는 물물교환이다. 거래가 이뤄지는 장소에 당사자가 직접 가야만 한다. 다른 곳에서 가축을 원할 경우 소나 염소를 데리고 이동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공간에 가면 비즈니스 파트너가 기다리고 있다. 호텔이나 식당도 없던 시대였지만 거래 상대의 집에 가서 숙식도 해결할 수 있었다. 문자 탄생과 함께 비즈니스도 활발해지고 더불어 사람들의 이동도 본격화한 것이다. 물론 21세기에서 보듯 보고 먹고 즐기는 데 초점을 맞춘 여행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공간에서 비즈니스를 행하는 동안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새로운 문화와 더불어 앞선 문명도 접한다. 결과적으로 서로 배우고 경쟁하면서 메소포타미아 전체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순례는 수메르인이 행한 여행 방식 중 하나이다. 비즈니스를 통한 이동도 있지만 순례를 통한 여행도 수메르에서부터 본격화했다. 메소포타미아는 다신교 사회다. 개인의 신, 도시 국가의 수호신, 메소포타미아 전체의 신에 대한 경배가 5000년 전 인류의 보편적인 일과다. 신에게 잘못 보일 경우 곧바로 큰 화를 당할 것이라 믿었다. 당시의 신은 용서와는 무관했다. 무섭고도 잔인한 공포의 신이었다. 따라서 수많은 신에게 기도를 하고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주기적으로 행했다. 신전은 거주지 주변만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곳에도 세워졌다. ‘태양, 달, 물, 불’을 주관하는 메소포타미아 수호신의 경우 수주일 걸어야만 만날 수 있었다. 가족이 총동원돼 신전까지 찾아갔다. 제물용 동물을 앞세우고 야외에서 숙식을 해결해야만 했다. 당시 신전은 신을 위한 공간만이 아닌, 은행이자 창고인 동시에 지역 내 정보가 오가는 네트워크의 현장이었다.

고대도시는 신들의 공간

순례로서의 여정(旅程)이라고나 할까? 필자가 터키 내 메소포타미아 도시 카르카미스(Karkamis)에 들른 가장 큰 이유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여행보다는 순례에 방점을 찍게 됐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장년의 세계로 접어들면서 여행관이 변하게 된다. 먹고 마시고 즐기던 여행에서 멀어진다. 체력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쉐린스타 레스토랑에 가도 식욕이 예전만 못하다. 와인 한 병에서 반 병으로, 이제는 잔으로 마시게 됐다. 그렇다 보니 여행의 무게중심을 다른 곳으로 두게 된다. 신의 세계는 그중 하나다. 고대도시는 인간만이 아니라 일상으로서의 신들도 함께 거주했던 공간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접했던 가까운 존재가 당대의 신이었다. 수천 년이 흘렀지만 열심히 찾는다면 신의 그림자를 곳곳에서 찾아낼 수 있다. 물론 고대인들이 어떤 식으로 신을 대했는지도 알 수 있다.

카르카미스를 순례의 대상, 즉 순례지로 만든 사람들은 고고학자다. 땅속에 묻혀 있던 수천 년 전의 기억을 부활시켜준 고마운 존재다. 유프라테스가 몰고 온 10m 높이의 퇴적물을 파헤친 뒤 어제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모두에게 전해준 사람들이다. 다른 고대도시도 마찬가지지만, 흙 속의 도시를 밝은 태양 속에 재등장시켜준 고고학자에 관한 무용담들이 많다. 전설 속의 고대도시 트로이를 발굴한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은 대표적인 본보기다. 카르카미스도 세계인 모두가 기억하는 유명한 고고학자를 낳았다. 고고학자와 더불어 ‘스파이’란 기묘한 타이틀을 함께 가진 인물이다. 본명은 토마스 로렌스(Thomas E. Lawrence)지만 별명인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알려진 고고학자다. 옥스퍼드대학의 고고학 전공자로, 대학을 졸업하던 1910년부터 1914년까지 카르카미스 발굴에 나섰다. 카르카미스를 찾는 외국인의 대부분은 영국인이다. 이유는 로렌스 덕분이다. 터키인은 물론 메소포타미아 거주민 대부분에게 생소한 유적지지만, 로렌스 덕분에 대학 나온 영국인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영국인에게 카르카미스는 바로 20대 초 로렌스의 흔적이 새겨진 역사와 청춘의 현장에 해당한다. ‘고대문명, 사막, 전쟁, 독립, 여행’으로 이어지는 뭔가 뜨겁고도 환상적인 세계가 로렌스를 통해 영국인 가슴속에 전해진 것이다.

카르카미스 유적지에서 발견된 기원전 8세기 히타이트 군인 조각상.
카르카미스 유적지에서 발견된 기원전 8세기 히타이트 군인 조각상.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발굴한 도시

로렌스는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유적 발굴을 중단하고 영국 정보부로 들어가 스파이로 활동한다. 20세기 초 시리아를 비롯한 아랍권 나라는 오스만제국 지배하에 있었다. 영국이 아랍권에 독립을 약속하면서 터키와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로렌스가 현지에 투입된 것이다. 현지 지리 감각과 더불어 아랍어에 대한 언어능력이 스파이로 발탁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아날로그 시대의 상식이지만 ‘땅과 사람’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기본이었다. 사격 실력과 비밀공작에 앞서, 현지 언어를 기초로 지리, 지형, 지세에 관한 지정학적 체험이 당시 스파이의 기본조건이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풍수지리 전문가가 현지 파견 스파이로 변신하는 격이지만 로렌스는 그 같은 조건에 가장 합당한 인물이었다.

카르카미스는 메소포타미아의 좌장 유프라테스에 붙어 있는 고대도시다. 더불어 내전 중인 시리아도 눈앞에 들어서 있다. 문명의 젖줄과 21세기 내전의 현장을 함께 보자는 의미에서 왕복 700㎞ 고대도시로 달렸다. 불경스럽게 들릴 듯하지만 필자에게 4대 문명지는 넓고도 깊은 수영장으로 먼저 와 닿는다. 카르카미스가 유프라테스에 인접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수영복, 물안경, 귀마개, 수건부터 챙겼다. 시신이 둥둥 떠다니는 인도 갠지스에서는 불발이었지만, 나일과 황허에서의 수영은 필자의 청춘에 새겨진 선명한 기억 중 하나다. 현지 강에서의 수영은 4대 문명을 오감으로 체득하는 가장 원시적이고도 확실한 방안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물론 수영은 현지인이 이용하는 강변이어야만 한다. 위험하기도 하지만 물과 몸을 통한 현지인과의 교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양인은 아주 ‘희귀한’ 존재다. 수영을 하는 동안 ‘천연기념물’을 구경하려는 현지인, 사진을 함께 찍자는 사람들로 번잡했다.

유프라테스는 완만한 유속에다 깊고도 넓은 강으로 통한다. 수영을 하던 중 알았지만, 조금만 강 안쪽으로 들어가도 수심 10m 이상이다. 전체적으로 탁한 물이기 때문에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카르카미스는 유프라테스 전체를 통틀어 수심이 가장 얕은 곳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간단히 횡단할 수 있게 되면서 도시가 들어선 것이다. 목재는 카르카미스가 내세운 특화 산업이었다.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빽빽이 들어선 주변의 나무를 절단해서 가공, 거래한 곳이 카르카미스였다. 배달은 당시의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강을 통해 이뤄졌다.

카르카미스, 고대 역사서 곳곳에 등장

카르카미스는 불과 2년 전인 2019년 6월 일반인에게 공개된 유적지다. 메소포타미아 내 모든 고대 유적지가 그러하듯 역사가 엄청나다. 8000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들어선 도시로 이후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16세기 이집트 지배하에 들어선다. 당시 이집트는 나일강 주변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상류지역도 지배했다. 이후 기원전 14세기 히타이트가 등장해 카르카미스를 지배한다. 기원전 12세기 청동기 문화가 끝나고, 히타이트도 카르카미스 주도권을 잃게 된다. 뒤이어 등장한 세력은 아시리아다. 아시리아는 한때 이집트까지 공략한 인류 최초의 세계제국이다. 아시리아의 번영은 기원전 7세기 등장한 바빌로니아에 의해 추락한다. 아시리아는 수도인 니네베(Nineveh)를 바빌로니아에 넘겨준 뒤 제2, 제3의 수도로 도망가 방어작전을 편다. 카르카미스는 아시리아 제3의 수도로, 세계제국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진 비극의 땅이다. 카르카미스라는 지명은 구약성경의 예레미야서 46장에 등장할 정도로 당대의 대도시로 통하던 곳이다. 카르카미스가 바빌로니아 공격에 패한 뒤 망했다는 얘기가 예레미야서의 핵심이다. 여의도의 약 3분의1 정도 크기에 불과한 공간이지만, 구약성경만이 아니라 유럽 고대 역사서 곳곳에 등장하는 곳이 카르카미스다. 스파이 고고학자 로렌스가 발굴한 현재의 카르카미스 모습은 아시리아 패망 당시의 흔적들이다. 생로병사는 인간만이 아니라 도시에도 적용된다. 정복자가 바빌로니아로 바뀌면서 카르카미스의 운명도 하향세로 접어든다

카르카미스에 도착하는 순간 매표소를 지키던 안내인이 다가왔다. 돈을 꺼내는데 입장료가 무료라고 한다. 안내판을 보니 현지 안내인을 통해 2시간에 한 팀만 유적지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아직 발굴 중이란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카르카미스 곳곳에 묻힌 지뢰가 안내인 동행의 가장 큰 이유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지상군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책으로 지뢰가 매설된 것이다. 대부분 제거됐지만 100% 안전하지는 않다고 한다. 유적지 방문은 곧바로 이뤄졌다. 2시간마다 한 팀이라고 하지만 여름철의 경우 일주일을 통틀어 찾아오는 방문객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라고 한다.

철책으로 둘러싸인 카르카미스 안으로 들어갔다. 왼쪽에 높이 5m 정도의 무너진 성(城)이 들어서 있다. 메소포타미아 건축법의 기본이지만 건축 재료의 대부분이 진흙이다. 강에서 얻은 진흙을 짚이나 다른 재료와 섞어 축조하는 식이다. 돌이 아닌 흙으로 만든 성이기 때문에 거의 주저앉은 상태다. 성의 바로 맞은편, 즉 남쪽은 시리아 국경선이 펼쳐져 있다. 높이 3m 정도의 철판 담이 국경선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 있다. 시리아 마을은 국경선에 바로 붙어 있다. 담 너머 시리아 마을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움직임도 눈에 들어온다. 인구 수천 명은 됨 직한 규모다. 카르카미스 유적지에는 터키인 거주자가 없다. 원래 있었지만 유물 발굴이 본격화되면서 전부 외지로 옮겨 갔다고 한다. 시리아 국경도시도 원래 카르카미스 고대도시권에 들어간다. 그러나 발굴은 터키 안에서만 이뤄지고 있다. 내전 때문이겠지만 시리아 쪽 유물·유적 조사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때마침 시리아 마을에 들어선 모스크에서 기도 소리가 들려온다. 아라비아어로 이뤄진 기도이기에 터키인은 알아들을 수 없다.

카르카미스 유적지를 발굴한 고고학자이자 스파이로 알려진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1913년 현장을 찾은 모습.
카르카미스 유적지를 발굴한 고고학자이자 스파이로 알려진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1913년 현장을 찾은 모습.

초승달이 지키는 도시

성안으로 들어서자 탁 트인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메소포타미아 고대도시답게 눈을 즐겁게 해줄 유물·유적은 드물다.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 멸망 이후로 따지자면 무려 2700년 전에 번성했던 도시가 카르카미스다. 도시의 동쪽 끝 유프라테스강 주변으로 걸어가자‘겨우’ 아시리아와 히타이트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신과 당시의 군인으로 채워진 조각들이다. 조각 재료인 석재는 전부 강을 통해 옮겨졌을 것이다. 카르카미스 한복판에는 높이 30m 정도의 작은 언덕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터키 국경부대가 주둔하는 군사지역이지만, 수천 년 전에는 카르카미스 도시 수호신을 모신 공간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수호신은 달의 신인 ‘난나르(Nannar)’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 당시 셀레네(Selene)로 통하던 신의 전신인 셈이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대리석 계단이 인상 깊다.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도시답게, 진흙을 기초로 한 건물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돌로 된 구조물은 진흙 건물 위에 세워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달의 신의 성별이다. 로마의 셀레네는 여신이지만, 메소포타미아의 난나르는 남신으로서 추앙됐다. 초승달은 메소포타미아 내 이슬람권의 상징이다. 보름달이나 이집트와 같은 태양이 아니라, 얇게 보이는 초승달이 이상하게 느껴질 듯하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초승달은 원점, 출발, 부활을 의미한다. 거꾸로 보름달은 마지막이자 최후의 시간으로 통한다. 연말 로마 바티칸에서 직접 확인한 것이지만 예수가 태어난 12월 25일도 출발을 의미하는 초승달 밤으로 표현된다. 같은 문화권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순례로, 여행으로, 스파이 고고학자의 발자취 찾기로의 카르카미스 방문은 3시간 만에 끝났다. 나무 하나 없는 황량한 곳이기에 얼굴과 손등 전체가 탔다. 수영과 더불어 아날로그 메소포타미아의 정취를 온몸으로 체득한 셈이다. 밤이 되자 달이 떴다. 실눈썹 같은 초승달이다. 처음으로 실감했지만 자세히 보면 볼수록 보름달에 준할 만큼 밝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름달은 눈으로, 초승달은 마음으로 읽는 존재인 듯하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두 개의 강을 아우른 메소포타미아 전체가 달의 신 난나르의 따뜻한 빛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원점, 출발, 부활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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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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