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은 한국 민족의 대표적 민요이다. 한국 민족이 사는 곳에서는 지구 어디서나 ‘아리랑’을 들을 수 있다. 한반도의 거의 모든 고을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닦인 독특한 가락의 아리랑이 있는 걸 보면 이 민요는 아득한 옛날 한국 민족의 조상들이 창작하여 온 나라에 퍼져서 즐겨 부르던 노래가 후손에게 전승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 문화재청의 조사에 의하면 현재 파악된 것만도 약 60여종 3600여수의 ‘아리랑’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아리랑’에는 한국인들의 사랑·그리움·기쁨·슬픔·이별·상봉(만남)·반김·미움·한(恨)·탄식·원망·염원·행복·희망 등 모든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놀라운 것은 수많은 ‘아리랑’이 수백 수천의 수많은 사연을 사설로 엮으면서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의 한 가지 여음(餘音)으로 하나로 꿰뚫려 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국인이 ‘아리랑’을 무척 사랑하고 온 민족이 수시로 노래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노랫말의 뜻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민요 ‘아리랑’이 말뜻을 잃어버릴 만큼 아득한 옛날에 창작되어 전승된 민요임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필자도 ‘아리랑’의 말뜻을 몰라 참으로 오랫동안 헤매왔다. 그러다가 2003년 1월 국내 일간지에 ‘아리랑’의 말뜻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간단한 논문으로 발표했었다.(‘아리랑의 뜻과 한국인의 사랑’·동아일보 2003년 1월 16일 자 및 30일 자)
그 요지는 ‘아리랑’의 ‘아리’는 ①‘고운’ ‘아리따운’의 뜻과 ②가슴이 ‘아리’도록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이 함께 중첩되어 담긴 옛말임을 간단히 논급하였다. 또한 ‘랑’은 ‘님’으로서, 한자가 삼국시대에 처음 보급되기 시작할 때 ‘랑(郞·娘)’으로 이국적 멋을 내어 호칭어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밝히면서, 신라 향가의 ‘죽지랑가(竹旨郞歌)’, ‘기파랑가(耆婆郞歌)’의 예를 증거로 들었다. 또한 ‘아라리’는 ‘가슴앓이’ ‘상사병’의 옛말임을 밝혔었다.
곱고 그리운 님, 아리랑
민요 ‘아리랑’의 변하지 아니하는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는 번역하자면 ‘곱고 그리운 님, 곱고 그리운 님, 가슴이 아리도록 (상사병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워라’라는 뜻이다. 이것을 번역문으로 노래하면 멋이 없다. ‘아리’의 ‘고운’과 ‘그리운’의 합성어가 현대말에는 이미 분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역시 이것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의 말로 노래해야 곱고도 그리운 님 ‘아리랑’을 ‘아라리오’의 동일 어조가 받아서 멋이 살아난다. 이 가사 어구는 현대말로 치환되지 않는 고대 멋쟁이 말이다.
삼국시대 이후 ‘아리랑’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전파되고 각종 가사(사설)와 곡조(가락)로 변용되면서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애창되었다. 고려왕조시대와 조선왕조시대 기록에 ‘아리랑’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문자 채록을 게을리한 것을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발명되고 한자도 널리 보급된 조선왕조시대에 오면 임진왜란 때의 아리랑 가사에 ‘할미성 꼭대기 진을 치고/ 왜병정 오기만 기다린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의 사설이 채록되어 있다. 고종임금과 명성황후가 궁중 잔치에 광대를 불러서 안성 아리랑 ‘오다가다 만난 님을/ 죽으면 죽었지 나 못 놓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를 불렀고 명성황후가 “그렇지 그렇지” 하고 넓적다리 장단을 맞추어 쳤다는 기록은 백성의 민요 ‘아리랑’이 왕실과 궁중에서도 애청되었음을 알려준다. ‘무극관인’이라는 사대부가 ‘농부사’를 지으면서 후렴에 ‘아리랑 아리랑 에헤야’를 되풀이한 것도 이미 양반 사대부들도 백성의 민요 ‘아리랑’을 흥겹게 노래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1890년대에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된 미국인 호머 허버트가 한국 대표 민요로 ‘아리랑’을 채록하면서 “한국인에게 문화적으로 ‘아리랑’은 식생활의 쌀과 같다”고 비유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민요 ‘아리랑’의 기원은 원래 남녀 연인 사이의 노래였지만, 한국 민족이 긴 역사를 살아오는 동안에 ‘곱고 그리운 님’에 연인뿐만 아니라 부모·형제·친우·동포·조국·민족 등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대상을 넣어 ‘아리랑’의 내용이 크게 확대되었다. 또한 ‘아리랑’을 부르는 곳도 모든 경우로 확대되었다. 잔치마당에서만 ‘아리랑’을 부른 것이 아니라 농사일이나 부엌일에서도 아리랑은 노동요가 되어 불렸다.
일제강점기 ‘아리랑’은 처음에는 민중들이 구한말의 ‘아리랑’을 그대로 이어서 부르다가 3·1운동을 전환점으로 ‘민족가요’의 측면이 급속히 강화되었다. 결정적 계기는 ‘음악’ 부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운규(羅雲奎·1902~1937)의 영화 ‘아리랑’(1926년)이 제작, 개봉되어 매우 큰 성공을 거둔 덕분이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은 1926년 10월 1일 서울 단성사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영화 ‘아리랑’이 상영되자마자 조선인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관람객이 줄을 이어 전국에서 2년 이상 ‘만원’이 계속되었다. 전국 각지뿐만 아니라 일본의 한국인 거주지역과 중국 간도지방에서도 순회 상영되어 관객의 열렬한 호응이 일어났다. 수백만 명의 한국인이 영화 ‘아리랑’을 관람하고 호응한 것이다.
영화 ‘아리랑’의 마지막 장면은 동네사람들이 합창하는 ‘아리랑’이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주인공 영진이 ‘아리랑 고개’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아리랑’의 주제가이면서 영화 속에서 합창한 ‘아리랑’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②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
④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인 말도 많다
일제의 검열을 고려하여 만든 작사이지만 일제는 제4절의 ‘우리네 살림살인 말도 많다’의 구절을 트집 잡아 박해하였다.
이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저항의식을 담아 가장 널리 불렸을 뿐만 아니라 광복 후 남북이 국제체육경기에서 ‘국가’에 대신할 노래로 ‘1920년대 아리랑’이란 표현으로 ‘아리랑’을 합의, 채택했기 때문이다.
나운규의 1926년 영화 ‘아리랑’은 민요 ‘아리랑’ 그 자체의 발전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첫째, 민요 ‘아리랑’에 민족의식이 깊이 들어간 ‘민족 가요 아리랑’으로 성격 변화를 일으켰다. 물론 ‘전통민요 아리랑’도 조선 민족의 사랑노래, 노동노래, 뱃노래, 권주가, 자장가 등 객관적 사실로서의 ‘민족가요’로 정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민족의식의 요소를 기준해서 보면 일종의 ‘즉자적(卽自的)’ 민족가요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는 의도적으로 ‘민족의식’이 깊이 들어가 용해된 ‘대자적(對自的)’ 민족가요로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는 당시 한국 민족 성원 사이에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어느 종류의 ‘아리랑’보다도 가장 널리 불려서 아리랑의 새로운 기준이 된 ‘신(新)아리랑’으로 확립되었다. ‘아리랑’ 가사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의 가사는 신아리랑의 표준(기준) 가사가 되어 전국 모든 분야에서 수용되고 사용되었다. 또한 나운규가 ‘경기 아리랑’을 바탕으로 약간 빠르게 편곡한 ‘신아리랑’의 곡조 역시 전국 모든 분야에서 수용되고 사용되었다. ‘전통민요 아리랑’을 직접 계승하여 ‘신아리랑’이 탄생한 것이다.
셋째, ‘아리랑 고개’의 개념이 정립되었다. 나운규는 ‘아리랑’의 뜻을 알지 못하여 해석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경기민요에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쑤 배 띄워라’로 ‘아리랑 고개’ 자체는 없다. 나운규는 ‘아리랑’을 고개 이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아리랑’과 ‘아리랑 고개’를 노래 가사와 영상에서 모두 개념으로 정립, 사용하였다.
특히 영상에서는 수갑을 차고 마을의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면서 사라지는 주인공을 비추면서 상징적 ‘아리랑 고개’를 설정하였다. 영화 ‘아리랑’의 이러한 종결은 ‘아리랑’을 상징적 고개 이름으로 해석하는 흐름을 정립시켰다. 심지어 ‘아리랑 고개’의 실재를 상정하고 이를 한반도 지리에서 찾는 학자들도 나타났다. 나운규의 1926년 영화 ‘아리랑’과 그 주제가 ‘신아리랑’은 가사, 곡조, 영향력에서 모두 ‘아리랑’의 역사에 혁명적 변동을 가져왔다. 나운규의 독립투쟁을 향한 애국심과 천재적 구상 및 정성을 다한 열정적 헌신이 민족가요에 ‘신아리랑 혁명’을 탄생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