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잃은 날(29일)도 있고 되찾은 날(15일)도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이야말로 우리에게 숙명적인 존재다. 숙명이란 싫다고 해서 맘대로 떼어버릴 수도 없다. 더구나 일본에는 우리 국적을 고수하든 아니든 간에 여전히 수많은 동포가 살고 있다.

그들은 우리 현대사를 온몸으로 짊어진 우리의 핏줄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과 뜨거운 유대를 이어가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동포의 존재를 차츰 잊어가고 있다. 반면 많은 동포들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대를 이어 정체성을 지켜내고 있다. 지난 올림픽에서도 동포 3세인 안창림 선수가 유도 종목에서 우리에게 값진 메달을 안겨주었다.

이런 와중에 요즘 재일동포의 숙명적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다룬 소설이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바로 재미작가 이민진의 ‘파친코’(2017)다. 작가는 3~4대에 걸친 한 재일동포 가문의 애환을 통해 그들의 고단한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 소설은 8부작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고 있는데, 윤여정이 주인공 순자 역을 맡는다고 해서 또한 화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런 강렬한 주문(呪文)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 가난한 집 막내딸 양진은 언청이에 절름발이인 훈이와 결혼한다. 훈이는 몸은 불편해도 헌신적인 남편이었다. 하지만 그가 일찍 죽자, 양진은 외동딸 순자를 데리고 하숙을 치며 근근이 살아간다. 시내로 장을 보러 다니던 순자는 ‘멋쟁이’ 고한수를 만나 임신을 한다. 하지만 한수가 일본에 처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결별한다.

이 무렵 하숙에는 백이삭이라는 목사가 찾아온다. 그는 일본 오사카에 사는 작은 형 요셉에게 가는 길이다. 그는 부유한 크리스천 집안 출신이다. 그러나 일제의 핍박으로 목사였던 큰형은 이미 죽고 가세가 크게 기울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병약하던 그는 각혈을 하며 또다시 건강이 악화되지만, 순자 모녀의 보살핌으로 겨우 건강을 회복한다.

마침 순자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삭은 “아이는 하늘의 축복”이라며 순자에게 청혼을 한다. 그는 순자를 데리고 오사카로 간다. 형 요셉과 그의 처 경희 사이에는 애가 없다. 형 부부와 이삭 부부는 함께 살기 시작한다. 이삭은 쇠락한 한인교회 부목사로 봉직한다. 곧 한수의 핏줄인 노아가 태어난다. 가족은 노아를 진심으로 자신들의 자식으로 받아들인다.

곧이어 이삭의 핏줄인 둘째 모자수가 태어나지만, 이삭은 천황에 대한 불경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다. 가난에 쪼들린 순자는 경희의 도움을 받아가며 김치 행상을 시작한다. 이때 불고기 식당의 한국인 사장이 찾아와, 식당에 와서 김치를 만들어 달라며 두둑한 보수를 제시한다. 순자와 경희는 식당으로 출퇴근하게 된다. 풀려난 이삭은 집에 돌아와 숨을 거둔다.

요셉은 새로운 직장을 찾아 나가사키로 떠난다.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미군의 폭격이 임박한다. 식당도 문을 닫게 된다. 이때 12년 만에 순자 앞에 한수가 나타난다. 그는 야쿠자의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사실 한수는 그동안 순자와 노아의 주변을 맴돌았다. 순자가 일했던 식당의 실제 주인도 한수였다. 그는 순자, 노아, 모자수, 경희를 시골 농장으로 대피시킨다.

곧이어 한수는 부산에 홀로 있던 순자 어머니 양진을 데려온다. 또한 나가사키에서 원폭으로 화상을 입은 요셉도 찾아온다. 종전이 되자, 한수의 건설회사가 요셉의 집터에 새 집을 지어준다. 요셉 부부와 순자, 노아, 모자수, 그리고 양진까지 함께 산다. 요셉의 투병으로 집안은 어수선하다. 노아는 고등학교 졸업 후 경리사원으로 일하며, 입시 준비에 매진한다.

노아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본인처럼, 아니 일본인이 되어 사는 삶을 꿈꾼다. 실제로 지적이며 공부도 잘했다. 반면 작은아들 모자수는 공부에 관심이 없고, 차별에 분통을 터트리며 일본 학생들과 싸움을 벌인다. 결국 모자수는 고교를 중퇴하고 파친코 회사에 취직한다. 거기서 수완을 발휘하여 파친코 운영 책임자가 된다.

한편 노아는 와세다대학에 합격하지만 학비 마련이 막막하다. 이때 한수가 나서서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고 숙소까지 마련해 준다. 그러나 한수가 야쿠자이자 자신의 생부임을 알아차린 노아는 대학을 중퇴하고 가족과 연락을 끊는다. 그는 무작정 나가노로 갔다가, 조선인은 안 된다는 일본인 파친코 회사 사장에게 자신은 일본인이라고 속이고 취직을 한다.

그 역시 능력을 발휘하여 책임자가 되고, 일본인 여자를 만나 자식을 낳고 가정을 꾸린다. 순자에게도 매달 꼬박꼬박 돈을 부친다. 한수가 그의 소재를 찾아내 순자를 데리고 간다. 하지만 순자를 만난 노아는 순자와 헤어지자마자 자살을 하여 생을 마감한다. 순자는 한수를 원망하면서도 점점 늙어가는 한수의 모습에 애잔한 연민을 느낀다.

한편 동생 모자수는 파친코 회사를 넘겨받고 자신도 회사를 연달아 세우며 큰 부를 쌓는다. 결혼도 하고 아들 솔로몬도 낳는다. 하지만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는다. 그는 아들을 애지중지 키우며 미국 유학까지 보낸다. 순자도 거칠게 늙은 몸에 가끔 프랑스제 명품을 걸친다. 그러나 요셉의 투병으로 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울적하다.

유학에서 돌아온 솔로몬은 외국계 투자은행에 취직을 한다. 거기서 일본인 상사의 배려(?)로 대형 프로젝트팀에 발탁된다. 오사카 어느 지역의 대단위 개발을 위한 토지 매입 과정에서 한 노파가 땅을 안 팔겠다고 버텨 사업이 난항을 하고 있었다. 솔로몬에게서 사정을 전해들은 모자수는 인맥을 동원하여 그 일을 해결해 준다. 마침 그 지주가 조선인이었다.

그러자 솔로몬은 곧바로 회사에서 해고된다. 일본인 상사는 솔로몬 아버지가 조선인으로 오사카에서 파친코를 운영하는 야쿠자라고 생각하고 토지 매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도움을 받자, 솔로몬을 이용만 해먹고 버렸다. 일본 사회에 환멸을 느끼며 아버지에게 돌아온 솔로몬은 아버지의 파친코 회사에서 일하기로 한다.

형제는 전혀 다른 기질을 가졌지만 모두 파친코에 종사했다. 유학을 다녀온 솔로몬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다. 이런 격랑 속에서 여성들의 고통과 희생은 더욱 크다. 순자는 여자로서는 잠시뿐이고, 평생 동안 고단한 어머니로 살았다. 그는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악을 쓰며, 좌절 속에서도 억척스럽게 삶을 이어갔다.

파친코는 재일동포에게 경제적 풍요를 안겨주지만, 아무리 양심적으로 일해도 야쿠자와 연관된 부정적 이미지를 씌웠다. 그럼에도 달리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재일동포들은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파친코’는 재일동포의 상징이자, 기호인 것이다. 그들이 레슬링, 가라테, 유도 등에서 묵묵히 기량을 연마한 것도 같은 문맥이다.

일본 사회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최근에는 험악해진 한·일 관계로 인해 “자이니치(在日)는 돌아가라”는 막말까지 더욱 극성이다. 재일동포야말로 양국의 현대사가 한데 얽혀 만들어낸 숙명적인 경계인이다. 따라서 양국이 윈윈하는 호혜적 관계를 맺어야 그들의 삶도 편안하다. 이를 위해서라도 ‘반일 아니면 친일’이라는 일차원적 사고를 극복하는 일이 급선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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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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